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케인즈 꿈꾸는 경제학계 마피아들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8.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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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MIT 출신, IMF 옹호론·무용론 펴며 논쟁 치열
아시아 금융 위기로 특수를 누리는 집단이 있다. 하버드 대학과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출신 경제학자들이 바로 그들. 미국 재무부와 국제통화기금(IMF)의 핵심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두 대학 출신들이고, 이들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는 세력 역시 두 대학 출신들이다.

제도권 인사로는 로렌스 서머스 미국 재무부 부장관과 스탠리 피셔 국제통화기금 수석 부총재가 대표적이다. 서머스 부장관은 하버드 대학 역사상 최연소로 정교수가 된 인물. 미국경제학회가 2년에 한번씩 탁월한 업적을 남긴 40대 미만의 신예 경제학자에게 수여하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수상한 그는, 95년부터 미국 재무부에서 국제 금융 업무를 관장해 왔다.

스탠리 피셔를 국제통화기금 수석 부총재 자리에 앉힌 것도 서머스이다. 국제통화기금 수석 부총재는 미국 몫으로 배정된 자리. 그만큼 서머스와 피셔는 막역한 사이로, 두 사람은 수시로 전화를 걸어 미국 정부와 국제통화기금의 입장을 조율한다. 국제통화기금은 흔히 미국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라는 비판을 받는데, 이런 비판의 중심에 두 사람이 서 있다.

지난해 9월 일본의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 구상을 무력화한 것도 이들이다. 미국 정부는 아시아 문제를 일본에 떠넘기면서도, 천억 달러 규모의 아시아통화기금 창설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제도권 밖에서 국제통화기금을 비판하는 대표적 학자도 대부분 하버드 대학과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출신이다. 하버드 대학 교수인 제프리 삭스와 마틴 펠드스타인이 그렇고, 세계은행(IBRD) 수석 부총재 조셉 스티글리츠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교수 폴 크루그먼 역시 마찬가지다.

시카고 학파 “IMF 없애야 한다”

크루그먼은 지난 94년,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성장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논문 ‘아시아 기적의 신화’를 <포린 어페어스>에 발표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초기에는 국제통화기금의 정책에 동조했지만, 아시아의 위기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자 국가가 외환 유출입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노선을 수정했다.

역설적인 것은 이 방안을 받아들인 사람이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였다는 점이다. 마하티르는 구미식 ‘시장 경제 체제의 죽음’을 선언하고, 아시아 외환 위기가 서방 자본의 음모 때문에 생겼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반 서방주의자. 그런 그가 아시아적 가치를 부정하고 아시아의 경제 발전을 ‘폄하’한 크루그먼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자 크루그먼은 즉시 마하티르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편지에 정부가 외환 유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단기간에 그쳐야 하고, 획기적인 구조 조정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썼다.

물론 아시아 위기와 관련한 논쟁에 두 학교 출신만 참여한 것은 아니다. 모든 학자들이 한마디씩 거들고 있지만, 특히 독특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은 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밀튼 프리드먼이다. 86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최소의 정부가 최선의 정부’라는 토머스 제퍼슨의 신념을 간직하고 있는 자유주의 경제학계의 거목이다. 시카고 학파를 이끌고 있는 그는 아예 국제통화기금을 없애라고 주장한다.

아시아 위기 원인에 대해서도 다른 목소리

최종 대부자 기능을 수행하는 국제통화기금이 없다면 채권 금융기관과 채무국의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적정 환율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지난 가을 홍콩 정부가 주가를 떠받치고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나선 것을 맹렬히 비판했다.

프리드먼을 비롯한 시카고 학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국제통화기금의 존재 자체는 인정한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이들이 벌이고 있는 논쟁 주제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아시아 위기의 원인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통화기금의 처방이 적절했느냐 하는 것이다.

