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후계자들 ‘야망의 계절’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2.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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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SK·제일제당·삼성 2,3세/‘수성’보다 ‘제2 제국’ 건설 노려
선대 창업주를 넘어서기 위한 재벌 2, 3세들의 ‘제2의 제국’ 건설이 구체화하고 있다. 롯데 신동빈 부회장, (주)SK 최태원 회장, 제일제당 이재현 회장 등은 그룹 키우기에 본격 나섰고, 대권 승계를 기다리며 경영 수업 중인 삼성 이재용 상무보, 현대자동차 정의선 전무도 아버지 뒤를 이을 ‘신화 창조 전략’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코리아세븐·롯데닷컴·모비도미 등 롯데 계열 3사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신동빈 부회장은 사실상 그룹 총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이런 사실을 공식 부인하지만, 롯데그룹의 한 임원은 “그룹 회계나 실적은 신격호 회장이 챙기고, 기업 합병·매수(M&A)나 해외 진출 결정에는 신동빈 부회장의 힘이 실린다”라고 털어놓았다.


신격호 회장은 올해 초 신부회장의 친정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걸림돌이 될 만한 원로급 사장들을 퇴진시키고, 롯데제과를 비롯한 주력 기업의 본인 지분을 매각하는 대신 아들의 지분을 늘려주었다.


롯데, 온·오프라인 서비스 하나로 엮는 데 주력


여기에 힘입어 신부회장은 사장단 회의에서 지금이야말로 신규 사업 진출을 적극 모색해야 하는 시기라고 자주 주장해 왔다. 그 때문인지 롯데는 올해 들어 사업을 크게 벌이기 시작했다. 미도파백화점과 국내 외식업체 1위인 TGI프라이데이를 인수하고, 그룹의 ‘두뇌’ 역할을 할 롯데경제연구소를 설립했다. 현재 동양카드와 유화 인수 작업도 추진 중이고, 세븐일레븐을 중심으로 한 금융서비스업 개시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재계에서는 롯데의 이런 행보 뒤에 아버지 신격호 회장과는 또 다른 ‘제국’을 꿈꾸는 신부회장의 전략이 숨어 있다고 본다. 한 재계 관계자는 “신부회장은 사업에 관한 질문만 나오면 으레 롯데는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사업만 할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렇다고 신격호 회장이 일으켰던 ‘옛 롯데’를 고수하겠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유통·식품·관광 등 주력 사업을 일구었다면, 신부회장은 그 주력 사업을 하나로 엮어 더 큰 그룹을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부회장은 편의점 세븐일레븐과 패스트푸드점 롯데리아에 자동화기기 네트워크를 설치해 유통과 금융을 결합하고, 인터넷 쇼핑몰인 롯데닷컴에서 물건을 사고 편의점에서 물건을 받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롯데@뱅크(가칭·준비중인 금융서비스회사)를 기반으로 해서 소매업과 금융업을 결합하고, 오프라인 제품과 온라인 서비스를 하나로 엮는 데 주력하고 있다.


신부회장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 롯데의 내수 위주 경영 방침도 자취를 감추었다. 쇼핑·제과·음료·호텔 등 주력 계열사를 통해 중국·일본·러시아·동남아에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는 것이다. 롯데제과는 중국에 대규모 껌 공장을 설립했고, 롯데백화점은 모스크바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일련의 변화 작업을 진두 지휘하기 위해 신부회장은 최근 중국 출장을 자주 나가고,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한 연구 용역을 맡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SK는 여론 의식해 합병·매수 조심조심


새 제국 건설에 분주하기는 최태원 (주)SK 회장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활발한 합병·매수로 눈길을 모은 최회장은 아버지 최종현 회장이 시작한 SK텔레콤을 발판으로 ‘첫째 가는 모바일 그룹’을 그리고 있다. 핸드폰으로 커뮤니케이션·금융 거래·쇼핑을 모두 해결하는 세상의 중심에 SK를 우뚝 세우겠다는 것이다.


올 들어 KT 지분과 한국디지털미디어센터(KDMC) 지분을 인수하고 라이코스와 두루넷 일부를 접수한 것은 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스케치에 불과하다. 지금 팍스넷과 전북은행의 카드 사업에 눈독을 들이는 것도 그 여정의 일부이다.


