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이재용 '끝나지 않는 악몽'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1.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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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삼성 지원' 삼성 내부 문건 공개돼 또 구설 올라…
참여연대, 재공격 시동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는, 어쩌면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이 그리울지도 모른다. 지난 3월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참여연대의 거센 반발을 뚫고 상무보로 선임되어 그룹 후계자 자리에 연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뒤 그는 온갖 구설에 시달렸다. e삼성 등 자기가 갖고 있던 인터넷 회사 지분을 삼성 계열사에 처분하면서 그는 부실 기업을 아버지 회사에 떠넘겼다는 비난을 받았다. 국세청으로부터는 2년 전 삼성SDS 신주인수권부 사채를 저가로 매입했다는 혐의를 받아 수백억원대 증여세를 추징당했다.




11월19일 텔레비전 뉴스 채널 YTN이 이른바 '삼성 내부 문건'을 특종 보도하면서 이재용씨는 또 한번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YTN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 조사를 앞두고 삼성은 이씨가 대주주였던 e삼성 등 인터넷 기업들에 인력과 사무실을 부당하게 지원한 사실을 조직적으로 은폐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삼성 내부 문건이다. 이 문건의 작성자는 비록 밝혀지지 않았지만 내용에 삼성 고위 관계자들이 등장하고 있어, 이것만으로도 지난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이씨의 인터넷 사업과 삼성 구조조정본부(구조본) 사이의 관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지난해 구조본이 인터넷 사업팀을 조직해 이상무보의 인터넷 사업 지원에 발벗고 나섰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하지만 당시 삼성측은 이씨의 사업을 가리켜 e비즈니스에 관심이 많은 그가 개인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일 뿐이라며 의미를 애써 축소하려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구조본은 이씨를 인터넷 사업에서 '성공한 CEO'로 만든 뒤 상성그룹의 당당한 후계자로 부각하려는 복안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지난해 4대 그룹 부당내부거래 조사를 벌이면서 공정위는 이재용씨의 인터넷 기업과 삼성그룹 간의 '부적절한 관계'를 캐내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두 달간 조사한 끝에 공정위는 삼성그룹에 과징금을 99억7천만원 물렸지만 이러한 관계를 파헤치는 데에는 끝내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 YTN 보도에 따르면, 삼성은 공정위 조사를 피하려고 치밀한 시나리오를 짜서 대응했다. 삼성전자 자금 담당 김 아무개 부장의 개인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이상무보와 나중에 협의해 e삼성을 설립한 것처럼 가장하려고 사업 관련 서류를 조작하거나 폐기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시나리오에 따르면, e삼성은 설립되기 직전인 3월17∼25일에 에버랜드와 개인 등으로부터 투자 제안을 받고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확정했다. 문건에는 이에 대한 조처 사항으로 사업계획서가 나와 있는데, 이는 삼성이 사업계획서를 조작했거나 새로 만들어낸 것으로 추측되는 대목이다. 이밖에 삼성 문건은 재무 자료·품의서·계약 서류·일반 서류·싱글(삼성그룹 보안 시스템)을 점검해 시나리오에 맞지 않는 문서를 폐기하도록 했다.


지난해 5월 삼성중공업 건물 17층에 입주한 e삼성은 3개월 뒤 공정위가 조사에 착수하기 전까지 중공업측에 임차료를 내지 않고 있었는데, 이는 중공업이 e삼성을 부당 지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문건에는 김 아무개 명의로 삼성중공업과 임대차 계약을 맺은 뒤 계약서를 비치해 두라고 지시한 내용이 들어 있다.


