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황태자 이재용, '얌체경영'도 세습
  • 장영희 기자 (jjang@e-sisa.co.kr)
  • 승인 2001.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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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 인터넷 기업' 지분 계열사에 팔아 '물의' 빚은 '화려한 3세'


자가용을 탈 수도 있었는데 버스편을 택했다." 3월11일 삼성전자 상무보에 선임된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씨(33)는 신입 임원 교육을 받기 위해 3월26일 오전 7시 삼성본관 앞에 대기한 버스를 타고 경기도 용인에 있는 인재개발원으로 향했다. 왼쪽 가슴에 '전자 이재용'이라고 쓴 명찰을 단 그는, 올해 임원으로 승진한 1백65명과 호흡을 함께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임원 중 하나가 아닌 매우 특별한 임원이다.




참여연대와 언론 등의 싸늘한 여론을 무시한 채 삼성전자 입성을 강행한 이재용 상무보는, 그러나 초장부터 무리수를 두었다. 삼성측이 3월27일 'e비즈니스 개편 방안'이라는 명목으로 이상무보의 인터넷 기업 지분을 정리한다고 전격 발표한 것이다. 그의 지분을 받아줄 기업은 물론 제일기획·삼성SDS·삼성SDI·삼성전기 등 삼성 계열사다. 인터넷 사업 지주 회사인 e삼성 지분 75%, 해외 인터넷 사업 지주 회사 구실을 했던 e삼성인터내셔널 지분 60%, 보안회사 시큐아이닷컴 지분 45.5% 등을 삼성 계열사들이 사들이는 것이다.


삼성의 숙적 참여연대가 이같이 중요한 소식을 놓칠 리 없다. 참여연대는 '이재용씨의 투자와 경영 실패 책임을 계열사 소액주주에게 전가하는 행위이므로 즉각 중단하라'는 성명을 냈다. 외신들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특히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렉스 칼럼을 통해 그의 지분 매각 사실을 이렇게 조롱했다. '닷컴 기업주는 사업이 부진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답은 아버지의 회사에 팔아라이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들도 부정적 의견을 쏟아냈다. 현대증권 우동제 연구원은 "특정인의 지분 인수에 그룹 계열사가 다수 동원된다는 점에 투자자들의 실망이 클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지적했다. 지배 구조 문제에 한층 민감한 외국계 증권사들은 더욱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다. 엥도수에즈 W.I카증권은 e삼성 지분 매입이 과거 거래처럼 정당화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비판했다. 과거 거래란, 제일기획이 1999년 삼성자동차 부채 처리 과정에서 삼성생명 주식을 주당 70만원에 인수한 것을 뜻한다.


이상무보의 지분을 받아들인 삼성 계열사들은 주식 시장에서 일제히 난타를 당했다. 특히 제일기획과 삼성SDI는 투자자들의 혹독한 응징에 직면했다. 3월27일부터 30일까지 주가가 무려 20∼30%나 떨어진 것이다.


고가 매입 의혹도 제기돼


고가 매입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삼성측은 외부 회계법인이 세법에서 가장 보수적인 평가 기준을 적용해 매각 금액을 산출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또 총매각 대금이 초기 투자금 5백5억원을 약간 넘는 5백11억원이어서 이상무보가 시세 차익을 그리 챙기지 못했다는 점도 내세우고 있다. 한마디로 인터넷 기업은 미래의 성장 잠재력 등을 평가해 통상 액면가의 몇 배나 높은 가격으로 파는 것이 관행인데 미래 가치를 감안하지 않고 원금 수준에서 팔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증권가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메릴린치증권은 현재 e삼성인터내셔널과 같은 벤처 캐피털 회사들은 순자산 가치에서 30∼40% 할인되어 팔리고 있다며, 현재 기업 가치가 초기 투자 금액에 훨씬 못미치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설사 삼성측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왜 삼성 계열사들이 그의 지분을 인수해야 하는지 충분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증권 업계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견해다. 물론 삼성측이 나름으로 설명을 시도하고 있기는 하다. '삼성물산·삼성SDS·유니텔 등 그룹내 관계사와 e삼성 등 인터넷 회사 10여개 간의 영역 충돌을 해소하고 인터넷 각사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e비즈니스 사업을 개편하기로 했다. (재용씨가) 주주로 남아 있을 경우 제기될 수 있는 부당 내부 거래 의혹도 해소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삼성측은 지난해 5월 e삼성이 출범하는 과정에서 인터넷 사업을 벌여온 기존 계열사들로부터 극심한 반발을 샀음에도 그런 사실이 없다며 일축해 왔다. e삼성은 또 이재용씨가 주도하는 비즈니스일 뿐 삼성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양측 간에 갈등이 있었던 사실과 e삼성 등이 삼성의 인터넷 기업임을 시인함으로써 그동안 부인해온 두 가지 비밀을 스스로 노출한 셈이다.


