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도 즐거운 그들만의 천국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3.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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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의 ‘타워팰리스’ 삼성 노블카운티 르포
서재 책상 위에는 20년 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던 시상식 사진이 걸려 있다. 거실에는 미국 한 골프장에서 받은 홀인원 기념패가 놓여 있다. 그 위에는 신라호텔에서 열었던 고희 기념 행사 사진이 크게 걸려 있고, 책장에는 제작하는 데 9백만원이 든 고희 기념 앨범이 꽂혀 있다.

창 밖으로는 밤마다 멋진 야경을 연출하는 수원 시내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천장 곳곳에는 무동작 감지 센서(사람이 일정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으면 경고 발신을 하는 장치)가 달려 있다. 위험한 가스 대신 할로겐 레인지를 쓰고 욕실에는 미끄럼 방지 특수 타일을 깔았다. 김성수 회원(70)이 노후를 보내는 장소의 풍경이다. 그는 노인 전용 주거 시설인 삼성 노블카운티에 산다.

노블카운티는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운영하는 유료 양로 시설이다. 2년 전인 2001년 5월 부터 분양을 시작해 현재 2백20 세대 3백50명 가량이 살고 있다. 이곳은 동네 노인 아파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말 그대로 ‘노인들의 타워팰리스’라고 불리는 최고급 부유층 아파트다.


일단 이곳에 입주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전세 형태로 보증금과 월세를 내는데 36평형의 경우 보증금 4억7천만원에 월 2백19만원 가량(부부 기준)을 내야 한다. 42세대가 거주하는 72평형의 경우에는 보증금 10억원에 월세 2백75만원이다.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 로열층보다 비싼 전셋값이다. 하지만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살다가 지난해 이곳으로 이사했다는 한 회원은 “서울에 살면서 식비·파출부 고용비·휘트니스클럽 회원비·교통비 등등 써야 할 돈을 고려하면 여기가 더 싸게 먹힌다”라고 말했다.

비싼 보증금에 걸맞게 시설은 일류 호텔급이다. 빨래와 청소, 식사 준비는 직원이 대신한다. 엘리베이터에는 좌석이 있다. 복도·계단 곳곳에 긴 손잡이가 설치되어 있어서 잡고 걸을 수 있다.
침실·거실·화장실에는 응급 콜 장치가 있어서 줄을 당기면 1층에 있는 대기 간호사와 연락할 수 있다. 3백명이 넘는 노블카운티 직원 가운데 사회복지사가 9명, 간호사가 30명, 의사가 2명, 물리치료사가 6명이다.

주거 동 옆에는 인터넷룸·도서관·노래방 등 여가 생활을 할 수 있는 문화센터가 있다. 문화센터에는 건강 검진과 진료가 가능한 클리닉도 있다. 7월11일 오후, 마치 수영장처럼 생긴 수치료실 안. 김용상씨(72)가 물리치료사로부터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걸을 수가 없었는데, 물 속에서 걷는 연습을 하니까 자신감이 생기고 몸도 좋아진다”라고 말했다.


이곳에 거주하는 입주자(회원)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전직을 살펴보면, 부총리를 비롯해 건설부장관·산업자원부장관·국회의원·외교관 등 입법부·행정부 고위 직에서 일한 사람이 전체 입주자의 10%를 차지한다. 또 중견 기업 회장을 비롯한 사업가 출신 76명, 의사 출신 31명, 교수 출신 7명이 산다. 아직 성형외과 의사는 없다.

이렇게 젊은 시절 ‘잘 나갔던’ 사람이 많다 보니 회원들 사이에 다소 위화감도 생긴다. 노블카운티 호수 벤치에서 쉬고 있던 한 회원은 “온통 서울대 출신이고 서울 강남 사람들이다. 나 같은 사람은 불편하다. 아직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노블카운티에서 노후를 보내려면 사교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필요하다. 노블카운티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30개가 넘고 동호회는 20개가 넘는다. 김성수 회원은 소림기공수련동호회 회장이다. 7월11일 아침 그는 회원 10여 명과 함께 강사로부터 수련을 받고 있었다. 1주일에 한 번 있는 강사의 지도가 끝나면 회장이 주도하는 별도 연습 시간이 또 있다. 김회원은 그 밖에 남성 합창단 등 서너 가지 프로그램에 더 참여한다. 그는 실버타운 생활이 심심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천만에. 바쁘다, 아주 바쁘다”라고 말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밤 10시에 잠들기까지 빡빡한 프로그램을 따라가기에 정신이 없단다. 모두 그가 스스로 택한 프로그램이다.
주거 동 주변에서는 화사하게 화장하고 예쁜 옷을 차려 입고 나서는 할머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노블카운티 안상수 과장은 “노인들이 적당히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은 건강에 크게 도움이 된다”라고 설명했다. 식당에서 슬리퍼나 반바지를 입고 식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김종애씨(67)는 “식사하러 가기 위해 옷 입고 화장하는 것이 즐겁다. 친구들과 이야기 나눌 생각을 하면 식사를 거를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역시 수다도 건강에 도움이 된다.

한 회원은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멀리 여행을 떠난다. 단체로 해외 여행도 많이 간다”라고 말했다. 주로 일본이나 동남아 쪽이 대상이다. 골프장 부킹도 많다. 골프동호회가 있어서 골프채 둘러메고 아침 일찍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골프 8학군’으로 불리는 용인에는 10분 거리에 골프장이 산재해 있다.


부유층과 노년층의 교집합인 이들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보수적이다. 남성 회원들끼리 모이면 “도대체 나라 꼴이 어떻게 되려나…”라며 시국을 걱정하곤 한다. 문화적으로도 보수다. 2년 전 한 독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곳에서 ‘스캔들’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이들은 노블카운티 입주자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나갔다. 올해 6월께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갑자기 그 친구(남자)가 이사를 가더라구. 그리고 한 달쯤 있다가 그 친구와 친했던 여자도 소리 소문 없이 이사 간 거야. 알고 보니 둘이 경기도 인근에서 살림을 차렸더군.” 이웃이 전하는 사연이다. 황혼 로맨스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여기서 논쟁거리다. 대체로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보수적이다. 한 80대 할머니는 “이곳에서 서로 사귀는 그런 인간 없다”라며 연애 자체를 부정했다. 하지만 김 아무개 할머니(74)는 “좋은 일 아니냐. 축복해 줘야 한다. 재혼해 떠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노블카운티는 클리닉과 별도로 주거 동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너싱홈이라고 하는 자체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 입원한 환자 가운데에는 얼마 전까지 노블카운티에서 살았던 이한빈 전 부총리도 있다. 간호사에 따르면, 이씨는 목 수술을 해 말을 잘 하지 못하지만 아직도 영자 신문을 읽으면서 시사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같은 6층에는 현재 간첩죄로 미국에 구속되어 있는 로버트 김의 아버지인 김상영씨(90)도 누워 있다. 그는 노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석방탄원서도 올렸다. 기자가 아들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입술을 떨고 무언가 말 하려 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간호사는 “병문안을 온 사람이 아들 이야기를 꺼내면 눈물을 흘리시곤 한다. 현재 위독하다. 올해를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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