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날 '설계' 못한 국내 생명 보험사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1.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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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흑자 기업 9곳뿐…14개 회사 적자 총액 1조원 육박

사진설명 변화의 물결 : 생명보험사들이 노트북으로 부장한 고학력 보험 설계사와 IT 인프라를 갖추지 않고서는 사실상 살아남기 힘든 시대로 접어들었다. ⓒ푸르덴셜생명 제공

'한국도 생명보험 선진국 대열 진입'. 지난해 12월 생명보험협회가 발표한 '2000년 생명보험업계 10대 뉴스' 중 첫 번째 뉴스다. 생명보험협회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1가구당 생명보험 가입률은 86.2%(평균 가입 건수 3.6건). 미국(76%)·일본(93%)과 같은 선진국 못지 않게 한국에서도 그만큼 보험이 일상화한 셈이다.

그러나 정작 생명보험사들이 거둔 성적은 이와 정반대였다. 1999년 흑자였던 생보사들의 경영 실적은 2000년 대거 적자로 바뀌었다. 지난 3월13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00년 회계 연도 3/4분기 생명보험회사 주요 결산실적'에 따르면, 지난해 4∼12월 생보사 23개 중 흑자를 낸 회사는 삼성생명·푸르덴셜생명·흥국생명 등 9개뿐이다. 교보생명 등 나머지 14개는 모두 합쳐 9천9백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적자를 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부터 금융감독원은 보험사들의 재무 건전성을 평가하는 '잣대'를 강화하고 있다. 금감원이 사용하는 기준은 지급 여력 비율. 보험 계약자 전원이 일시에 보험금을 찾는 상황이 닥칠 때 보험사들의 지불 능력을 의미하는 것인데, 현재 최저선은 100%. 금감원은 지급여력비율 기준을 6개월마다 단계적으로 높여 2004년까지 유럽연합(EU)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가입률은 선진국 수준…증시에서 크게 손해


'선진국' 수준의 가입률에도 불구하고 생보사 경영 실적이 나빠진 이유는 우선 지난해 주식 시장이 워낙 나빴기 때문이다. 국내 보험사들이 총자산 중에서 주식에 투자하는 비율은 대개 10%. 하지만 전문가들은 '냄비' 같은 한국 증시 상황을 감안할 때 생보사들의 주식 투자 비중이 너무 높다고 지적해 왔다. 그런데도 보험회사들 중에는 오히려 지난해 하반기 경기 침체기 때도 주식을 사들인 곳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믿는 도끼'였던 국·공채 수익률이 낮아지면서 보수적인 투자도 어려워졌다. 현재 국·공채를 운용해서 얻는 수익률은 6% 수준. 하지만 원금의 6∼7% 배당을 보장하는 확정형 상품 가입자에게 배당금을 내주려면 자산 운용 수익률이 적어도 8∼9%는 되어야 한다.

푸르덴셜·ING 등 외국계 보험사들이 약진하면서 보험 시장에 몰고 온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회사도 부지기수다. 예전에는 보험업을 흔히 '인지'(사람과 종이) 산업이라고 불렀다. 영업 사원과 보험 계약서만 있으면 사업을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외국계 보험사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예전에는 '아줌마 부대'를 동원해 지연·혈연을 이용해 상품을 팔았지만, 이제는 정장을 입은 '넥타이 부대'가 노트북을 들고 재테크 컨설팅을 한다. 국내 보험 영업 사원들이 고객에게 하는 첫마디가 "보험 드신 거 있습니까"였다면, 외국계의 경우는 "인생을 설계해 두셨습니까"라고 묻는다.


'아줌마 설계사' 몰아낸 '넥타이 부대'


사진설명 생명보험사의 IT 인프라를 갖춘 사무실. ⓒ한향란

IMF 이후 벌어지기 시작한 대형사와 중·소형사 간의 '빈부 격차'도 앞으로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신용 평가 시스템과 위험 관리 및 기존 고객 관리가 중시되면서 IT 투자는 생존을 위한 필요 조건이 되었다.

특히 종신 보험과 함께 보험 시장의 주류가 될 것으로 전망되는 '변액 보험'은 IT 인프라를 갖추지 못하면 판매 자체가 불가능하다. 올해 안으로 판매될 예정인 이 상품은 보험사가 거둔 투자 수익에 따라 지급받는 보험금 액수가 달라지는 일종의 '투자신탁형' 보험. 하지만 수백억원에 이르는 투자비를 감당하기 힘든 중소 보험사들은 엄두를 낼 수가 없다. 취약한 재무 구조에 수익 기반도 약하다 보니 중·소형사 대부분은 상장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삼성·교보 외 나머지 생보사들은 주식회사 상장의 기본 요건인 '3년 연속 흑자'조차 달성하지 못하는 처지다.

생보업계가 처한 위기는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적자가 나건 말건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식의 '몸집 부풀리기'에 집착했던 것이 그간 국내 생보사들의 영업 방식이었다. 보험 가입 후 13개월까지 유지된 계약 비율인 '13회차 유지율'은 현재 국내 생보사들이 70%대. 그러나 외국계 보험사들 경우는 90%가 넘는다. 금융연구원 정재욱 박사는 국내 보험사들의 영업 방식을 가리켜 "상품 판매에서 낸 적자를 투자 수익으로 메우는 식이다"라고 평했다. 뿐만 아니라 '퇴출 후보'인 현대생명·한일생명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재벌 그룹의 금고 노릇을 한 회사도 부지기수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업계 관계자들은 앞으로 보험업은 더 이상 보험사들끼리 경쟁이 아니라고 말한다. 삼성생명 홍보팀 장재원 과장은 "앞으로는 은행 등 금융기관과의 경쟁이다"라고 말했다. 세계 금융업의 추세는 금융지주회사 설립. 은행·보험·증권 서비스 등이 합쳐진 '원스톱 쇼핑몰'을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외국계 생보사들의 본사는 모두 금융 그룹이다. 국내 일부 생보사 역시 투자신탁회사 등을 설립하며 겸업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업종의 경계와 벽이 사라지는 무한 경쟁 시대가 다가온 만큼, 보험 업계 구조 조정이 일단락되면 생보사 가운데에서도 대형사 및 외국계 기업이 중·소 회사를 인수하는 식의 합종연횡이 벌어지리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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