먼저 아시아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는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하나는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체제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마구잡이로 단기 외채를 빌려다 과잉 투자한 것이 아시아 위기의 본질이라는 시각이다. 아시아 위기는 1차적으로 기업과 금융기관의 유동성 위기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경쟁력 저하 문제라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과 폴 크루그먼이 이런 시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외환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고금리·긴축 재정 정책이 필수이고, 나중에 빚을 갚을 수 있는 건실한 경제 구조를 갖추기 위해 획기적이고도 신속한 기업·금융 구조 조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시각은 아시아 위기의 본질이 단기 금융 자본의 급격한 유출입 때문에 생겼고, 아시아의 경제 기초 여건은 기본적으로 건실하다고 보는 것이다. 제프리 삭스·마틴 펠드스타인·조셉 스티글리츠가 이런 견해를 취한다. 이들은 아시아 위기의 본질이 유동성 부족이라고 보기 때문에, 국제통화기금이 해야 할 역할도 유동성 공급에 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의 대표적인 인물은 제프리 삭스. 하버드 대학 국제개발연구소 소장인 그는, 국제통화기금을 가장 혹독하게 비판한다. 아시아 외환 위기의 핵심 원인이 국제 금융 자본의 경쟁적인 탈출에 있다고 보는 그는, 국제통화기금이 해야 할 역할은 채권자와 채무자 간에 중재를 서서 부채 상환 일정과 상환액을 재조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채권자들은 부채의 일부를 탕감해 주고, 일부는 출자 전환해서 개도국이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틴 펠드스타인 “IMF의 구조 개혁 강요는 월권”

채권자들에게 책임을 물리는 것은, 고금리를 노리고 개도국에 경쟁적으로 돈을 빌려주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 위기를 초래한 과오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외환 위기를 겪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남미 국가들이 빚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예로 들면서, 획기적인 부채 탕감이 없으면 국제 사회는 ‘부익부·빈익빈 사회’가 될 것이고,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 시장 경제 체제는 정당성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는 또 인위적인 고금리 정책을 통해 환율을 안정시키려는 정책은, 심각한 불황만 야기할 뿐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국제적인 대출에서 생기는 공포를 없애기 위해 국제적인 공탁 보험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마틴 펠드스타인도 제프리 삭스와 의견이 비슷하다. 그는 국제통화기금이 각국에 구조 개혁을 강요하는 것은 설립 취지를 벗어나는 것이라며, 국제통화기금은 부족한 유동성을 공급하고, 채권자·채무자 간의 협상을 주선하고, 위기에 빠진 나라의 외환·금융 시장을 감시하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셉 스티글리츠도 초기에는 국제통화기금을 혹독하게 비판했지만, 국제통화기금의 자매 기관인 세계은행 수석부총재이기 때문에 점차 발언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비판 요지는 분명하다.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적 기초가 튼튼하다는 것, 따라서 80년대 남미 국가들에 적용했던 고금리·긴축 재정 정책은 아시아 국가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조 개혁의 필요성까지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악의 경기 상황에서 이를 성급하게 추진하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고 강조한다. 그도 아시아 위기의 핵심 원인이 불안정한 국제 금융 시장에 있다고 보고, 단기 금융 자본의 급격한 유출입을 규제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스탠리 피셔의 외로운 항변 “잘한다 IMF”

국제통화기금에 대한 비판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스탠리 피셔의 입장은 흔들림이 없다.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 것이 사실이지만, 외국인 투자 자금을 끌어들이고 외환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금리·긴축 재정 정책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그는 제프리 삭스나 조셉 스티글리츠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그같은 정책이 효과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증거로 그는 1년 만에 한국·태국의 환율과 금리가 하향 안정세로 돌아섰고, 인도네시아도 뒤늦게 구조 개혁 작업을 추진하면서 상황이 개선되고 있다는 점을 든다. 그는 또 남미에 적용했던 똑같은 정책을 집행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각국 정부와 추가 협상을 통해 재정 적자 규모와 금리를 계속 조정해 왔다며 부정하고 있다.

‘제2의 케인스’를 꿈꾸는 이들의 치열한 공방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외환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고금리·긴축 재정 정책이 필요하고, 심각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저금리·재정 확대 정책이 필요하다.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는 없는 노릇. 목표를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정책 수단이 달라지고, 입장도 판이해진다. 이창용 교수(서울대·경제학)는 “국내 학계와 언론이 국제통화기금을 비판하는 목소리만 경청하는 것은 잘못이다. 양자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평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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