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업자 뺨치는 제일은행 경영진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1.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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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리 대출·직원 쥐어짜기 극심…'벌처 펀드' 속성 드러내


대규모 부실로 신음하던 제일은행이 외국 자본 '뉴브리지 컨소시엄'에 인수된 때는 1999년 말이다. 그로부터 1년6개월이 지나 제일은행은 '우량아'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BIS 비율은 시중 은행 가운데 가장 높은 14.04%. 올 1/4분기 순이익 9백82억원으로 수익성은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화려하게 재기한 제일은행은 최근 극심한 노사 갈등을 겪으며 그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어두운 모습을 속속 드러내고 있다. 전산 부문을 매각하고 외부 업체에 정보기술(IT) 부문을 맡기는 토털 아웃소싱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경영진의 발표가 노사 갈등의 발단이 되었다. 이에 맞서 지난 6월7일 노조가 천막 시위를 벌이며 실력 행사에 들어가자 호리에 행장은 아웃소싱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노조는 경영진 퇴진 운동으로 이어갈 기세다. 노조측 주장에 따르면, 뉴브리지에 인수된 뒤 제일은행 직원들은 '박탈감과 좌절감'이 뒤엉킨 시간을 견뎌야 했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제일은행 내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직원들의 가장 큰 불만은 단기 투자 수익만을 노리는 '벌처 펀드'인 뉴브리지로부터 장기적인 비전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외국계 자본이 국내 은행을 인수한 것을 두고 은행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리라는 기대도 컸지만, 지금까지 제일은행 경영진이 보여준 영업 행태는 오히려 후진국형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우선 제일은행의 효자 상품 중 하나인 퀵 캐시 론 판매는 '은행의 탈을 쓴 고리대금업'이라는 비판을 강하게 받고 있다. 소득증명서 등 서류 몇 장만으로 돈을 대출받는 캐시 론은 연 15∼18% 고금리 대출 상품.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하는 서민에게 돈을 빌려준다는 장점은 있지만 이자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호리에 행장의 경력을 감안한다면 제일은행이 캐시 론 같은 상품을 판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1997∼1998년에 호리에 행장이 부행장으로 몸 담았던 '어소시에이츠 퍼스트 캐피털'은 신용 상태가 나쁜 개인에게 고금리로 돈을 빌려주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원금과 이자를 회수해온 금융업체이다.


"모기지 못 팔면 모가지"




모기지 론은 캐시 론과 함께 제일은행의 주력 상품. '집'이라는 확실한 담보물을 확보해 대출금을 떼일 염려가 없으므로 은행으로서는 가장 안전한 금융 상품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은행 경영진은 모기지 판매에 혈안이 되었다는 것이 직원들의 지적이다. 제일은행 내에서는 '모기지를 못 팔면 모가지다'라는 농담이 나돌 정도이다.


올해 초 은행측이 도입한 개인별 평가 시스템은 제일은행 직원들을 치열한 생존 경쟁의 장으로 내몰았다. 지난해까지는 본점에서 내려온 상품 판매 할당량을 모든 직원이 힘을 합쳐 채웠지만 이제는 직원 개개인이 목표액을 제시받고 실적을 평가받는다.


어제의 동료였던 직원과의 경쟁도 경쟁이지만, 제일은행의 모기지 상품은 다른 은행 상품보다 대출 조건이 불리한 경우가 많아 직원들이 고객을 확보하기 어렵게 만든다. 시중 금리에 맞추어 대출 금리를 정하는 다른 은행과 달리 제일은행은 개인 신용도에 따라 금리를 차별화한다. 안정된 직장에 신용이 좋은 이들은 다른 은행과 같은 조건으로 돈을 빌릴 수 있지만 자영업자들은 확실한 담보가 있어도 높은 이자를 물어야 한다.


