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자 범람, 2002년은 '깡통 차는 해'
  • 이문환·신호철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1.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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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회사, 신용불량자 100만명 대량 생산…
"내년에 개인 파산 폭발"
서울 관악구에 사는 최 아무개씨(27)는 법 없이는 살아도 '신용' 없이는 살기 어렵다. 매달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을 제외하면 직장 생활 1년차인 그의 한 달 수입은 100만원 남짓. 그러나 그가 지난 10월4일에 결제한 신용 카드 대금은 4백30만원. 옷값과 유흥비로 쓴 카드 대금을 현금 서비스를 받아 결제하면서 올해 초 100만원대이던 액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백화점 카드와 열흘 뒤가 결제일인 또 다른 신용 카드 이용분까지 합하면 최씨의 카드 빚은 5백만원이 넘는다. 이대로 계속 빚이 쌓인다면 최씨는 머지 않아 '신용 불량'의 나락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대한민국 20∼50대 성인 남녀 11명 중 1명은 신용불량자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6월까지 신용불량자는 모두 2백53만2천명. 1997년 말(43만명)과 비교하면 무려 6배 가까이 늘어났다. 일단 금융기관에 신용 상태가 좋지 않다는 전과가 남으면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잠재적 파산자'로 간주되어 카드 거래가 중지된다. 대출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주거래 은행으로부터 기존 대출금을 회수당하게 된다. 취업하려고 해도 보증을 필요로 하는 직장은 들어가기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핸드폰 같은 물건을 할부로 구입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6개월 만에 '카드 신용불량자' 20만명 늘어


이처럼 정상적인 사회 생활이 곤란해지는데도 신용불량자가 급증한 것은 1997년 말∼1998년 외환 위기 시절의 경제 불황 탓도 크지만, 주범은 신용 카드다. 금융감독원이 이훈평 의원(민주당·관악 갑)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카드업 전문 7개 사가 지난 6월까지 '양산'한 불량 회원은 1백2만명. 6개월 전과 비교해 20만명이 늘어난 숫자로 올해 새로 등록된 신용불량자 중 81%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불량 회원은 소득 수준이 낮은 젊은층에서부터 한때 우량 고객이었던 공무원과 대기업 직장인까지 나이·직장·소득 수준이 다양하다. LG카드의 한 관계자는 "공무원이나 대기업 직원은 연체율이 낮을 것으로 보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카드 발급이 까다롭기로 이름난 동양카드(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도 지난해 말보다 불량자가 26% 증가해 고소득층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가장 크게 기여한 장본인은 카드 업계의 선두 주자 자리를 놓고 3파전을 벌이고 있는 국민카드·삼성카드·LG카드이다. 지난해 이들 3개 사에서 나온 신용불량자는 78만명으로 전체 카드 관련 불량자의 76%를 차지한다. 특히 LG카드와 삼성카드가 1위 자리를 놓고 박빙의 대결을 펼치고 있는 시장에 최근 다이너스 카드를 인수한 현대캐피탈이 뛰어들어 카드 업계의 과당 경쟁은 극에 달할 전망이다.


이처럼 치열한 경쟁의 상징은 길거리에 간이 테이블을 설치해 놓고 카드 모집인들이 회원을 유치하는 모습이다. 어지간한 직장인이라면 카드 3∼4장씩은 갖고 있는 시대이다 보니 사은품도 휴대폰·운동기구 같은 좀더 고가 물품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영화 할인·무료 보험 가입·복권 추첨·마일리지 서비스 등 기존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에 카드사들이 지출하는 비용은 수백억원대. LG카드의 경우 놀이공원 무료 입장 혜택을 주는 것에 5백억원 정도를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카드의 한 관계자는 내년 상반기까지는 이러한 경쟁이 계속될 것 같다고 내다보았다.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조장한다고 비난받는 대학생 카드 발급도 계속될 전망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카드 발급을 하지 않는 것보다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대책을 세우고 있다. 대학생들은 미래의 잠재 고객이다. 시장을 선점하려면 어쩔 수 없다"라고 털어놓았다.


역설적인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침체에 빠지기 시작한 한국 경제의 '침몰'을 막고 있는 일등 공신이 신용 카드라는 점이다. 카드 보급이 늘면서 소비가 활성화하고 탈세의 온상이었던 자영업자들의 거래 내역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수출이 줄고 기업들이 설비 투자를 꺼리는 상황에서 올해 2/4분기 경제 성장에 민간 소비가 기여한 비율은 54.3%. 지난해 정부가 7조원에 이르는 세금을 더 징수한 데에도 신용 카드가 한몫을 했다.


