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천외 '청와대 사칭 사기' 수법들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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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법·행태 기상천외한 ‘청와대 사칭 사기’ 현장 추적
청와대의 ‘청’자만 꺼내도 먹혀드는 세상이다. 국민과의 직접 의사 소통을 표방한 ‘참여정부’에서도 청와대 사칭 사기 사건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최근 한 참깨 수입업자는 이호철 민정1비서관을 사칭해 세관 통관 과정에서 압력을 행사했고, 문재인 민정수석을 사칭해 노조원의 건강 검진 병원을 바꾸려 한 사기꾼도 있었다. 유인태 정무수석을 사칭해 정치 자금을 요구한 사기꾼이 덜미를 잡혔는가 하면,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의 6촌 동생이라고 속여 10억여원을 가로챈 사람도 있었다.
참여정부 출범 한 달 만에 확인된 사칭 사건만 4건, 6개월 만에 10건이 넘었다. 이는 DJ 정권과 YS 정권 초기에 비해 뒤지지 않는 수치이다(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YS 취임 첫해인 1993년 한 해에 청와대 사칭 사기는 6건에 불과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도 권력이면 무엇이든 통할 것이라는, 청와대에 대한 일반인의 정서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한 지표이다.

청와대 사칭 사기에는 ‘청와대의 힘이면 안되는 것이 없다’ ‘청와대의 힘을 빌려 일을 쉽게 처리하겠다’는 헛된 욕심이 깔려 있다. 청와대 사칭 사기꾼들은 시류에 따라 다양한 아이템으로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다.

5·6 공화국 시절 청와대 사칭 사기는 국유지 불하 특혜나 개발 예정지 정보를 단골 메뉴로 삼았다. 정치 자금을 내놓으면 이권을 주거나 거액의 은행 대출을 싼 이자로 받게 해주겠다는 수법이 가장 흔했다. 이런 고전적인 사기 행각은 수법 자체로야 단순하기 짝이 없지만, 지금까지 장수하는 청와대 사칭 사기 수법이다. 정치권에서 신당 논의가 활발하던 지난 6월 말 유인태 정무수석을 사칭해 ‘신당 창당 자금 100억원이 필요하다’고 손길승 전경련 회장에게 전화한 간 큰 사기꾼이 있었다. 이 사기꾼은 목소리가 유인태 정무수석과 비슷하다는 말을 자주 듣고는 유수석을 사칭해 민주당 설송웅·박주선 의원에게도 전화를 건 것으로 밝혀졌다.

YS 시절에는 청와대의 힘으로 자식을 대학에 넣어주겠다는 사칭 사건이 종종 일어났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직후에는 금융기관에 잠자고 있는 검은돈을 대출해 주겠다며 접근하는 경우가 유난히 많았다. 청와대 특사를 자처한 한 사기꾼은 ‘실명 전환을 못해 은행에 묶인 가명·차명 예금 20조원을, 청와대가 정치 자금을 내놓는 기업에 대출해 주도록 하고 있다’며 굴지의 대기업 몇 곳을 농락하기도 했다.

DJ 정부 때는 취업난이 심한 탓에 직장을 구해 주겠다는 사기꾼이 유독 많았다. 청와대 청소부가 간부를 사칭해 한국디지탈라인(KDL) 사장 정현준씨로부터 4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참여정부에 들어서는 청와대에 대한 정보가 많이 노출된 탓에 청와대 사칭 사기꾼들이 더욱 지능적이고 교묘해졌다. 8월12일 경찰청 특수수사과에 구속된 장 아무개씨(42)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해 피해자들을 농락했다.

한때 꼬마 민주당 당원을 지내 정치권에 발이 너른 장씨는 올해 초 청와대 기념품 상점에서 청와대 봉황 날개 문양이 새겨진 손목 시계와 넥타이를 구입했다. 이어 고급 승용차를 렌트한 후 교도소에서 사귄 하 아무개씨(35)를 운전기사 겸 비서로 채용했다. 그러고는 본격적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실 사정팀 국장으로 행세했다.

