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IT 산업에 볼모 잡힌 세계 경제
  • 런던·김용기 편집위원 ()
  • 승인 2001.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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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급력, '아르헨티나 위기'보다 강력…
'금리 마술사' 그린스펀도 맥 못춰


반도체냐, 그린스펀이냐? IT(정보기술)산업의 침체로 대표되는 부진한 미국 경기를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연속적인 금리 인하가 되돌릴 수 있을지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IT 산업의 힘이 그린스펀을 앞서고 있다. 7월18일 연방 금리를 인하하겠다는 그린스펀 의장의 암시는, 전날 대표적인 IT 기업인 인텔이 실적 저하 사실을 발표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된 미국 IT 산업에 대한 우울한 분위기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현재의 모든 경제 위기는 미국으로 통한다. 위기의 시작도 해결도 궁극적으로는 미국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한숨 돌린 아르헨티나의 국가 부도 위기 또한 그 원인은 미국 달러화의 이상 강세와 국제통화기금(IMF)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태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자국 통화인 페소를 달러에 고정시켰는데, 지난해 말 이후 달러화의 이상 강세로 인해 역내 무역 비중이 높은 아르헨티나 상품의 수출 경쟁력이 떨어졌다. 또한 국제통화기금의 자금 지원에 회의적인 부시 행정부의 자세는, 문제가 생길 경우 국제통화기금 등 국제 금융기관이 아르헨티나를 지원하기 어려우리라는 부정적 시각을 시장에 유포해 아르헨티나 국채 발행을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국 경제나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를 따지자면 미국 IT산업의 침체는 아르헨티나 부도 위기보다 훨씬 강력하다.


지난해 이후 한국 경제는 미국 IT산업의 동향에 따라 웃고 울었다. 지난해 9월 한국 주식 시장을 강타한 외국인의 '팔자' 공세와 주가 추락은 당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현대그룹 구조 조정 문제와 맞물리면서 한국 경제에 심각한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올 4월17일 예상을 웃돈 인텔의 1/4분기 실적 발표는 정반대 효과를 가져 왔다. 미국 나스닥 시장이 8.12% 상승으로 화답하자 한국을 비롯한 각 나라 주식 시장에서도 랠리가 잇따랐다. 하지만 D램 가격이 추락하고 인텔의 2/4분기 실적이 저조하자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의 회복 전망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연속적인 금리 인하가 먹혀들지 않는 까닭




미국 IT산업의 부침은 우리나라 수출의 증감으로 곧바로 연결된다. 지난해 테크놀로지 붐 덕분에 한국 IT산업 주력인 반도체와 컴퓨터는 40%에 달하는 기록적 수출 증가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 기간에 세계 IT산업은 PC·핸드폰·인터넷 장비 등 물량이 달렸던 부분에 지나치게 서둘러 집중적으로 투자한 탓에 올 들어 공급 과잉 상태로 접어들었다.


게다가 자동차·항공운송업에서 자주 나타나는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한 가격 경쟁까지 벌어졌다. 자금 사정이 허락하는 한 버티면서 시장 점유율을 높여 가다가 가격이 회복되면 대박을 터뜨리자는 이 전략은 가격 폭락을 초래했다. 2000년 1월 8.93 달러 하던 64메가D램 가격은 2001년 7월에 0.92 달러로 수직 하락했다. 그 결과 올 2/4분기 우리나라의 반도체 수출 금액은 전년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린스펀이 그동안 여러 차례 연방 금리를 인하한 것도 IT산업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반 년 사이에 여섯 차례에 걸쳐 금리가 2.75%나 인하되었다. 이토록 급속한 금리 하락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사상 기록적인 일로 평가될 정도이다. 하지만 금리 인하는 기대한 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경향이 더욱 분명해지고 대중이 이 점을 인식하게 된다면 미국 경기는 미국 언론과 전문가들이 입에 담기조차 꺼려하는 'R'(Recession, 경기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린스펀의 정책 수단(연방 금리 인하)이 무기력하다는 것이 드러날 때 향후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소비와 투자에 대한 모든 의욕이 급격히 떨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경우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은 아마도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것이다. 반도체 등 IT 품목 이외에도 자동차 등 주력 품목의 수출 부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이렇듯 숨가쁘게 악화해 가는 경제 상황에서 불거져 나온 일부 정치권과 언론의 경기 부양 반대, 구조 조정 주장은 매우 우려할 만하다.