공정위 조사 앞두고 대처 방안 지시




삼성 구조본·계열사 직원들은 e삼성이 정식으로 설립되기 몇 달 전부터 이 회사에 파견되어 일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계열사 부당 지원 행위에 속한다. 이 문건에 따르면, 삼성은 이들이 e삼성이 설립된 날 발령받은 것처럼 인사 자료를 수정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또한 e삼성 직원들에게 공정위 조사원들을 대하는 요령도 알려주었다. 구조본 인력들에게는 갖고 있던 구조본 명함을 폐기하고 조직도·관련 서류 등을 없애도록 했다. 수검 준비팀만 공정위 조사원을 상대하고 계열사 파견 인력은 먼저 퇴근하도록 했다.


11월19일 오전에 YTN의 보도가 나오자마자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은 구조본과 참여연대였다. 당일 오전에는 구조본의 최고위층이 '이례적으로' YTN에 출동해 보도 중지를 요청했지만 실패했다는 후문도 있다. 같은 날 오전 11시30분, 소액주주운동을 벌이며 줄곧 삼성과 대립해 온 참여연대는 태평로 삼성본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참여연대측 주장에 따르면, 삼성의 공정위 조사 방해는 이번까지 벌써 세 번째. 이튿날 참여연대는 서울지방검찰청에 구조본 관계자들을 공무집행방해죄로 고소했다.


삼성측은 조직적인 은폐 작업이란 터무니없는 음모론이라는 입장이다. e삼성에 사무실을 무상 지원했다고 알려진 삼성중공업측은 e삼성과 임대료 액수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다가 실제 계약이 좀 늦게 체결되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선 입주 후 협상'을 했다는 것이다. 구조본의 한 관계자는 '삼성 문건'은 공정위 조사를 받기 전 e삼성이 자체적으로 결성한 대책반에서 나온 것 같다고 해명하면서, 이 문건은 구조본이 사용하는 양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성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정위 조사 한계 있어 '찻잔 속 태풍' 그칠 수도


하지만 구조본측은 문건의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는 않아 의혹의 불씨를 남기고 있다. 게다가 구조본과 e삼성을 분리해 놓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구조본 고위층 대부분이 e삼성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구조본 재무팀 신응환 상무는 지난해 삼성 계열사에서 인력을 차출해 인터넷 사업팀을 만들고서 이재용 상무보를 보좌했던 인물이다. 이 사업팀을 최종 관장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김인주 재무팀 부사장도 마찬가지다. e삼성 투자자이기도 했던 이본부장은 e삼성과 관련이 깊은 인터넷 업체 '가치네트'의 감사위원회 위원 중 한 사람이다. 김인주 부사장은 e삼성 이사를 지낸 적이 있다. 최근까지도 e삼성 관련사들은 중요한 경영 문제에 대해서는 구조본에 보고하며 관계를 지속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련사의 한 관계자는 "올해 초 이상무보가 인터넷 기업 지분을 판다는 소문이 돌자 구조본측으로부터 사업 계획 등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지시받았다. 그 뒤에도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보고를 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번에 불거진 삼성 문건 파동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일단 이 문건을 제보한 이는 공정위에 자료를 건네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공정위 분위기는 삼성 문건을 입수하더라도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 회의하는 쪽이다. 그 문건에서 삼성의 새로운 위법 사실을 적발할 정도로 명백한 증거를 포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압수수색권 같은 강제적인 수사권이 없는 공정위로서는 삼성의 협조 없이는 조사를 제대로 하기도 어려운 처지다. 하지만 YTN측은 제보자로부터 입수한 총 24쪽짜리 문건에서 4쪽밖에 공개하지 않았다. 미공개된 부분에는 자금 흐름 등 좀더 민감한 정보가 담겨 있다고 한다. 현재 참여연대는 YTN에 삼성 문건을 완전히 공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재용 상무보는 삼성의 실질적인 지배주주이다. 연초에 아버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으로부터 삼성 각 임원들에 대해 종합 평가를 내릴 정도로 세세하게 파악하라는 지시를 받은 그는 올해 연말 삼성그룹 임원 인사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미 그룹의 '대권'을 향해 성큼 나아가고 있는 이재용씨. 하지만 그가 앞으로 겪어야 할 시련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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