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흥은행, 영욕의 세월 105년
  • 신호철 (eco@sisapress.com)
  • 승인 200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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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금융사 증언하는 최초의 은행…도산 위기→구조 조정→합병 ‘되풀이’하기도


"당나귀를 맡길 테니 돈 좀 빌려주시오.” 서울 광교에 문을 연 한성은행(현 조흥은행)에 첫 대출 손님이 찾아왔다. 대구에서 사업을 한다는 이 사람은 담보로 잡힐 만한 귀중품이 없다며 자신이 타고 온 당나귀를 내놓겠다고 사정했다. 한성은행은 고심 끝에 대출해 주었는데, 이후 직원들은 그 당나귀를 돌보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1956년부터 조흥은행에서 근무했던 이재천씨(현 한국관광대학 학장)가 전하는 일화다. 이 ‘당나귀 대출’ 이야기는 2월19일 창립 105주년을 맞아 발행된 조흥은행 사사에 실려 있다. 한국 은행 역사상 최초 담보물이 당나귀인 셈이다.


한성은행을 모태로 삼는 조흥은행은 한국에서 가장 역사 깊은 은행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5년마다 사사를 편찬하고 1997년부터는 서울 광화문에 금융박물관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조흥은행 금융박물관 강헌식 차장은 “조흥은행의 역사를 보면 한국 금융의 역사를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토요일 반휴 근무제 논란이 그 한 사례다. 지금 정부와 노동계가 주5일 근무제를 놓고 논란을 벌이지만, 80년 전에는 토요일 오후에 쉬는 문제가 논쟁거리였다. 1918년 한성은행은 토요일 오후에는 근무하지 않는 토요반휴제를 추진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은행도 한성은행의 정책을 따를 참이었다. 하지만 삼정물산·동아연초 등 기업들은 경제 후진국에서 선진국의 제도를 따라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다. 이렇게 재계의 논리에 밀려 토요반휴제는 무산되었다. 토요일 오후를 쉬는 것은 1929년에야 제도화했다.


금융 위기를 맞아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이후 은행 사이에 흡수 합병이 이어지는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조흥은행의 과거사에도 등장한다. 1927년 봄 일본에서 초유의 금융 대공황이 발생하자 국내 은행들은 4월22일 일제히 모라토리엄(지불 유예)을 선언했다. 당시 한성은행 직원은 ‘민심이 극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1927년 4월25일 다시 은행 문을 열었을 때 은행에 돈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금고에 있던 돈을 꺼내 지폐 다발을 산처럼 쌓아두고 고객을 안심시켰다’고 기록했다.


1927년 공적자금 받아 폐업 위기 넘겨




도산 위기에 처한 한성은행은 1927년 5월 공적자금을 받아 사태를 수습했다. 일본 정부는 이사진을 개편하고 자본금을 줄이는 등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이후 수십 개에 이르던 시중 은행들은 합병·매수를 거듭해 광복 직전에는 조흥은행과 상업은행 단 2개만 남았다. ‘조흥’은 군소 은행과 합병을 거듭하던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이 1943년 최종 합병해 붙인 이름이다. 광복 이후 조흥은행은 한국 경제의 성장과 함께 번창을 거듭했다. 지금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있는 조흥은행 본점은 1963년에 세워진 것이다. 1966년에는 총수신고 1백60억원으로 업계 1위가 되었다.


조흥은행의 역사는 한국 금융의 어두운 면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82년 장영자 사기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조흥은행은 4백10억원을 손해 보고 은행장과 전무이사·지점장 들이 사표를 썼다. 1997년 2월 한보 사태는 조흥은행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우찬목 은행장은 정태수 회장에게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거창하게 준비되던 조흥은행 100주년 기념 행사는 모두 취소되고 은행장 없는 기념식만 간단히 열렸다.




지난 2월19일 조흥은행은 서울 힐튼호텔에서 105주년 기념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에는 하객 1천5백명이 참석했다. 이용호 게이트와 관련해 특검에 소환되었던 위성복 은행장은 이 날 무사히 기념사를 낭독해 5년 전 악몽이 되풀이되지는 않았다.
현재 자산 3위 은행인 조흥은행의 주가는 지난 1월 액면가 5천원 선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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