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회사와 은행은 적이다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2.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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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 지난해 파이낸싱 이익 3천억원…산업·영역 허무는 퓨전 기술·경영 시대
몇년 전만 해도 현대자동차와 국민은행, LG카드와 SK텔레콤, 코닥과 삼성전자가 경쟁자가 되리라고 내다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들 업체는 경쟁은커녕 서로 협력하는 동지였다. 은행 할부를 이용하면 자동차를 더 많이 팔 수 있었고, 핸드폰 단말기를 신용 카드로 사게 함으로써 양쪽 다 매출을 늘릴 수 있었다. 코닥 역시 카메라가 많이 팔려야 필름 판매도 늘기 때문에 카메라 업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파트너십에 큰 변화가 일고 있다. 어제의 동지였던 이들은 오늘 적으로 돌변해 싸우고 있다.


자동차 회사와 은행의 경쟁은 할부 금융을 비롯한 자동차 파이낸싱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GM·BMW를 비롯한 자동차 회사들은 동종 업체들만 경쟁자로 여기지 않는다. 1998년 이후 매년 1.5%씩밖에 성장하지 못하는 자동차 시장에서는 혈전을 치러도 서로 나눌 수 있는 이익이 크지 않다. 대신 매년 10% 이상씩 가파르게 성장하는 자동차 파이낸싱 분야가 자동차 회사들의 매력적인 사냥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은행·보험사 ‘대혈전’ 임박





GM은 이미 그룹 전체 매출 가운데 11%를 자동차 할부 금융과 보험 등이 연관된 자동차 파이낸싱 분야에서 거두고 있다. BMW그룹의 경우에는 차량 부문의 경상 이익이 2.2%밖에 늘지 않은 데 비해, 파이낸싱 분야에서는 11.1%나 늘었다. BMW가 지난해 파이낸싱 분야에서만 거둔 경상이익은 3천억원 이상이다. 이 회사는 우리나라 최대 은행인 국민은행이 지난해 거둔 순이익의 절반 가량을 자동차 관련 금융 상품으로만 번 것이다. 은행 처지에서는 ‘BMW 파이낸셜 서비스’와 같은 자동차 그룹의 할부금융회사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은행에는 자동차 회사에 뺏긴 이익을 만회할 수 있는 새로운 먹잇감이 있다. 국내에 방카슈랑스가 도입되는 내년 8월부터는 은행도 보험 판매에 뛰어들 수 있다. 은행이 보험 상품을 직접 개발하지 않고 기존 보험사 비즈니스를 대행해도 수수료를 챙길 수 있다.


은행이 보험 상품을 판매할 경우 가격 경쟁에서 보험사보다 유리하다. 보통 보험 상품 값의 15~20%는 보험사 영업망 구축 비용이다. 그러나 은행이 창구에서 보험을 팔면 이 비용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생활설계사를 거느린 보험사보다 더 경쟁력 있는 상품을 내놓을 수 있다. 업계에서는 은행이 보험을 판매하면 생명 보험 상품은 7.5%, 손해 보험 상품은 14% 가량 싸질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래서 보험사들은 은행을 파트너로 잡거나 한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다양한 전략들을 모색하고 있다. 상호 지분을 확보하거나 금융 지주 회사라는 큰 울타리를 만들어 한 식구가 되려 하고 있다. ING생명 노구미 차장은 “ING생명이 일찌감치 국민은행의 지분을 4%나 확보해 3대 주주가 되고, 24개 국민은행 지점에 보험 창구를 만들어 놓은 것은 방카슈랑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라고 말했다.


신용 카드와 휴대폰의 ‘전쟁터’는 신용 결제 시장이다. 지금까지는 휴대폰을 이용한 소액 결제 서비스만 소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어 신용 카드가 압승을 거두고 있다. 하지만 휴대폰 무선 결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되는 올 연말이나 내년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SK텔레콤과 같은 이동통신사들은 휴대폰 결제 서비스를 이미 시범 실시하며, 신용 결제 시장을 노리고 있다.


영국 통신 시장 조사 기관인 오붐에 따르면, 세계 무선 결제 시장은 연평균 47.5% 가량 성장하고 있다. 특히 2005년에는 무선 결제 거래 액수가 2조2천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이런 추세라면 국내 무선 결제 시장도 2004년쯤 8조원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 정도 금액은 몇백조 원에 이르는 신용 카드 시장에서 ‘새 발의 피’이다. 하지만 방심하기에는 이르다. 핸드폰을 이용한 무선 결제가 마그네틱 카드보다 편하고 안전해서 소비자들의 선택이 핸드폰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회사 건물 내 식당과 문구점 등에서 카드나 현금 대신 휴대폰으로 결제하고 있다는 SK텔레콤 허재영 과장은 “핸드폰만 있으면 지갑이 필요 없는데, 누가 지갑 따로 핸드폰 따로 들고 다니길 원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래서 신용카드사들은 핸드폰으로 카드를 결제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이동통신사와 손잡으려 하고 있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당장은 이동통신사와의 업무 제휴가 도움이 되기는커녕 번거롭기만 하지만, 핸드폰 결제가 언제 우리 목을 죌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부터 협력 관계를 다져가고 있다”라고 털어놓았다.


네슬레, 스타벅스 우습게 봤다가 큰코다쳐





이처럼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돌변하고, 눈에 띄지 않았던 기업이 새로운 경쟁자로 떠오르는 까닭은 ‘퓨전 기술’과 ‘퓨전 경영’이 적극 도입되기 때문이다. 점점 더 편하고 좋은 것을 원하는 고객의 욕구에 맞추어 여러 기능을 혼합한 다기능 제품, 토탈 솔루션을 지향하는 복합 서비스 등이 등장하면서 산업·영역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시점에서 기업이 우선 갖추어야 할 태도는 ‘터널 시야’에서 벗어나 ‘레이더 스크린’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터널에서는 앞과 뒤만 볼 수 있지만 레이더 스크린으로는 사방을 모두 볼 수 있듯,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 남대일 연구원은 “시장을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경쟁자만 의식하면 언제 어느 때 덜미를 잡혀 도태될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경쟁자를 하찮게 생각했다가 큰코다친 사례들은 적지 않다. 네슬레·제너럴푸즈와 같은 커피 제조업체들은 스타벅스가 처음 생길 때만 해도 눈 한번 깜박하지 않았다. 브라질 국민 한 사람이 1년에 마시는 커피(4.5kg)의 가격이 스타벅스 커피 한 잔 값(2~4 달러)밖에 안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네슬레나 제너럴푸즈가 1년 내내 커피를 팔 동안 스타벅스는 몇 잔만 팔면 그만큼의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영업 실적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뒤에야 스타벅스의 존재를 의식했지만, 때는 늦었다.


반대로 코닥은 남보다 일찍 ‘레이더 스크린’을 갖춘 덕에 변하는 시장에 적응할 수 있었다. 회사 수익의 90% 이상을 필름으로 벌었던 코닥 사 처지에서 필름이 필요 없는 디지털 카메라 시대의 도래는 위기였다. 코닥은 과거 사업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거는 대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데 주력했다. 디지털 이미징 기술을 적극 개발해 카메라 회사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그 결과 코닥은 디지털 카메라 부문 세계 3위의 업체로 거듭나게 되었고, 필름 소비가 줄어도 생존 위협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경쟁자를 일찌감치 감지하고 준비하는 자세야말로 영역이 허물어지는 퓨전 경영 시대의 생존 전략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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