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특구, 한국 경 제 살릴 묘약 될까
  • 장영희 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2.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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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한계 극복하려는 고육지책…서비스 산업 육성이 핵심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 송도신도시 2, 4 공구는 이미 바다가 아니었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2배에 달하는 이곳에서는 1994년부터 시작된 매립 공사가 끝나고 기반 조성 공사가 한창이었다. 바다가 뭍으로 변한 이곳은 2011년께 또다시 거대한 탈바꿈을 시도한다. 송도지식정보산업단지로 조성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두 번째의 상전벽해다.





국제 비즈니스센터로 조성될 1,3 공구가 아직 매립 중이지만, 송도 신도시는 ‘한국 속 싱가포르’가 되는 데 가장 앞서 있다. 7월 말 정부는 송도 신도시를 인근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은 영종 지역과 서북부(김포) 매립지와 함께 ‘경제특별구역’(경제특구)으로 지정했다. 동북아 물류 중심 항만으로 개발하기 위해 부산 신항과 광양항도 경제특구 대열에 끼워넣었다.
이 다섯 지역을 경제특구로 지정한 정부의 조처는 지방자치단체와 국내 기업들에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왜 다섯 곳만 ‘특별한’ 대접을 하느냐는 다른 지자체의 볼멘 소리가 당장 튀어나왔다. 국내 기업들로부터는 외국 투자 기업들에게만 특혜를 주는 역차별 조처라는 반발도 낳았다.



왜 지금 정부는 북한(나진·선봉)이나 중국(푸둥 등)이 애용하는 경제특구라는 사회주의적 발상을 들고 나왔을까. 정부가 무려 20개 부처 이름으로 7월29일 내놓은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 국가 실현방안’(정부 시안)이라는 보고서에는 경제특구를 만들 수밖에 없는 현실과 이를 둘러싼 정부의 고민이 들어 있다.



과천에서 만난 재정경제부와 산업자원부 공무원들은 한결같이 위기감을 드러냈다. 앞으로 10년 후에도 한국을 이끌고 갈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한국이 국제 무대에서 명함을 내밀고 있는, 반도체·통신·자동차·철강·조선·석유화학 같은 주력 제조업들은 성숙 단계에 진입했다. 다시 말해 몇년이 못가 성장에 한계를 보이리라는 것이다. 이미 그 징후가 보인다. 한국이 경쟁 우위를 가진 이들 주력 산업들은 세계적인 공급 과잉 상태에 빠져 있다.



한국이 몇년 동안 우물쭈물하는 사이, 세계 어느 지역보다 역동적인 시장인 동북아의 경제 패권을 선점하려는 아시아 각국의 경쟁은 불꽃을 튀기고 있다. 대표 주자는 중국. 경제특구를 통해 자본주의 실험을 하고 있는 중국은 이미 단순히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선을 넘어섰다.‘상하이시 외국투자 촉진 중심’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국제 비즈니스 중심지로 떠오르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터주대감 싱가포르와 홍콩이 가만히 앉아 있을 리 없다. 홍콩은 이미 1997년 특별추진팀이 마련한 비즈니스 중심지화 전략을 추진해 중국으로 반환된 후 싱가포르로 달려가는 기업들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싱가포르도 홍콩을 추격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1998년 경제개발청(EDB)에서 지식 기반 산업 중심지화 계획인 ‘인더스트리(산업) 21’을 내놓았다.
동북아 패권 경쟁은 세계 물동량을 자기네 항만과 공항에서 처리하겠다는 물류 기지화 경쟁에서도 가열되고 있다.


중국·싱가포르·홍콩·일본은 일제히 항만과 공항을 대대적으로 확충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한국은 이들 선발 주자들 틈바구니에서 과연 입지를 확보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물류 기지화 실현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높게 보고 있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여 있으며 세계의 주요 간선 항로상에 위치했다는 지정학적 이점은 인천공항·부산신항·광양항 등을 창구로 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의 비즈니스 센터라는 목표는 아직 멀리 있어 보인다. 심지어 한 관료는 “꿈에서 깨야 한다. 당장 다국적 기업을 유치할 수 있다는 기대는 경제4강론만큼이나 근거가 없다”라고 꼬집었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춘〉이 선정한 100대 글로벌 기업의 아태본부(총 50개) 현황 통계를 보면 더 분명해진다. 다국적 기업들은 홍콩(24개)과 싱가포르(20개)를 좋아한다. 한국에는 다국적 기업의 아태본부가 단 1개(푸르덴셜) 있을 뿐이다.