사실 이재용씨의 인터넷 사업 뒤에 삼성 구조조정본부가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삼성은 1998년 7월 삼성SDS 당시 남궁석 사장을 위원장으로 한 인터넷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런데 1999년 말 실무 추진팀이 구조조정본부 기획팀에서 재무팀으로 돌연 변경되더니 기본 전략 자체도 '삼성 계열사 e비즈니스화'에서 'CY(이재용) 중심의 온라인 삼성 구축'으로 수정되었다. 따지고 보면 지난해 8월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갖 난관을 뚫고 벌여온 인터넷 사업을 이상무보는 왜 접으려는 것일까. 재계나 증권업계 관계자들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현재 이상무보의 인터넷 사업은 크레듀와 시큐아이닷컴 외에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누카는 이미 서비스를 중단했다. 인터넷 기업에 불어닥친 전반적인 한파를 감안하더라도 뚜렷한 수익 모델을 갖춘 사업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한 벤처 기업 사장의 견해이다.


"닷컴 경영 실패 논란 잠재우려는 속셈"


삼성 사정에 밝은 한 재계 관계자는 "CY의 인터넷 사업 정리는 이미 지난해 말부터 플랜에 들어 있었다. 이학수 본부장 등 삼성 구조조정본부 핵심 관계자들은 그동안 CY가 경영에 참여하기 전에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e비즈니스를 통해 경영 능력을 입증해 보이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그러나 e비즈니스를 통한 화려한 입성 작전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고 판단한 지금 인터넷 사업을 경영 실패라는 논란 없이 한시바삐 떼어내는 일이 절체 절명의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삼성은 3월11일 이재용씨가 상무보로 선임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보도 자료에서, 그가 한국의 산업 및 삼성의 사업 발전과 직결된 분야, 특히 컴퓨터 산업에 관심을 기울여 왔음을 유독 강조했다(68쪽 상자 기사 참조).


이미 3년 전부터 후계자 만들기에 시동을 건 삼성이 올해 3월11일을 입성의 'D데이'로 잡은 것은 지난해 11월께. 이회장이 림프절 암 수술을 받은 후 건강 상태가 양호하다고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 재용씨의 경영 참여 시점을 늦출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또 삼성측은 올해만 잘 버티면 내년부터는 대선 정국으로 줄달음칠 것이어서 삼성 경영권 세습 문제가 자연스럽게 관심권에서 벗어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따라서 올해 어떤 일이 있어도 정면 돌파하되, 혹여 잡음이 커지면 법정 싸움으로 끌고간다는 것이 삼성측의 복안이다.


사실상 경영권 세습에 돌입한 삼성에서는 서서히 '이재용 인맥'이 구축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우선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나 김인주 부사장은 이건희 회장의 최측근 인사들로 이재용씨 연착륙을 위한 정지 작업을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윤종용 부회장 등 삼성의 간판급 CEO들이 그의 조련사가 될 것도 틀림없다. 최근에는 진대제 사장의 역할이 새롭게 거론되고 있다. 진사장은 전자산업 전반과 e비즈니스에 대한 정보를 주면서 전자업계 실력자들을 직접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영기 삼성투신운용 사장과 신응환 구조조정본부 이사도 국제 금융과 인터넷 사업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있다.


이재용 상무보는 한국 재계의 신성이다. 경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영권이 세습되고 있다는 사실은 끊임없는 논란을 부를 수밖에 없지만, 재계에서는 삼성 후계자인 그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견해가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경영 실패의 부담을 계열사에 떠넘김으로써 이런 최소한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재계의 새별치고는 너무나 낡은 수법을 구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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