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게릴라가 쪽박 두려워하랴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2.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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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펀드매니저의 세계/월 평균 수익 10%…“9·11 테러 때 수없이 망했다”
7월11일 오후 2시49분,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던 양웅기씨(가명·29)는 망설였다. 화면에는 복잡한 표와 숫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1분 뒤면 거래가 중지된다. ‘풋95 옵션을 지금 환매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양씨는 팔기로 했다. 2시50분 장은 마감되었고 10분 뒤 마감 동시 호가 결과가 나왔다. 그는 팔지 않고 그냥 가지고 있었으면 1천8백만원을 벌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간적인 판단에 1천8백만원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돈이었으면 과감히 버틸 수도 있었겠지만, 다른 사람 돈이어서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오늘 하루 천만원 수익을 올렸다.”





양웅기씨는 사설 펀드매니저이다. 사설 펀드매니저란 국가기관의 허가를 얻지 않고 독립적으로 펀드매니저 영업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다. 게릴라 펀드매니저인 셈이다. 서울 강남 일대에 이런 사설 펀드들이 늘어나고 있다. 불법이기 때문에 좀처럼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다. 숨겨진 언더그라운드 ‘선수’들의 세계. 사설 펀드매니저의 24시를 따라가 보았다.



양씨의 사무실은 서울 강남 청담동 자택 서재다. 모니터 앞에 앉아 인터넷 매매를 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증권거래소가 열리는 시간이 출근 시간인 셈이다. 집 밖으로는 잘 나가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은 나를 백수로 안다.”



7월11일은 옵션 만기일(매월 둘째 목요일)이다. 만기 주에는 옵션 매도만 전문으로 하는 양씨로서는 피가 마르는 때이기도 하다. 만기일이 낀 주에는 식사도 할 수 없다. 9시 개장부터 오후 3시15분(만기일에는 오후 3시)까지 쉬지 않고 장을 주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매달 둘째 주에는 식사할 시간도 없고 식욕도 사라진다”라고 말한다.



양씨의 라이프 사이클은 한 달 주기로 반복된다. 매달 셋째 주 월요일 아침이 그의 ‘한달 장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바로 그날인 7월15일 그는 일단 ‘쩐주’(투자자)들로부터 투자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한다. 이날 입금하지 못한 투자자의 돈은 받지 않는다. 투자금 입금을 확인하면 포트폴리오 세팅에 들어간다. 이 달에는 무엇을 얼마만큼 살지 정하는 것이다. 옵션 투자자 양씨는 일반 주식 투자자처럼 개별 기업을 연구하지 않는다. 대신 옵션의 시간 가치와 시장 흐름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중순 이후 시장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음 달 초부터 만기일까지가 집중해서 일해야 할 때다”라고 말한다.



“월 평균 3천만원 이상 수익 올린다”



원래는 셋째 주 월요일이 아니라 만기일 다음날(7월 12일)이 새로운 옵션 시장이 출발하는 날이다. 하지만 양웅기씨는 이날 거래를 하지 않았다. ‘만기일 다음날은 하루 쉰다’는 원칙을 정했기 때문이다. 자체 ‘휴업’하는 날이다. 대신 그는 이날 고객을 찾아가기로 했다. 역삼동에서 벤처 기업을 꾸리는 윤수영 사장(가명·34)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사장은 양씨에게 3억원을 맡긴 고객이다. 회사 자금과 개인 자금이 섞여 있다. 양씨는 윤사장에게 지난 한 달간 거래 결과를 설명하고 수익을 배분했다. 그는 이 달에 8% 수익을 올렸다.



윤사장은 “넉 달 전부터 양씨에게 자금을 맡기고 있다. 전부터 알던 사이인 데다 설명이 조리가 있어서 믿고 돈을 넘겼다. 꼬박꼬박 수익을 내주어서 만족한다. 어쩔 때는 참 신기해 보이기도 한다. 내 동생 돈도 같이 맡겨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양씨는 “고객들은 대체로 월 3% 이익만 올려도 크게 만족한다”라고 말했다.