장씨는 우선 동향 출신인 이 아무개씨(44)에게 청와대 관저 관리책임자를 시켜 주겠다며 접근했다. 서울 성동구 국회의원 선거와 종로구청장 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이씨는 여당 공천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장씨에게 이력서·신원진술서·건강진단서를 주었다. 그리고 지인들에게 장씨를 청와대 국장이라고 소개하고 다녔다. 장씨는 자신이 청와대 국장이라는 것을 주변에 알리기 위해 이씨와 이씨의 인맥을 바람잡이로 내세운 셈이다. 바람잡이들이 장씨를 청와대 국장이라고 소개하는 사이 장씨는 그저 185㎝ 키에 125㎏의 위엄 있는 풍채로 무게만 잡고 있었다. 명함을 주지도 않았다.


장씨는 주로 청와대 앞 도로와 부근 커피숍에서 약속을 잡았다. 청와대를 구경시켜 준다며 청와대 정문 부근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 기념 시계를 주기도 했다. 청와대 기념품 상점의 점원은 “관광객들은 보통 기념품을 한두 개씩 사는데 장씨는 수십 개씩 사들여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장씨는 청와대 내부 사정도 줄줄이 읊어댔다. 8월 초에는 ‘휴가비로 청와대 수석은 100만원을 받았는데 국장급은 60만원’이라며 투덜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장씨는 청와대 관련 신문 기사를 섭렵했다. 심지어는 청와대 직원들이 자주 찾는 청와대 주변과 광화문의 식당 및 카페에 드나들며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장씨는 자기가 대통령과 핫라인이 개설되어 있고, 특히 영부인의 직속 라인이라고 강조했다. 또 문재인 민정수석의 이삿짐을 부산에서부터 청와대까지 옮겨 주었다는 식으로 실세와 친분이 두텁다는 점을 은근히 과시하기도 했다.

이쯤 되니 청와대 실세를 배경으로 민원을 해결하거나 사업을 확장하려는 사람들이 줄줄이 장씨에게 돈을 바치기 시작했다. 폐기물 처리업체 공장을 담보로 기술신용보증기금 대출을 받게 해달라는 사장이 있었고, 동생과 조카를 청와대에 취직시켜 달라는 고향 후배도 있었다. 은행에 다니는 부인을 과장으로 진급시켜 달라는 식품회사 대표의 청탁도 받았다. 한 육사 출신 현역 대령은 진급과 예편 후 자리를 얻을 목적으로 장씨에게 돈을 바쳤다. 결국 장씨의 사기 행각이 드러나는 바람에 사진을 붙인 인사 카드까지 제출했던 대령은 체면을 구기고 돈도 날렸다.

정치에 뜻을 두고 있던 학원장 정 아무개씨(36)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장씨의 말에 속아 2억원을 순순히 바쳤다. 정씨는 그 뒤 민정수석실 발령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거나 민정수석실에 근무한다며 정치권 인사들을 두루 만나고 다녔다. 그 중에는 실제 청와대 직원이나 대통령과 아주 가까운 친척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에게 노대통령의 한 인척은 “정씨가 청와대 직원이 아닌 것이 확실하냐”라며 확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장씨가 청와대를 사칭해 받은 돈은 현재까지 5억5천만원. 하지만 신상이 노출되기를 꺼리는 피해자를 감안하면 액수는 10억원이 넘으리라는 것이 경찰의 추산이다.

청와대 사칭 사건의 경우, 청와대 직원 행세를 한다는 내용이 인지되면 민정수석 사정비서관실이 사실 확인에 들어간다. 그러나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청와대 사칭 사건을 담당하는 직원도 없고, 사정 담당자들의 인식도 안이한 것이 현실이다. 민정수석실 직원들은 대체로 “아직도 청와대 사칭 사기에 속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라는 반응이었다.

일단 청와대 사칭 사기 사건 첩보가 사실로 확인될 경우 경찰청 특수수사과에 이첩해 처리한다. 하지만 청와대 사칭 사기 사건을 처리하는 더 분명한 시스템이 정비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장씨 사건의 경우 한 피해자는 “청와대에 장국장이 있는지 물어봤더니 담당 직원이 청와대에는 사람이 많아서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라고 말했다. 만약 장씨가 직원인지 여부가 바로 확인되었더라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검찰·국정원 사칭이 거의 사라진 요즘 유난히 청와대 사칭 사기꾼들만이 버젓이 활개를 친다는 것은, 청와대 직원들이 곱씹어보아야 할 대목이다.

청와대 사칭 사건이 계속해서 터지자 8월13일 청와대는 ‘청와대 사칭 민원 해결 돈 요구는 100% 사기다. 대표 전화(02-737-5800)를 통해 신원 확인이 가능하다’는 <청와대 브리핑>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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