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골프 브랜드, 멀고 먼 ‘온 그린’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2.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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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위’ 국내 시장, 외국 상표에 빼앗겨…‘최경주 효과’에 한가닥 기대
지난 5월6일 PGA 컴팩클래식에서 우승한 최경주 선수(오른쪽 사진)는 운동화 뒤축에 태극기 문양을 새겨 애국심을 과시했다. 그가 내로라 하는 외국인 골퍼 사이에서 PGA 유일의 토종 한국 골퍼로 고군 분투하는 모습은 한국 골프 산업의 현실과 닮아 있다.



최선수가 우승한 이후 모자와 옷에 선명히 새겨진 슈페리어(Superior)라는 이름이 유명세를 탔다. 슈페리어는 1978년 출시된 한국 최초의 골프복 브랜드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슈페리어는 골프복 시장에서 수위를 지키고 있었지만 1990년대 이후 외국 라이선스 브랜드에 밀렸다. 2000년에 울시, 2001년에는 닥스골프에 처졌다. 이처럼 지금 국내 골프용품 업체들은 외국 브랜드에 포위되어 외롭게 싸우고 있다.


현재 국내 골프 의류 시장은 슈페리어를 빼고는 대부분 외국에서 이름을 빌려온 라이선스 브랜드가 장악하고 있다. 슈페리어의 1년 매출이 5백억원 정도인데 비해 잭니클라우스·아놀드파머 등은 7백억원대를 올린다.





최경주 우승에 모처럼 웃은 ‘슈페리어’


광고업계에서는 최선수가 우승함으로써 슈페리어가 수천억원에 가까운 인지도 상승 효과를 얻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것이 매출 증가로 이어져 외국 브랜드를 꺾을 수 있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박세리 선수가 LPGA에서 우승 한 이후에도 그가 입었던 아스트라의 매출이 크게 높아지지 않은 선례가 있다.


그런데도 슈페리어가 1996년부터 최경주를 후원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김귀열 회장은 “회사 이윤을 칼같이 따져 선수를 후원하는 것은 아니다. 국내 골프 육성과 같은 복합적인 효과가 있다”라고 말했다. 당장 실적이 없더라도 일단 장기적으로 마케팅을 펼칠 조건을 얻었다는 분석이다. 슈페리어측은 올해 매출이 130% 정도 증가할 것으로 본다.


패션업계 관계자들은 라이선스 브랜드가 알고 보면 실속이 없다고 평가한다. 라이선스 업체에서 일했던 한 직원은 “외국 본사는 대략적인 사업 방향만 내려줄 뿐 실제 디자인은 모두 한국 디자이너가 맡는다”라고 설명했다. 재료도 국산 브랜드와 큰 차이가 없다. 라이선스 브랜드는 로열티로 매출액의 5% 가량을 외국 본사에 지불해야 한다.


슈페리어말고도 최경주 덕을 본 기업이 또 있다. 최선수는 대회 내내 테일러메이드 사가 만든 클럽(골프채)을 썼다. 그는 지난 1월4일 테일러메이드와 3년 계약을 맺고 이 회사 용품을 쓰고 있다. 테일러메이드는 1997년 굴지의 스포츠 기업 아디다스가 살로몬 사와 테일러메이드 사를 합병해 만든 회사다. 아디다스의 골프용품 전문 자회사로 볼 수 있다. 최경주 선수는 모자 옆과 뒤에 테일러메이드 마크를 달았다. 캐디 백에는 테일러메이드 글자를 새겼고, 운동화는 아디다스를 신었다.


테일러메이드는 최경주 선수 외에도 박도규·강수연 등 30여 명을 후원하고 있다. 테일러메이드는 원래 최경주 선수의 메인 스폰서가 되려 했는데 슈페리어에 선수를 뺏겼다. 최선수는 슈페리어와의 의리 때문에 메인 스폰서를 바꾸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골프계에서는 최경주 개인만 놓고 보면 슈페리어보다 테일러메이드의 후원을 받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평한다. 아디다스의 마케팅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의 프로골프협회(PGA)는 여성프로골프협회(LPGA)보다 상금 규모가 크고 선수층도 두텁다. LPGA와 LPGA와의 비중 차이는 남자 축구와 여자 축구의 그것만큼 크다. 하지만 국내에서 최경주 선수의 우승은 박세리가 우승한 것에 비해 다소 바람이 약한 편이다.


외국 업체가 국내 시장을 휩쓰는 현상은 골프 클럽 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 클럽 시장 규모는 4천억∼7천억 원(불법 유통 포함)으로 추산된다. 이 중 외국산이 80∼90%를 차지한다.
한국 골프 클럽 시장은 미국·일본 다음으로 세계 3위에 이른다. 테일러메이드 박범석 한국지사장은 “미국 본사도 한국 시장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2001년이 일본 시장 개척의 해였다면 올해는 한국 시장 개척의 해다”라고 말했다.


테일러메이드의 매출액은 지난해 3백억원이었다. 박범석 사장은 “올해 목표를 4백억원으로 잡았는데, 우승을 계기로 5백억원으로 높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최선수가 썼던 300 단조 아이언은 지난 한 주 동안 평소의 세 배 이상 팔렸다.


국산 골프 클럽 회사로는 반도·데이비드 등이 있다. 올해 국산 업체 상황은 매우 나쁘다. 4월27일 국내 골프 클럽 회사 랭스필드가 도산했다. 랭스필드는 여자 골퍼 펄 신을 후원했고, 1999년 6월 김종필 자민련 명예 총재가 즐겨 쓴다며 자랑했던 국산 골프 클럽의 대명사였다.


외국 업체가 국내 골프용품 시장을 장악하는 이유는 일단은 기술이 앞서 있기 때문이다. 특히 헤드 부분을 제조하는 데 국내 업체의 기술력이 부족하다. 라이선스 골프복 사례에서 보듯 국산 제품에 대한 편견도 작용한다. 강남의 한 골프용품 판매상은 “골프라는 스포츠 자체가 타인의 눈을 의식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국산용품을 이용하면 왕따당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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