하지만 그 역시 아버지가 이룩한 SK의 전통 산업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최회장은 정보통신·에너지·화학·금융을 그룹 핵심 사업으로 꾸준히 강화해 갈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해 왔다. 한전 발전 자회사나 한국가스공사 민영화 등에 적극 참여한다는 방침도 가지고 있다.


(주)SK와 SK글로벌을 주축으로 한 SK의 본래 사업이 사양길로 접어들 것을 뻔히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아버지의 유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SK와 SK글로벌은 SK텔레콤의 최대 주주여서 이 두 기업의 가치가 떨어지면, SK텔레콤 경영권 또한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는 속사정이 있다.


최회장은 얼마 전 열린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무차별적인 합병·매수는 자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는 합병·매수를 통한 사업 확장을 곱게 보지 않는 여론을 의식한 발언일 뿐, 모바일 제국 건설에 필요한 합병·매수를 주저하는 것은 아니라고 재계는 보고 있다.


제일제당도 “밀가루·설탕만 파먹지 않겠다”


선대 회장을 넘어서기 위한 사업 다각화에 매진하는 데는 제일제당 이재현 회장도 예외가 아니다. 드림라인 인수로 정보 기술 사업에 진출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회장은 제일제당을 중심으로 한 식품 사업에 안주할 생각은 추호도 갖고 있지 않다. 이회장은 가끔 “우리가 설탕·조미료·밀가루만 파먹었더라면 떼부자도 가능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기존 영역에 안주하기보다는 과감한 사업 다각화로 삼성에서 분가한 제일제당을 그룹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2년 전부터 식품·바이오·유통·엔터테인먼트를 4대 핵심 사업으로 정하고 부지런히 챙겨왔다. 최근에는 스포츠 마케팅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CJ39쇼핑 소속이던 박희정 선수를 모기업 제일제당으로 옮기는 등 골프를 중심으로 스포츠 마케팅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제일제당그룹은 내년 50주년을 기념해 CJ그룹으로 이름을 바꿀 예정이다.
사실상 그룹 전면에 나서서 ‘창업주 넘기’에 도전하고 있는 세 후계자에 비하면, 삼성의 이재용 상무보는 아직 미래 사업을 구상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머지 않아 대권을 승계할 터여서 물밑에서 그룹의 새 전략 찾기에 고심하고 있는 눈치이다.


벤처 붐을 타고 우회해서 경영에 참여했던 e-삼성이 좌절하는 바람에 제2의 대안을 빨리 찾아야 하는 이상무보는 최근 디지털 기술 관련 서적과 자료를 탐독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또 삼성경제연구소·금융연구소 연구원들과 자주 만나며 새로운 사업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얼마 전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컨텐츠 비즈니스의 새 흐름과 대응전략>이라는 보고서를 낸 것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다.


차기 총수가 될 이상무보는 지금은 잘 나가고 있지만 모든 사업이 정점에 오른 삼성전자가 앞으로 10년 뒤에 뭘 먹고 살 것인가를 제시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삼성전자의 핵심 사업인 반도체·핸드폰·가전산업 모두 몇 년 뒤에 사그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습 경영 눈총 털어내야 하는 부담 커


재계에서는 이상무보가 삼성경제연구소를 동원해 컨텐츠 비즈니스에 관해 살피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 전자회사 이미지를 벗고 엔터테인먼트 컨텐츠 회사로 변신한 소니와 삼성전자의 미래를 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삼성이 이미 몇년 전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진출했다가 ‘쓴맛’을 보아서 변신하기가 쉽지 않다고 본다.


이처럼 재벌 후계자들은 선대 회장과의 차별화를 위해 사업 다각화나 새로운 비전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세습 경영에 대한 곱지 않은 시각을 극복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한몫 거든다.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을 수밖에 없다. 재벌 2, 3세들을 두루 접촉했던 한 재계 인사는 “재벌 후계자들은 아이디어맨일 뿐 전략적인 CEO 같은 면모는 없다”라고 평가했다. 아버지를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고민이 많고 아이디어도 많지만, 실제 사업으로 연결할 만한 아이템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재벌 후계자 대부분은 지난 3~4년간 IT와 e비즈니스에 섣불리 뛰어들었다가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다. 그 실패가 ‘문어발 전략’ 대신, 기존 사업에서 성장과 수익 전망이 높은 부문을 개발하고 강화하는 데 주력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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