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경제 정책 ‘약발’ 왜 안 듣나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4.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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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요인 ‘구조적’, 단기 처방으로는 역부족…당정 정책 혼선도 한몫
사람이 심하게 앓고 나면 면역력이 생기듯이 경제도 위기를 겪고 나면 대응 능력이 생긴다. 1997년 방만한 차입 경영으로 내로라 하는 대기업들이 잇달아 쓰러지고 대외신인도가 악화하면서 외환보유고가 바닥 나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달러를 빌려 국가 부도 위기를 벗어났던 외환위기가 가까운 시일 안에 재현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재 외환보유고는 1천6백70억 달러로 세계 4위를 기록하고 있다. 삼성전자나 현대·기아 자동차처럼 국민 경제를 이끄는 대기업들은 부채 비율을 200% 이하로 떨어뜨리고 현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있다. 수출과 무역 수지는 월간·분기·연간 기록을 잇달아 갱신할 정도로 사상 최대의 호황을 이어 가고 있다. 넘쳐나는 달러로 인해 외환 당국이 환율 방어에 부심할 정도이다.

하지만 장밋빛 일색인 거시 지표와 달리 ‘경기가 위기에 처했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경제 주체들은 외환위기 못지 않은 위기감을 느낀다. 신용불량자가 4백만 명을 넘어섰고, 일자리를 찾지 못해 거리를 헤매는 20대 실업자가 35만7천명이나 된다. 전체 실업자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이다. 취업자에게도 고용 조건은 악화하고 있다. 고용 없는 성장이 이루어지고 국민 경제 전체의 실질 소득이 줄어들면서 내수는 극도로 침체해 있다. 은행 단기 상품이나 1년 미만 국·공채 형태로 떠도는 부동자금이 4백조원에 이른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시중 여유자금이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수출이 잘 되면 설비 투자를 늘리거나 임금이 올라 내수가 활성화하던 과거의 선순환 구조가 붕괴된 것이다. 박병원 재정경제부 차관보는 “기업들이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투자 마인드 상실만큼 큰 위기는 없다”라고 말했다. 투자가 위축되면 잠재성장력이 훼손되고 산업경쟁력도 떨어져 일본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과 기술 격차가 더 벌어진다. 동시에 무섭게 추격하는 중국에 추월당할 가능성이 커진다.

국내 기업들은 1970~198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에, 1990년대에는 정보 기술(IT) 산업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그 결과 중화학공업은 과잉 투자를 우려할 만큼 커졌고, 일부 업종에서는 이미 중국과의 가격경쟁력에서 뒤져 철수 채비를 하고 있다. 또 IT 거품이 꺼지면서 반도체·휴대전화·디지털 가전 종목을 제외한 IT 투자는 크게 줄어들었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것은 비단 국내 기업들에게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기업들은 ‘이제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업종을 제외하고는 국내 기업들이 한창 잘 나가는 품목의 설비마저 늘리지 않고 있다. 수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지만 내수가 뒷받침되지 않아 내수 판매분을 수출로 돌리기 때문이다. 더욱이 올해 하반기에 수출이 크게 둔해질 것으로 점쳐지면서 설비 투자 유인이 사라지고 있다.

경제가 위기로 치닫고 있으나 위기 대응 능력은 전혀 발휘되지 않고 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체득한 면역력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인체가 다른 종류의 병원균에 노출되면 다시 앓아눕듯이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와는 전혀 다른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가 눈에 띄게 회복되면서 미국·일본·유럽·중국이 잠재성장력을 넘어서는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데 한국 경제만 ‘나홀로’ 침체의 늪을 헤매고 있다.
정부는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정부는 연초부터 재정 조기집행 방침을 유지해 지난 6월 말까지 87조5천억원을 시중에 풀었다. 상반기 재정집행 실적으로는 사상 최고치다. 또 기획예산처는 올해 재정 지출을 4조5천억원까지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모두 유효 수요를 창출해 내수를 되살리겠다는 전략이다. 정부는 또 시장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건설 경기를 연착륙시키기 위해 건설업 지원책을 내놓는가 하면, 청년 1명을 고용할 때마다 장려금을 최대 7백50만원까지 지원하는 청년실업자 구제책을 발표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내수촉진책을 직접 점검하며 각 부처를 독려하고 있지만 효과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경제 정책의 ‘약발’이 서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경제 주체들이 시큰둥한 반응이다. 지금까지 발표한 촉진책으로는 내수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재계와 소비자는 경기부양책에 가까운 획기적인 대책을 기대하고 있다. 정부가 경제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정부가 하는 일이 뭐냐? 경기가 침체하면 부양책을 쓰고 경기가 과열되면 안정책을 쓰는 것 아닌가. 정부의 사태 인식이 너무 안이하다”라고 말했다.

