IMF 1년, 떼돈 번 ‘알짜 기업’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8.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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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삼성증권 선정 ‘IMF 호황 기업 베스트 10’/수출 주력·한 우물 파기 ‘공통점’
환율 급등과 고금리로 인해 부도·실업·자살이 끊이지 않았던 한 해.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사상 최대 흑자를 거둔 기업이 적지 않다. 이른바 ‘IMF 호황 기업’들. <시사저널>은 삼성증권 리서치센터로부터 도움을 받아 대표 기업 10개를 선정했다. 기준은 환율 급등과 고금리 덕분에 오히려 경영 실적이 호전되고 재무 상태가 좋아진 기업들(76쪽 표 참조). 이들은 비록 몸집은 작아도, 업계에서는 이미 ‘알짜’ 로 정평이 나 있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수출 기업이라는 것이다. 내수 기업들이 환율 급등으로 최악의 한 해를 보내야 했다면, 이들은 반대로 환차익을 톡톡히 보았다. 수출 비중이 가장 높은 기업은 한국전기초자. 이 회사는 생산 제품 전량을 해외에 수출한다. 영원무역(98%)·동양전원(97%)이 그 뒤를 따른다. 나머지 다른 업체도 대부분 매출액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70%를 넘는다.

영원무역을 보자. 이 회사는 방글라데시와 중국에 공장을 13개 가지고 있다. 최고급 스포츠 의류를 만들어 나이키·FILA·인터스포츠 등 전세계 50여 바이어에게 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OEM)으로 납품한다. 이미 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정받아 납품 가격을 정할 때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는다. 93년부터 해마다 36%씩 매출이 늘었고, 최근에는 신발 산업에 뛰어들어 관련 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풍족한 여유 자금으로 ‘이자 수익’ 챙겨

지난 6월 말 현재 이 회사 부채 비율은 97.2%. 그러나 실제로는 빚보다 가지고 있는 현금이 더 많다. 올해 말에는 순 현금이 4백69억원에 이르고, 2000년에는 천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수출 비중이 높다 보니 환차익을 누리고, 고금리 상황이 벌어지면 ‘돈놀이’까지 할 수 있는 ‘전천후 기업’이다.

한국화인케미칼·동양전원·대덕전자도 사정이 비슷하다. 부채 비율이 모두 100%가 안되고, 빚보다 현금이 많은 것도 영원무역을 닮았다. 한국화인케미칼의 주력 제품은 신발·자동차 내장재를 만드는 화학 원료(TDI)와 정밀 화학제품 EDP-CL. 생산량의 78%를 수출하는데, 이 회사는 요즘 표정 관리에 바쁘다. 전체 매출액의 80%를 차지하는 TDI 국제 가격이 계속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상반기에 t당 1천6백50 달러이던 것이 지금은 1천8백 달러로 껑충 뛰었다. 게다가 이 제품의 원료인 DNT를 국내에서 공급받는데다 수출은 40% 이상 급증해 환차익 규모가 더 커졌다.

한국화인케미칼은 현재 TDI를 연간 3만3천t 생산하는데, 내년에는 생산량을 2배로 증설하는 작업이 끝나 2000년부터 본격 생산에 들어간다. 이렇게 되면 세계 TDI 시장의 20% 가까이를 차지하게 된다. 지난 10월 신한종합연구소가 상장사 전체를 대상으로 수익성·안정성·성장성을 따질 때 한국화인케미칼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풍족한 여유 자금으로 이자 수익을 챙기는 점에서는 동양전원·대덕전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전세계 고압 트랜스(HVT) 시장의 40%를 장악한 동양전원은 지난 상반기에 이자 수입으로 벌어들인 돈만 24억원이다. 인쇄회로기판(PCB)을 만드는 대덕전자도 사정은 마찬가지. 지난 6월 말 현재 이 회사의 순 현금이 1백40억원에 이르고, 올해 순익은 지난해의 3배나 될 것으로 보인다.

98년이 가장 즐거운 기업은 아무래도 온산에 있는 고려아연일 것이다. 이 회사는 관계사인 (주)영풍과 함께 국내 아연괴와 전기연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업체. 지난해 순이익이 28억5천만원이었는데, 올해는 흑자 규모가 20배나 불어난 5백70억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IMF 체제 덕분에 창사 이래 최대 흑자를 실현한 것이다. 이 회사의 흑자 비결은 특별한 것이 없다. 내수가 워낙 침체해서 수출을 늘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환차익이 커져서 최대 호황을 누리게 된 것이다.

부채 비율이 100%를 넘지만, 안정성·성장성·수익성 면에서 탁월한 성과를 남긴 기업으로는 한국타이어와 이수화학이 꼽힌다. 올해 상반기에 자동차 업체들의 공장 가동률은 50%에도 미치지 못했고, 타이어 내수도 21.5%나 감소했다. 그런데도 한국타이어의 매출액은 27.8%나 늘었다. 수출 물량은 17%밖에 증가하지 않았지만 환율이 급등해 수출액이 72%나 늘어났다. 게다가 원재료인 천연고무 가격이 40%나 떨어졌다. 그 덕에 이 회사는 지난해의 갑절이나 되는 순익을 거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회사 생산 규모는 세계 10위. 그러나 품질 면에서는 그 이상의 평가를 받고 있다. 가격은 경쟁 업체들에 비해 10∼35% 가량 싸다. 취약한 브랜드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미국 텔레비전에 한국어 광고를 내보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거두었기 때문일까. 올해에는 도요타그룹 자회사인 다이하추에 타이어를 공급하기로 계약했고, 포드로부터는 세계 5대 타이어 제조 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이 회사의 소망은 포드 자동차에 한국타이어를 끼우는 것. 회사 관계자는 “내년 하반기쯤에는 그것도 가능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부채 비율 654%인 회사가 우량 기업인 까닭

이수화학의 부채 비율은 200%에 가깝다. 그렇지만 증시에서는 외국인 투자가들이 매우 선호하는 알짜 기업으로 통한다. 세제 원료로 사용하는 알킬 벤젠과 노말 파라핀을 생산하는데, 국내 시장에서는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고, 세계 시장 점유율도 2위를 차지한다. 그만큼 시장 지배력이 크다.

