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 몰린 '경제 경찰' 공정위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1.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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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개혁, 언론·재계·야당 '총공세' 초래


지난 4월2일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은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혹독한 '성인식'을 치르고 있다. 최근 들어 공정위는 언론·재계·야당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 요즘 공정위 직원들에게서는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줄곧 재벌 개혁의 선봉장으로 활약해 온 위풍당당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궁지에 몰리다 : 최근 들어 공정위는 언론·재계·야당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 오른쪽은 공정위 창립 20주년 기념 행사 모습이고, 왼쪽은 '국세청과 공정위의 언론사 조사 중지'를 촉구하는 한나라당 관계자들.


'공정위 때리기'에 가장 열심인 것은 언론. 지난 2월 공정위가 신문사와 그 계열사 간의 부당내부거래 행위를 조사하면서 경품 남발과 무가지 살포를 제한하는 '신문 고시'를 부활하려고 하자 이 제도의 피해자 격인 조·중·동(〈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은 아예 '공정위 저격수'로 나섰다. '신문 고시=언론 탄압'이라고 주장하는 세 신문은 지금까지 공정위의 도덕성에 흠집을 낼 만한 보도를 내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나라당이 제기한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의 임기 문제(아래 상자 기사 참조)를 가장 끈질기게 물고늘어지는 것도 조·중·동이다.


지난 7월3일 서울고등법원이 공정위와 삼성SDS 간의 송사에서 공정위에 패소 판결을 내린 것을 확대 보도한 신문 역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였다. 이 소송의 발단은 1999년 SDS가 이재용씨 등 이건희 회장 자녀와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같은 삼성 임원에게 신주인수권부 사채를 저가로 발행하는 '특혜'를 준 데서 시작되었다. 이를 특수관계인 부당 지원 행위라고 본 공정위가 SDS에 과징금 1백58억원을 부과하자 SDS는 즉각 소송으로 맞대응했다. 서울 고등법원 재판부의 판결에 따르면, 이재용씨 등이 SDS 신주인수권부 사채를 낮은 가격으로 얻어 이익을 얻기는 했어도 이것과 공정거래법 위반 여부는 별개 문제라는 것이다.


공정위 관계자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2심에서 졌다는 사실보다 언론의 보도 행태다.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어 '최후의 승자'가 가려지지 않았는데도 〈동아일보〉는 1면 중앙에 '158억 과징금 공정위 패소'라고 큼지막하게 제목을 붙인 기사를 내보냈다. 〈조선일보〉는 이번 패소로 공정위가 설립 20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면서, 공정위가 언론사에 부과한 '무리한 과징금'도 법정에서 논란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 관계자는 "진행 중인 송사를 마치 결론이 난 것처럼 보도해 버리면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라고 털어놓았다.


재계도 만만치 않은 도전 세력이다. 올해 들어 공정위와 재계는 '출자총액 제한 제도'와 '30대 기업집단 제도' 같은 재벌 규제 정책을 놓고 계속 갈등을 빚어왔다. 재벌 규제 정책은, 기업의 발목을 붙잡는 구시대적인 제도라는 것이 재계 입장. 하지만 공정위는 재벌 기업의 지배 구조가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규제만 푼다면 과거와 같은 '문어발식' 경영이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반박한다. 공정위가 30대 재벌 기업에 부과하는 부당내부거래 과징금 액수가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이러한 '반재벌 정책'에 힘을 싣고 있다. 1998년 1천3백60억원이었던 과징금 액수는 지난해에는 2천2백33억원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꿈틀'도 하지 않았을 재계가 이제는 법적으로 정면 대응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현재 공정위는 100여 건이 넘는 크고 작은 소송에 시달리고 있다.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을 향한 야당의 공세 역시 갈수록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7월 3일 한나라당이 김대중 대통령을 상대로 법원에 낸 '공정거래위원장 임명 처분 효력 정지신청'은 기각되었지만, 한나라당은 '이남기 죽이기'를 멈추지 않을 기세다. 이를 통해 한나라당이 노리는 것은 두 가지로 분석된다. 안정남 국세청장과 함께 언론 개혁의 '첨병' 역할을 하는 이위원장에게 정치 공세를 퍼부음으로써, 검찰·국정원·국세청·공정위 등 호남 출신이 총지휘를 맡고 있는 사정 기관이 내년 대선에 동원되는 것을 미리 차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공정위와 대립하는 재계를 향해 한나라당이 우호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직원 간에 손발 안 맞아 공격 빌미 제공


하지만 공정위가 이렇게 사면초가 상황에 몰린 것은 공정위 스스로가 자충수를 둔 탓도 크다는 지적이다. 공정위 고위 간부들은 언론사 부당내부거래 조사 등이 모두 '법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설명하지만, 정부 내부에서조차 공정위가 너무 지나쳤다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재경부·기획예산처 등 다른 부처 관계자들 중에는 공정위가 독선적이고 융통성 없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지난 6월 정부의 한 고위 인사는 이남기 위원장과 마주친 자리에서 "너무 곧이곧대로만 하려고 들지 말라. 공정거래법만으로 재벌을 전부 통제할 수는 없다"라고 충고했다는 후문이다.


일부에서는 이위원장이 대통령을 의식한 나머지 지나치게 신문사와 기업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언론사 내부거래 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공정위는 상급자와 실무자 간에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 언론으로 하여금 공격할 빌미를 주기도 했다.


이처럼 정치색에서 자유롭지 못한 만큼 공정위의 미래 역시 내년 대선 결과에 따라 판가름 날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당의 한 정책 전문가는 "공정위는 대기업들의 카르텔 형성이나 담합 행위를 규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업 내부 거래는 시장 경쟁을 제한했다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한 공정위가 다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상법이나 세법 차원에서 규제해야 할 사항이다"라고 말했다. 국세청과 더불어 현정권의 개혁 선봉으로 활약한 공정위. 역설적으로 이러한 역할이 지금 공정위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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