그린스펀의 연속적인 금리 인하가 별반 효과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은행 간 금리가 내린다고 해서 기업이나 개인이 싼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연방 금리 인하로 대표되는 통화 정책은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실물 경제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데, 그것이 작동되지 않고 있다.


첫 번째 경로는, 시장 금리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시장 금리가 낮아지면 소비와 투자가 촉발된다. 하지만 단기 시장 금리는 연방 금리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기업이나 가계의 자금 조달은 채권 이율과 연관되어 있고 이것은 현재의 단기 금리 변화보다는 미래 금리와 인플레이션에 대한 시장의 전망에 의해 형성된다.


두 번째 경로는, 환율이다. 통화량이 늘어나면 이론적으로는 달러가 약해지고 이에 따라 미국 상품의 수출이 늘어나야 한다.


세 번째 경로는 금융자산, 특히 주가 상승이다. 금리 인하가 주가를 끌어올려 개인 투자자들은 주가 상승으로 인한 가치를 소비하게 되고, 기업은 주식 시장에서 자본 조달이 가능해짐에 따라 금융 비용 부담 없이 투자를 하게 된다.


미국 금융 그룹 JP 모건 체이스의 분석에 의하면, 통화 정책이 이렇게 성공을 거두려면 2.5% 금리 인하는 1년 안에 주가 22% 상승, 3년짜리 채권 금리 0.75% 하락, 달러화 5% 약화를 이끌어 냈어야만 한다. 하지만 지난해 말 대비 미국 S&P 500 지수는 오히려 10% 하락했고, 무역 규모를 가중한 달러의 가치는 7% 상승했으며, 채권 금리와 모기지(주택할부금융) 금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한마디로 세 경로가 모두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금리 정책 과감해서 효과 반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린스펀의 통화 정책이 무용하다고 할 수는 없다. 만약 금리를 인하하지 않았더라면 기업이나 소비자 심리는 더욱 위축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간의 금리 인하 덕분에 적어도 미국 주택 시장은 활성화하고 있다. 통화 정책의 효과가 줄어든 이유는 역설적으로 정책 실행이 과감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변화하는 경기 기대감에 빠르게 대응함으로써 금리 인하 효과가 당장은 적을지 모르지만 추가적 경기 하락 정도나 금리 인하로 인해 물가가 상승할 가능성을 순화했다는 시각이다.


현재 세계 경제는 1970년 이래 다섯 번째 경기 후퇴를 경험하고 있다. 가전제품과 컴퓨터계의 강자인 필립스는 2002년 이전에 IT산업 경기가 회복되기 어렵다는 전망을 내놓았고, 미국의 장치산업 공급자 SEMI는 올해 35% 가량 판매량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유럽의 장치산업 라이벌 ASML 또한 내년 하반기 이전에는 회복이 어렵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어두운 분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올해의 부진은 지난해의 열기와 대조되어 너무 확대 해석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세계 경제는 1976년 이래 최대치인 4.8% 성장을 기록했다. SEMI의 경우도 지난해 무려 80% 이상 판매량이 증가했기 때문에 올해 35% 판매량 하락에도 불구하고 사상 두 번째로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게 된다. 지난 7월19일 발표된 PC업계의 강자 델과 유럽 핸드폰 업계의 선두주자 노키아의 예상을 웃도는 실적도 IT산업이 조속히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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