그런데 이 업체는 올해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났다. 유가 하락으로 원재료 가격이 떨어졌고, 지난 상반기에는 말레이시아의 쉘 사(12만t), 지난 10월에는 미국의 컨데어 사(13만t)가 폭발 사고를 일으켜 제품 가격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 97년에 7백32 달러였던 알킬 벤젠이 99년에는 9백 달러, 4백44 달러였던 노말 파라핀은 6백 달러로 오르리라 예상된다. 경쟁 기업들이 중국·인도·인도네시아에 새로 지은 공장을 가동하더라도, 가동률이 낮아 가격을 끌어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부채 비율이 높은데도 IMF 특수를 누린 기업이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한국전기초자이다. 텔레비전 브라운관과 컴퓨터 모니터용 유리 벌브를 만드는 이 회사는 지난 6월 말 현재 부채 비율이 654%이다. 그런데도 외국 증권사 분석가들은 이 회사 주식을 사라고 적극 추천한다. 이유는 한 가지. 강력한 구조 조정을 통해 기업의 내재 가치가 급격히 올라가고, 수익성도 크게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회사는 지난해 종말을 고할 뻔했다. 77일 간의 장기 파업이 끝난 뒤 IMF 사태가 닥쳤다. 부채 비율이 1,100%를 넘었고, 적자 규모가 5백98억원이나 되었다. 이것을 인수한 곳이 대우다. 가혹한 구조 조정이 뒤따랐고, 회사는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임원들의 상여금이 30% 삭감되었고, 종업원 숫자가 15% 줄었다. 근무 중 휴식 시간을 줄이는 방식으로 노동 시간을 늘렸다. 그 덕에 노동 생산성이 65% 증가했다. 신규 차입을 최대한 억제하고 차입한 돈을 갚아 나갔다. 대우그룹 해외망을 활용해 해외 판매처를 크게 늘렸고, 7월에는 자산 재평가를 실시해 9백59억원의 차액을 남겼다.

그 결과 공장이 24시간 돌아갔고, 부채 비율이 획기적으로 줄었다. 상반기 654%였던 부채 비율이 연말에는 200% 이내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내년에는 제품 가격이 10∼15%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98년을 지나면 한국전기초자는 완전한 우량 기업으로 거듭나게 된다.

구조 조정을 통해 거듭나기는 삼성중공업도 비슷하다. 96년에는 3천억원 적자, 97년에는 9백55억원 적자. 지난해 적자가 줄어든 것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상용차 사업을 분리했기 때문이다. 삼성중공업은 삼성그룹의 ‘애물단지’나 다름 없었다.
삼성그룹 ‘애물단지’ 삼성중공업의 대변신

그런 회사가 올해는 대규모 흑자를 눈앞에 두고 있다. 살인적인 구조 조정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7억5천만 달러를 받고 중장비와 지게차 사업 부문을 해외에 팔았고, 분사화 작업을 계속했다. 이미 6건이 끝났고, 내년에도 몸집 줄이기 작업이 계속될 것이다. 직원 봉급이 10% 줄었고, 인원도 대폭 감소했다. 발전 설비와 선박용 엔진에 대해서는 ‘빅딜’ 협상이 진행 중이다. 그 결과 부채 비율은 올해 말에 300% 이내로 줄어들고, 흑자 규모도 천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외부 여건도 한몫 했다. 조선 산업이 대호황을 맞은 것이다. 삼성중공업에서 조선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70%. 중장비 부분을 털어냈기 때문에 조선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고, 그만큼 조선 산업 호황으로 인한 혜택도 많이 받게 되었다. 한진중공업도 사정이 좋다. 비교적 우량한 재무 구조를 가진 이 회사는, 조선 사업 비중이 80%나 되기 때문에 대표적인 수혜 업체로 꼽힌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어쨌든 IMF 체제 덕에 우뚝 선 기업들은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빚을 얻어다 사업을 크게 벌리기보다는, 우직하게 ‘한 우물만 팠다’는 점이다. 그 덕택에 해당 분야에서 확고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고, 세계 시장을 놓고도 당당히 겨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환율 급등의 수혜를 누릴 충분한 자격을 갖춘 것이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이들 업체에서 근무하는 직원들도 덩달아 특수를 누렸을까 하는 점이다. 대답은 유감스럽게도 ‘아니올시다’이다. “실직이다 감봉이다 해서 남들이 떨고 있을 때, 안심하고 월급을 받으며 직장에 다니는 것만 해도 그게 어딘가.” 이에 대해 한 기업체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결과를 놓고 보니 특수지, IMF 사태 초기에는 우리도 죽는 줄 알았다. 아직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순익이 얼마가 남든,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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