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눈치 보며 주판알 퉁긴다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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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들 ‘개혁의 손익’ 계산하느라 노심초사
김대중 차기 대통령과 4대 그룹 회장들이 만난 뒤 재계의 표정이 달라지고 있다. 물론 겉으로는 차기 대통령측이 요구하는 재벌 개혁안이 그동안 재계 내부에서도 거론되어 왔던 것들이라는 점을 들어 크게 걱정할 것 없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그룹 내부에서는 재벌 개혁안이 몰고올 손익 계산을 따지느라 분주하다.

이번 회동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곳은 두말할 나위 없이 삼성이다.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그룹 차원의 이회창 후보 지원설로 곤욕을 치렀던 삼성은 차기 대통령이 4대 그룹 총수 회동 후 이건희 회장을 따로 불러 ‘불이익이 없을 것’이라고 격려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안도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삼성 구조 조정의 최대 관심사는 삼성자동차. 삼성측은 자동차에 쏠린 세간의 의혹을 해소하기라도 하듯 신형 자동차에 대한 예약 판매에 돌입했다. 그러나 자동차는 회생이냐 포기냐 하는 갈림길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 최대 변수는 기아의 운명이다. 기아를 삼성이 인수하게 되면 삼성자동차는 회생할 가능성이 높지만, 기아를 포드나 GM 등 외국 업체가 인수하게 되면 삼성은 자동차를 포기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삼성이 자동차 판매를 본격화하기 직전 몰아닥친 내수 시장 한파에다, 추가 자금을 쏟아붓기도 어려운 형편이기 때문이다.

김우중 회장이 회동에 불참했지만 대우 역시 상대적으로 김대중 당선자측과의 인연을 내세우며 만족해 하는 분위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우는 현재 정권인수위원회(인수위)나 비상경제대책위원회(비대위) 주요 구성원들과 가장 깊은 친분을 과시하고 있다. 김회장은 당초 차기 대통령과 재벌 회장들이 만난 13일 오후 우크라이나에서 귀국해 이 날 열린 경기고 총동창회에서 회장에 선출될 예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럴 경우 ‘당선자 회동에 참석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니냐’ 는 지적이 제기될 것을 우려해 귀국 날짜를 일부러 다음 날로 늦췄다는 것이다.

결합재무제표 작성에 저항감 드러내

김우중 회장은 이종찬 인수위 위원장과 경기고 동기동창인데다 김용환 비대위 당선자측 대표와도 막강한 친분을 과시하고 있다. 대우그룹의 한 관계자는 “김용환 부총재가 재무부장관일 때 김회장이 김부총재의 지역구인 충남 보령에 있는 사유지를 사들여 공단을 짓는 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라고 말했다.

LG·현대는 현재 사장단 회의와 7인운영위원회 등을 열어 최종 구조 조정안을 확정하는 단계에 들어가 있다. 특히 현대는 정몽구·정몽헌 공동 회장 체제 출범이 정몽구 회장의 실질적인 ‘실각’으로 받아들여지고, 동시에 결합재무제표 작성에 따른 이 그룹의 매출액 손실 비율이 아주 구체적으로 나돌아 다소 곤혹스런 처지에 놓여 있다.

재벌들은 서로 다른 손익 계산에 분주하지만 결합재무제표 도입이라는 차기 대통령측의 요구에 대해서는 공통의 저항감을 내비치고 있다. 지난 1월15일 전경련 회장단 회의가 끝난 뒤 ‘국제 규범에 맞는 재무제표를 작성하겠다’는 회장단의 결의 내용을 놓고 논란이 빚어진 적이 있다. 결의문 내용에 결합재무제표를 명시하지 않은 것을 놓고‘그렇다면 차기 대통령측이 요구하는 재벌 개혁안을 거부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결합재무제표는 연결재무제표와 달리 총수가 일정한 지분을 소유하면서 ‘실질적 지배력’을 갖는 회사들까지 재무제표 작성 대상에 포함하기 때문에 기업의 처지에서는 더 큰 매출액 감소를 감수해야 한다. 전경련 관계자들은 그동안‘연결재무제표가 국제 관행인데 차기 대통령측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불만을 표현해 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연결재무제표가 선진국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총수와 그 친인척들이 기업을 맡고 있는 한국의 특수성에 비추어볼 때 연결재무제표로는 기업의 투명성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결합재무제표로 인해 입을 수 있는 매출액 손실과 대외 신인도 하락 등은 기업의 처지에서는 공포의 대상이다. 어떻게든 피해 가고 싶은 공통의 이해 관계가 당분간 재벌들의 ‘따로 또 같이’를 지속시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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