양씨는 현재 고객 5명으로부터 자금을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양씨 돈은 2억원). 고객은 주로 강남 일대의 고소득 전문직이다. 투자자들은 양씨와 특별한 신뢰 관계인 사람들이다. 대개 투자 이전부터 서로 안면을 텄던 사람들이다. 투자자들은 자기 계좌에 입금한 후 양씨에게 계좌 번호·아이디·비밀 번호를 알려준다. 고객 중에는 법인 고객도 있지만 일단 개인 계좌를 이용하게 한다. 법인 계좌로 거래하면 번거로운 과정이 너무 많다는 설명이다. 양씨는 옵션 투자로 평균 9∼10% 수익을 올린다고 밝혔다.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과장된 수치는 아닐 것이라고 평했다. 수익이 나면 7 대 3(투자자 대 펀드매니저) 비율로 나눈다. 양씨는 월 평균 3천만~5천만 원 수익을 올린다.






“30억 벌기 위해 박사 과정 미련없이 포기”



양씨는 명문 대학에서 금융공학을 전공한 엘리트이다. 박사 과정을 밟던 중 사설 펀드매니저가 되기로 하고 미련 없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10년 더 일한 후에 은퇴하는 것이 꿈이다. “지금은 남의 돈을 받아 투자하지만 내 돈 30억이 모이면 남의 돈을 굴리지 않겠다.”



양씨가 대학에서 금융공학을 전공한 것은 투자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는 오로지 옵션(지수 옵션) 시장 하나에만 투자한다. 지수 옵션은 만기일의 지수가 얼마가 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상품이다. 예를 들어 ‘풋95’는 주가 지수가 95선을 넘으면 대박이 나지만 95 이하로 떨어지면 쪽박을 차는 상품이다. 옵션 투자는 일반 주식 투자에 비해 수수료가 다소 비싼 편이다. 윤사장 계좌의 경우 수수료만으로 한달에 4백만원 정도 나간다.



양웅기씨가 항상 ‘마이더스의 손’인 것은 아니다. 고수익을 보장하는 만큼 위험 부담도 있다. SK증권 상품팀 배원형 과장은 “옵션은 금융공학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월 5% 정도 수익은 낼 수 있다. 하지만 장이 급격하게 출렁대는 돌발 사태에서는 일반 주식보다 더 큰 위험을 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주가가 정상 범위 안에서 움직이면 수익을 낼 수 있지만, 그 범위를 벗어나는 급락·급등 장세에서는 더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증권 관계자는 “실제 9·11 테러가 났을 때 강남 일대의 부티크(사설 펀드를 일컫는 은어)들이 수없이 망했다”라고 설명했다. 양웅기씨도 “9·11 테러가 났을 때 원금을 꽤 잃었다가 나중에 회복했다”라고 털어놓았다.



양씨는 자신을 ‘재야’로, 기관투자가들을 ‘제도권’으로 표현한다. 양씨와 같은 재야 펀드매니저들은 얼마나 있을까? 금융감독원은 이들이 점조직처럼 숨어서 활동하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사설 펀드를 운영한다고 공공연히 알려진 사람도 정작 인터뷰를 요청하면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계 헤지 펀드를 운용하는 신황식씨(가명)는 대외적으로는 ‘리서치 업무만 한다’는 식으로 둘러댄다. 김상욱씨(가명)는 한때 베스트 애널리스트로 꼽힐 정도로 명성을 날린 증권맨이다. 그는 최근 사설 펀드를 운영하지만 역시 비밀이 많다. 그는 “사설 펀드를 하려면 일단 자기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돈이 없는 매니저에게는 전주가 쉽게 돈을 맡기지 않는다”라고 귀띔했다. 강남 일대에서 활약하는 한 사설 펀드매니저는 증권 방송에 출연하고 있기도 하다.



양웅기씨는 자신의 일을 명확히 불법이라고 규정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금융감독원 박종길 조사역은 “금감원에 신고하지 않은 위임 투자는 모두 불법이다”라고 말했다. 재경부 증권제도과 안창국 사무관도 “일단 고객이 2인 이상 모이면 불특정 다수인을 통한 사모 행위로 본다”라고 말했다. 현재 증권투자신탁업법 4조는 유사 투신 행위에 대해 3천만원 이하 벌금과 5년 이하 징역에 처하게 되어 있다. 양씨는 “나는 직장인 스타일이 아니다. ‘언더’에서 ‘오버’로 나가기는 힘들 것 같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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