외국인 임원, 주먹구구식 불투명 경영




금리 경쟁력이 취약한 상품을 팔려다 보니 직원들의 몸부림도 필사적이다. 인지대(천만원 대출에 12만원)를 자기 돈으로 대신 내주는 서비스는 기본이다. 친인척을 통해 은행 대출을 받으려는 이를 소개받아 주말에 서울에서 대전·대구를 왕복하는 경우도 있다. 캐시 론의 경우 돈을 갚을 능력이 의문시되는 고객에게 마구 대출해 주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그래서 캐시 론 실적이 높은 직원들 중에는 1,2년 뒤를 불안해 하는 이도 많다. 본점에서 고객 상담을 맡고 있다는 한 직원은 "지금은 연체율이 낮아 그나마 버티지만 1년 뒤는 정말 걱정이 된다"라고 말했다.


제일은행은 올 하반기 금융 상품을 파는 소매점형 은행으로 철저하게 탈바꿈하기 위해 조직 개편을 단행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조직 개편안이 현실화하면 은행 직원들은 무한 경쟁 시대에 돌입한다. 이와 함께 제일은행은 연봉제로 전환하는 것을 추진 중이다. 실적이 저조하면 곧 '자연 도태'되고 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일은행의 변신 드라마에서 한국인들은 '조연'이나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는다. 제일은행의 한국인 임원은 지난해 영입된 최고정보책임자(CIO) 현재명 상무를 제외하고는 전부 영업 담당이다. 이들의 역할은 영업 목표를 달성하라고 독촉하는 '악역'. 정작 상품을 개발하고 영업 목표를 세우는 권한은 모두 외국인 임원들이 갖고 있다. 이들 외국인의 문제는 한국 실정을 모른 채 주먹구구 식으로 영업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기지 론의 경우 지점 규모와 직원 수를 기준으로 지점별 목표액을 할당하다 보니 주위에 주택가가 없는 영업점은 큰 애로를 겪고 있다.




모기지·퀵 캐시 론으로 '떼돈'
(2001년 1/4분기 제일은행 경영 실적·단위 : 억원)






























































2001년 12월 말 2001년 3월 말
가계 대출금 55,634 55,566
할부 채권 매입 32,139 28,127
모기지론(주택 담보 대출) 1,884 4,927
퀵 캐시 론(고금리 급전 대출) 16 397
일반 자금 대출 및 기타 16,287 16,465
신용카드 채권 5,308 5,650
기업 자금 대출금 84,364 86,204
대기업 36,832 35,081
중소기업 28,670 28,902
기타 18,862 22,221
총 대출금 139,998 141,770

자료 : 제일은행


호리에 행장을 중심으로 한 최고 경영진과 컨설팅 사가 지난해 3월부터 비밀스럽게 추진해 온 컨설팅 작업은 은행 경영진과 직원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 중 하나다. 제일은행의 구조 조정을 맡고 있는 다국적 컨설팅 사 베인은 '컨설팅 업계의 KGB'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비밀스러우면서도 고객사의 내부 문제에 깊숙이 개입해 '두뇌'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일은행 직원들은 기안 하나를 올려도 베인측 컨설턴트를 거쳐야 하며, 베인이 필요로 하는 자료가 있으면 즉시 만들어 제출하는 '비서' 신세로 전락했다. 현 경영진이 100억원이 넘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컨설팅 비용을 '경영 기밀'이라는 이유로 비밀에 부치는 등 투명하지 못한 경영을 하고 있는 것도 직원들의 불신을 사고 있다.


전산 부문 매각 및 아웃소싱 계획은 직원들의 불신에 '기름'을 끼얹는 발표였다. 지난해 9월 뉴브리지측이 정보기술 부문에 해마다 천억원을 투자해 제일은행을 선진 은행으로 키우겠다고 발표한 것과 정반대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노조측은 뉴브리지가 아웃소싱을 통해 전산 투자 비용을 아끼는 동시에 회사를 팔기 좋은 모양새로 만들려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다고 판단한다.


뉴브리지에 인수된 이후 제일은행은 수익성 좋은 은행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그 비결은 '외국 자본의 힘'이라기보다 정부가 제공한 '풋백 옵션'(부실 자산이 발생하면 되사주는 조건) 덕분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기업 육성과 금융산업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단기 수익을 추구하는 '벌처 펀드'의 은행 경영은 낙제점이다. IMF 이후 구세주처럼 받아들여져 온 외국 자본. 하지만 이제 외국 자본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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