재계는 소득세율을 낮추고 투자를 가로막는 갖가지 규제를 없애달라고 요구한다. 소득세율을 낮추면 국민의 실질 소득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어 유효수요 창출로 이어질 수 있다. 또 대기업들은 현행법상 이업종 투자가 불가능한 형편이어서 투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불평한다. ‘문어발식 경영’을 막자는 취지로 도입한 출자총액제한제도로 인해 관련 업종이 아니면 투자할 수 없다. 또 산업 자본이 금융 자본을 지배하는 것을 막다 보니 금융 계열사 투자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홍순영 연구위원은 “국내 은행이나 투자회사 인수를 외국인에게만 허용해 외국인이 국내 금융산업을 장악하다시피 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같은 재계의 요구를 귀담아 듣지 않고 있다. 대규모 경기부양책은 고려하지도 않고 있다.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사안에 대해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미시적 접근 방법을 고집하고 있다. 또 경제 불평등을 심하게 만들 소지가 있는 ‘문어발 경영’을 막고 대기업의 소유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갖가지 규제 조처를 강화하고 있다. 신용불량자를 구제하기 위한 배드뱅크 도입, 건설경기 연착륙 방안, 청년실업자 구제책, 중소기업 활성화 방안처럼 현안마다 개별 대응하면서 사회간접자본(SOC)을 확충하는 등 제한적인 내수촉진제를 시도하고 있다.

정부는 경기부양책이 한국 경제의 고질을 치유하는 근본 대책이 아니라 덮어놓고 넘어가자는 대증요법과 같다고 판단하고 있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외환위기 이후 카드 남발, 분양권 전매 허용, 특소세 면제 조처로 소비를 조장해 무리하게 성장한 결과가 지금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경제는 세계 경기가 아직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2000~2002년에 호황을 누렸다. 그 탓에 외환위기 직후 의욕적으로 진행되던 경제 개혁이 인위적으로 조성된 호황 국면에 의해 중단되거나 변질했다. 지금 겪는 위기 국면을 자초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총장은 지금이라도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장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총장은 “당장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업 투명성을 제고하고 적자생존 원칙을 지켜 가는 수밖에 없다. 실업률이 올라가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으나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한국 경제의 앞날은 밝지 않다”라고 말했다.

항생제를 과다 투여하는 처방과 같은 경기부양책은 한국 경제의 체력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그동안 한국 경제는 웬만한 부양책으로는 약효가 나타나지 않을 만큼, 위기에 처할 때마다 고단위 경기부양책을 사용했다. 정진욱 연세대 경제학 교수는 “그동안 정부는 나서야 할 때는 나서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할 때는 시장에 개입하는 실수를 반복했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경기부양책을 쓸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운찬 총장은 “정부는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한 정책을 집행해 투자 심리를 활성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라고 말했다. 경제 정책이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하려면 정부의 일사불란한 리더십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여당 내에서도 경제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혼선을 거듭하고, 조정 기능을 담당한 청와대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 부처의 한 고위 관료는 “대통령은 논란이 일고 있는 정책에 대해 부처 간에 대화와 토론을 통해 경제 정책을 만들어가라고 하지만, 수없이 쏟아지는 경제 현안에 대해 관련 부처가 일일이 이견을 조정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한 때가 많다”라고 말했다. 이헌재 경제 부총리는 “내수 촉진을 위해 추경을 편성해도 쓰겠다는 부서가 없어 11개 부처를 일일이 설득해 1조8천억원을 책정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재경부의 한 관료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어서 이러저러한 정책을 내놓고 있으나, 한국 경제가 처한 구조적 위기를 타개할 처방전을 쓸 수 없어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이 관료는 “외자 유치나 개방 조처, 지역 개발 사업마다 이익단체나 지방자치단체가 막고 나선다. 이 때문에 경제 회복을 위한 당면 과제인 고용 창출이나 투자 확대를 기대할 수 없는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라고 진단한다.

구조적 위기는 외환위기와 달리 돌발적으로 발생하지는 않지만 성장잠재력을 갉아먹으며 경제를 점점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제조업이 5년 안에 중국에 역전당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일본과 미국에 견주어 아직 뒤지고 있다. 게다가 연구 개발(R&D)과 설비 투자는 오히려 줄고 있다. 어찌 보면 외환위기보다 더 심각한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다만 외환위기처럼 극적으로 나타나지 않아 위기의 실체에 둔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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