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TV도 사고 칠 수 있다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4.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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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제품 화재·폭발 잇따라…올해만 50건, 특정 회사 제품에서 많이 발생
지난 11월5일, 서울 이문동 이 아무개씨 집 욕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4년 전 삼성전자 대리점에서 사서 사용하던 세탁기에서 불이 난 것이다. 이씨는 “작동중이던 세탁기에서 갑자기 연기가 나기 시작해 얼른 전원 코드를 뽑고 A/S센터에 연락했다. 몇 시간 후에나 도착할 수 있다는 A/S센터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소방서에 연락하는 사이 욕실 전체에 시커먼 연기가 가득 찼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 화재로 인해 욕실은 새카맣게 탔고, 집안 전체에 유독 가스가 번져 이씨네는 며칠 동안 집에서 지내지 못했다.

지난 7월 서울 신 아무개씨 집에서는 4년 전에 산 텔레비전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식구들이 잠든 새벽에 텔레비전 브라운관 안쪽에서 불이 났는데, 유독 가스 냄새에 놀란 식구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바람에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집안 전체가 시커멓게 그을리는 사태는 피할 수 없었다.

같은 달, 경기도 양평 김 아무개씨 집에서는 냉장고로 인한 화재가 일어났다. 7년 전에 산 냉장고의 디스펜서 부위가 시커먼 연기를 내면서 녹아내렸던 것이다. 다행히 누전차단기가 작동해 큰 화재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세탁기·텔레비전·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으로 인한 화재 사고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한국소비자보호원에 따르면, 올해 접수된 주요 가전제품 화재 사고는 총 50건이다. 냉장고 18건, 세탁기 14건, 텔레비전 16건, 전기 매트 2건이다. 사고 발생 당시 소비자와 업체 간의 합의가 원만하게 이루어져 조용히 묻힌 경우까지 합하면 사고 건수는 더 많을 수 있다.

4년 동안, 또는 7년 동안 멀쩡하게 잘 돌아가던 가전제품에서 왜 갑자기 화재가 발생하는 것일까. 이문동 이씨네 세탁기를 수거해 간 삼성전자측은 “현재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조사해 봐야 원인을 밝힐 수 있다”라고 말했다.

가전제품 화재의 원인은 크게 소비자의 부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와 제품 자체의 결함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올해 한국소비자보호원에 접수된 가전제품 화재 사고를 보면, 특정 회사 제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냉장고·세탁기·텔레비전 등 종류에 상관없이 한 회사의 제품에서 발생한 사고가 다른 회사 사례보다 많다.
제품 결함·소비자 부주의가 주 원인

전자부품연구원 장현덕 연구원은 “해당 기업의 제조 시스템이나 부품에서 비롯한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지적했다. 예컨대 가전업체가 기업 경쟁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제조원가를 지나치게 낮추는 과정에서 제품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냉장고나 세탁기와 같은 가전제품은 부품이 적어도 100가지가 넘는다. 가전회사들은 그 부품들을 중소기업으로부터 납품받는데, 납품 업체에 단가를 낮추라고 요구하게 마련이다. 장연구원은 “부품 업체들은 구매자인 가전회사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더 값싼 소재로 바꾸고 작업 기일을 단축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부품의 내구성이 떨어질 수 있다. 수많은 부품 가운데 하나라도 내구성이 떨어지면 전기에 약해져 화재 사고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라고 말했다.

소비자가 잘못된 환경에 제품을 방치함으로써 제품 수명을 단축해 사고를 부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전제품 중에서도 세탁기는 특히 화재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물·진동·온도·먼지 등 세탁기를 둘러싼 환경은 전기 화재에 취약한 것들이다. 먼지와 습기가 많은 곳에서 오래 사용하다 보면 부품들이 쉽게 마모되어 누전되기가 쉬운 것이 전자제품의 특징인데, 세탁기는 진동 때문에 내부의 배선이나 부품들이 오래 견디지 못한다.