하지만 미국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지는 등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악재가 계속된다면 최악의 경우 '파산 대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지난 9월25일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올해 2/4분기에 개인이 금융기관으로부터 진 빚은 12조8천억원으로 지난 1/4분기와 비교해 무려 네 배 가까이 불어났다. 지난 6월 2.44%였던 국민·한빛 등 8개 시중 은행의 가계 대출 연체율이 8월에 3.07%로 무려 0.63% 포인트나 높아진 것도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고금리 소액 대출 상품을 파는 일부 신용금고에서는 첫 달 이자 연체율이 30%를 돌파했다. 신용불량자 단체인 '신용사회 구현 시민연대' 석승억 위원장은 "개인 파산은 경기 후행 지수다. 1997년 말 IMF 사태가 터진 뒤 1998년 겨울에 파산자가 많아졌다. 지난해 증시가 좋을 때 주식에 투자하려고 돈을 빌렸다가 모두 까먹고서 현금 서비스로 연명하는 이들이 많다. 내년쯤 소비자 파산이 폭발적으로 늘 것이다"라고 말했다.




올해 상반기에만 1조원 이익을 내며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는 카드사들이 신용불량자 예방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은행 거래 실적이나 세금 납부 등 긍정적인 정보가 전혀 공유되지 않는 한국 금융 시장의 특성상 신용도를 정확히 평가해 카드를 발급하기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형편이다. 그래서 카드업체들은 연체 기록이 없는 '깨끗한' 고객이라면 직장인이든 대학생이든 일단 받아들이고 보는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다.


업계 전체 매출액의 70%가 현금 서비스와 카드론에 집중해 있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카드 시장이 이처럼 기형적인 형태를 보이는 것은 카드를 3∼4개 갖고 '카드 돌리기'를 하며 신용 카드 대금을 무는 고객이 많다는 증거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실제로 빚이 지나치게 늘어나 자신의 명의로는 더 이상 카드를 만들 수 없게 된 이가 남의 명의를 도용해 카드를 만든 뒤 빚을 갚는 데 쓰는 사건도 속속 터지고 있다. 백화점 명품관에서 고가 물건을 구입한 다음 중고품 시장에 되파는 '카드깡'식 수법으로 돈을 마련하는 사례도 눈에 띄고 있다. 그래서 일부 명품 브랜드 업체들은 '큰 가방 한 개+작은 가방 한 개' 식으로 고객 한 사람에게 판매하는 제품 수량에 한도를 정해 두었다고 한다.


은행·카드사로부터 돈을 빌리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은 신용금고나 일본계 고금리 대출업체 같은 연리 40∼100%의 '살인적인' 이율로 급전을 빌려주는 곳이다. 예전보다 숫자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신문에 '카드 당일 발급' '연체 대납' 따위 광고를 내는 사금융 업자를 찾아 돈을 구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이 과정에서 사채업자와 채무자 간의 분쟁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 4월2일∼9월9일 금융감독원 비제도금융조사팀에 신고된 사금융업체 피해 신고는 2천4백80건. 고객에게 수수료를 지나치게 많이 청구하거나 대출 중개 수수료만 챙긴 뒤 잠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부 사채업자는 악덕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떼이기도 한다. 사금융업자 출신이기도 한 인터넷 대출 중개 사이트 '에그머니나'(www.eggmoneyna.co.kr) 운영자 송상래씨는 "카드 사용 대금을 대신 내 주었는데 돈 빌린 이가 분실 신고를 해 버리면 대납한 사람만 큰 손해를 본다"라고 주장했다.


신용불량자·개인 파산자 구제 대책 없어


지난 10년 동안에 걸친 장기 호황이 끝나고 저성장·고물가의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릴 조짐이 보이는 미국에서도 개인 파산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8월27일자 〈뉴스 위크〉는 올해 미국인 1백40만명이 파산을 신청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미국 소비자들의 채무가 급증해 지금까지 경기 후퇴를 막아온 '최후의 보루'인 소비 심리가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1년에 12만명이 법원에 개인 파산을 신청하는 일본에서는 채무자가 채권자를 피해 잠적하는 것을 돕는 '야반 도주업' 전문회사 수백 개가 경쟁하고 있다.


한국에서 신용 불량과 개인 파산은 1997년 말 외환 위기 이후에나 익숙해진 개념이다. 게다가 사회보장제도와 파산자 구제 장치를 잘 정비해 놓은 미국과 달리 한국은 신용불량자와 개인 파산자가 급증해도 뾰족한 대책이 없다. 그래서 김기웅 교수(한국항공대·경영학)는 "지금 자기가 진 빚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고 수입과 지출을 구조화해서 부채를 갚을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해야 한다"라고 지적하면서, 앞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개인 파산 시대'에 대비해 사회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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