제한된 공간에서 개방 실험한다



사실 이 수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세계의 유수 기업들이 한국을 외면하느냐 하는 데 있다. 올 3월 미국 상공회의소가 내놓은 경영환경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인근 네 나라(홍콩, 싱가포르, 중국의 상하이, 일본의 도쿄) 가운데 최하위로 평가되었다. 한국은 홍콩·싱가포르에 비해 삶의 질, 국제화 수준, 영어 활용도 면에서 어느 것 하나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매년 되풀이되는 노사 분규가 결정적 요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부의 동북아 구상 작업에서 종합조정역을 맡고 있는 재정경제부 박병원 경제정책국장은 “동북아 구상의 핵심은 경제특구가 아니다. 전략 산업으로 지식 기반의 서비스 산업을 택했다는 점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나라 전체를 싱가포르나 홍콩같이 개방하는 것이 정답이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특구라는 제한된 공간부터 먼저 시도해 보는 것으로 절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음’이란 개방에 대한 한국의 배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재경부의 다른 관계자는 “월드컵에서 ‘히딩크를 통한 개방’이 불과 1년반 만에 거둔 놀라운 성과를 생생히 지켜 보고서도 여전히 한국은 폐쇄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다. 특히 개방에 대해 비경제 부처들의 반대가 심했다. 이래서는 외국 기업이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동북아 구상의 핵심이 경제특구 그 자체가 아니라 서비스 산업 유치라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맹위를 떨치던 3공 시대의 수출 제조업 중시 전략에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지는 것일까.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렇다. 이번 동북아 구상에는 이른바 미래 전략 산업인 ‘6T’산업을 육성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다. 정보통신기술(IT),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 에너지·환경 기술(ET), 우주항공기술(ST) 따위 6T 산업은 선진국 사이에서도 시작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그야말로 미래 산업군이다.



정부의 고민은 바로 이 대목에 있다. 앞으로 5∼10년 사이 전통 주력 산업들은 경쟁력을 상실할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이 빈 자리를 6T 미래 전략 산업군이 메워주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서비스 산업 육성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왜 서비스 산업인가에 대한 대답은 아이러니컬하지만 낙후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서비스 산업은 국내총생산(GDP) 비중이 52.6%로 미국(74.4%)에 비해 크게 뒤지며, 고용 비중도 61.1%(미국 78.2%)에 그친다. 낙후성을 드러내는 이런 통계 수치들은 그만큼 잠재 성장력이 크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정부가 선택한 방법은 외국인 직접 투자이다. 이들을 특구에 집중 유치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보는 것이다. 접근 방법도 다르다. 특구 내에 ‘기계’가 아니라 기술·노하우·마케팅 능력을 가진 ‘사람’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번 보고서에서 유독 외국인 전용 주거단지와 학교, 병원, 영어 공용 서비스, 방송 같은 생활 인프라를 강조한 것도 이런 특성 때문이다.



정부는 동북아 구상에 대해 총체적 국가 발전 전략이자 한국 경제의 생존과 통일 이후까지를 고려한 한반도 번영의 원대한 계획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제2의 경제 대국 일본과 21세기 경제 대국으로 떠오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의 미묘한 지정학적 위치는 흔히 말하듯 우리에게 기회이자 위협 요인이다. 특히 ‘세계의 공장’으로서 세계 경제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는 중국은 위협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5∼10년 사이에 한국 경제가 중국의 추격을 멀리 따돌릴 수 없다면, 서비스 산업이라는 성장의 대체 엔진으로 미래 산업에 역량을 집중할 시간을 벌지 못한다면 한국의 미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정부의 주장은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시간도 없고 갈 길도 먼 한국이지만, 최소한의 충분 조건인 경제특구 하나 만드는 일에도 이렇게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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