이문동 이씨네처럼 세탁기를 욕실에 설치하는 소비자가 많은데, 이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업계의 한 전문가는 “샤워 직후 목욕탕 습도를 재보면 98~99%를 넘는다. 이처럼 습도가 높은 환경에서 전자제품을 오래 사용하다 보면 부품들이 쉽게 마모되고, 전기에 약해질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한다.
전자동보다는 드럼 세탁기가 안전

똑같은 세탁기라고 해도 전자동보다는 드럼 세탁기가 안전하다. 전자동 세탁기는 드럼 세탁기에 비해 진동이 커서 그 안의 배선들이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진동 폭만큼 전선 마모율이 높아져 전기에 약해질 수밖에 없다. 또 전자동 세탁기는 커버가 불에 약한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드럼 세탁기는 불연성 소재로 덮여 있어 화재가 번질 위험이 적다.

특히 시너·휘발유·식용유 따위가 묻은 옷을 넣고 세탁기를 돌리면 이 가연성 소재와 세제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화재가 일어날 수 있는데, 드럼 세탁기에서는 ‘세탁조 안의 불’로 그치고 만다. 실제로 몇년 전 국내 한 식당에서 기름이 많이 묻은 옷을 넣고 세탁기를 돌리다가 사고가 났는데, 세탁조 안의 옷들만 타고 불이 밖으로 번지지 않았다.

텔레비전 화재 사고의 ‘주적’은 먼지다. 텔레비전 사고의 유형은 대개 브라운관 폭발 형태로 나타나는데, 브라운관에 쌓인 먼지가 인화 물질로 작용한다. 브라운관 내부는 진공 상태로 되어 있는 데다 2만V 이상의 고전류가 흐른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 진공 상태인 브라운관에 먼지가 쌓이게 마련인데, 부품의 내구성이 떨어지면 이 먼지들에 전류가 흘러 불이 붙을 수 있다. 브라운관 내부에 쌓인 먼지에 불을 붙이면 바로 활활 타오를 정도로 가연성이 높다.

텔레비전 위에 놓아두었던 컵이나 화분에서 실수로 스며든 물이 폭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수분이 전선 회로에 영향을 주면서 화재를 일으킬 수 있다. 텔레비전 주변에 책이나 헝겊처럼 불에 잘 붙는 물건을 놓거나 물컵이나 화분을 놓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요즘 유행하는 HD텔레비전이나 프로젝션 텔레비전이 구형 텔레비전보다 화재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구형 모델보다 높은 전압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은 “비싼 만큼 불연성 소재를 많이 쓰는 등 안전 대비를 철저하게 해서 실제 화재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은 더 적다”라고 주장한다.

24시간, 1년 열두 달 전원이 연결된 냉장고 역시 화재 사고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제품이다. 늘 전류가 흐르기 때문에 특정 부품 하나라도 내구성이 떨어지면 여기서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화재로 연결될 수 있다. 대개의 부품은 불이 붙지 않는 물질로 만들어지지만 지속적으로 열이 가해지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양평 김씨네 냉장고의 디스펜서가 전기에 녹아내리면서 화재가 발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냉장고 화재 사고를 부르는 또 하나의 주원인은 쥐나 바퀴벌레 같은 생물들이다. 쥐들이 배선을 갉아먹거나 바퀴벌레가 냉장고 부품 사이에 알을 까거나 배설해 제품 부식률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업계의 한 전문가는 “냉장고 화재 사건 현장에 가보면 쥐들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들이 화재 위험을 높인다”라고 말했다.

PL협회(제조물책임협회) 전자제품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유엘코리아 신택정 상무는 “가전제품은 안전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전력을 쓰는 모든 제품은 화재 사고가 날 가능성을 안고 있다. 기업이 아무리 철저하게 제품을 만들어도 불량률이 제로일 수는 없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비자는 어떤 기업이 제품을 안전하게 만들고 사고가 났을 때 양심적으로 대처하는지 잘 따져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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