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총련 움직이는 ‘얼굴 없는 간부’들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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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총련 움직이는 ‘얼굴 없는 간부’들, 학창 생활 10년에 한계·위기감 드러내
이름은 가명이었다. 이중대. 나이는 서른. 93학번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는 여전히 캠퍼스에서 생활한다. 투쟁 경력 10년째, 10학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씨는 “가명을 보면 짐작하시죠? 에이치(H) 투쟁국장입니다”라고 말했다. 에이치는 한총련을 뜻하는 운동권 은어다.

8월14일 낮 12시,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씨는 한나라당 맞은편에 앰프를 설치하고 플래카드를 거는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투쟁국장이 이런 일도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요즘 투쟁국은 3D 업종이라고 답했다. 오후 1시, 그가 준비를 마치자 한총련 소속 통일선봉대 3백여 명이 도착해 한나라당 규탄 집회를 열었다. “조국 통일 가로막는 당나라당은 해체하라.” 이씨는 10년차 후배들의 시위를 지켜보았다. 오후 3시 집회가 끝나자 그는 남아서 뒷정리를 했다.


집회 장소에 가장 먼저 왔다가 가장 나중에 떠난 이씨는 바로 한총련의 얼굴 없는 간부다. 1학년 때부터 동기들보다 먼저 운동권에 뛰어들었고, 동기들이 떠난 지금도 남아 학생운동을 하는 한총련 핵심 인물인 이씨는, 경찰 시각으로 보면 ‘배후 조종자’인 셈이다.

이씨처럼 신원을 드러내지 않은 한총련의 비공개 간부들이 주목되고 있다. 8월7일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의 미군 부대 진입 사건 때문이다. 공안 당국은 1·2학년 저학년이 중심이 된 시위의 배후로 한총련의 얼굴 없는 간부들을 지목했다.

한총련은 대의제 기구다. 단과대 학생회장이 대의원 자격으로 서울·경기·강원·충청·광주전남·대구경북·부산경남·제주 지역 의장과 한총련 의장을 선출한다. 의장과 각 지역 의장은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드러난 얼굴이다. 하지만 한총련 운영은 얼굴 없는 간부가 중심이 된 상무집행위원회가 맡는다. 모두 6명으로 구성되는 상무집행위원회는 의장·집행위원장·정책위원장·조직위원장·연대사업위원장·사무처장으로 구성된다. 각 위원장 아래에는 위원 3∼4명씩이 포진해 있다. 한총련을 움직이는 실세인 이들은 의장을 제외하고 대외에 신원이 공개된 적이 없다. 신원이 공개되는 순간 공안 당국의 추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얼굴 없는 간부로 불린다.

한총련 조직을 통틀어 얼굴 없는 간부는 40명 선이다. 형식적으로 의장의 결정을 집행하는 손발이지만, 실제로는 ‘후배 의장’을 지도한다. 대부분 졸업생·휴학생·수배자 등 고학번이 차지하고 있다. 현재 활동하는 최고 학번은 92학번(3명)이고, 나머지는 93∼96학번이다. 이들은 서로 간에도 실명을 사용하지 않고 출신 학교도 밝히지 않는다.

96학번인 노마씨(가명·27)는 운동권 정석을 밟아 조국통일위원회 간부가 되었다. 3학년 때 과 학생회장, 4학년 때 단과대 학생회장을 지냈다. 남들이 졸업하는 5학년 때 총학생회장에 당선했고, 6학년 때 지역총련 간부를 지냈다. 7학년 때인 지난해 한총련 간부를 맡았다. 간부 대부분이 노마씨와 비슷한 과정을 밟는다. 그래서 한총련 간부는 고학번일 수밖에 없다.
간부를 맡으려면 출신 학교 총학생회장의 추천이 있어야 한다. 물론 추천받았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 간부 인선을 위해서는 면접을 세 차례 거쳐야 한다. 한번에 10시간씩 면접이 진행된다. 노마씨도 마라톤 면접을 거치고서 간부가 될 수 있었다. 의장 못지 않게 간부 선출을 놓고도 정파 간에 물밑 투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총련의 주류는 NL계(민족해방파). 1988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원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있다. 지금은 과거 NL계와 PD(민중민주파)계의 차이만큼이나 NL계끼리 편차가 크다. 2001년 한총련 간부 인선을 놓고 NL계 내부에서 일대 격론이 벌어진 뒤부터이다(38쪽 상자 기사 참조).

정재욱 의장은 한총련을 개혁하자는 혁신계로 분류된다. 한총련을 움직이는 중요 직책도 정의장을 따르는 혁신계가 차지하고 있다. 한때 자주파로 불렸던 남총련은 분파주의로 비판받아 주도권을 상실했다. 요즘은 자주파라는 용어 대신 비선계 분파로 불린다. 이들은 위기 의식을 느낀 탓인지 지난해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을 ‘접수’했다. 1992년 결성된 범청학련은 한총련의 전신인 전대협과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가 만든 공동 기구다. 원래 한총련 의장이 자동으로 범청학련 공동의장을 맡았지만, 지난해 한총련 주류였던 비선계 출신 윤기진씨(한총련 7기 의장)가 종신제나 다름없이 의장을 꿰어찼다. 한 한총련 간부는 “비선계가 범청학련을 접수한 것은 또 다른 한총련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비판했다.

비선과 혁신계의 틈바구니에서 독자 노선을 걷는 그룹도 있다. 반미구국노학연대선봉대(노선대)로 불리는 학생운동 세력이다. 고려대를 중심으로 경기 동부 지역 대학 총학생회 등이 여기에 속해 있다. 현재 한총련의 얼굴 없는 간부는 비선·혁신·노선대가 삼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난 8월7일 미군 훈련장 진입 배후는 어느 계통이었을까? 일부 언론은 한총련 강경파로 분류되는 비선계라고 보도했지만, 실상은 노선대 작품이다. 노선대는 지난해 미국대사관 점거 투쟁, 미국 상공회의소 점거 투쟁을 이끌기도 했다. 노선대 소속인 한 한총련 간부는 “스트라이크 부대의 본질을 폭로하기 위해서 치밀한 준비를 거쳐 투쟁을 벌였다. 우리가 못 들어가는 곳은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총련 의장을 비롯한 지도부는 이번 투쟁에 비판적이다. 한총련 투쟁국장은 “대중적인 축제를 위해 8·15대회에서 과격한 투쟁은 자제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노선대도 동의했었다”라고 말했다. 한총련 투쟁국장도 나중에 신문 보고 알았다고 했다. 이번 투쟁은 한총련 지도부도 모른 채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노선대의 8월7일 투쟁을 비판하기는 비선으로 분류되는 그룹도 마찬가지다. 한때 시위 배후로 의심받았던 황 선 통일선봉대 대장(범청학련 대변인)은 “내용은 정당했더라도 과연 지금 그런 투쟁이 필요했는지는 평가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초 한총련은 8월12일 수배자들이 검찰에 자진 출두해 합법화를 위한 물꼬를 틀 계획이었다. 하반기부터 한총련을 자발적으로 해체하고 새 학생운동체를 만들 복안이었다. 고학번 간부들도 퇴장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 공안 당국이 강경파와 온건파를 분리해 처벌한다는 소식을 흘리자, 내부의 비판 목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총련의 얼굴 없는 간부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은 빨리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10년씩 차이가 나는 ‘오존(03학번)학번’과 호흡을 맞추기에 버겁다는 한 간부는 자신을 공룡에 비유했다. “운동권에서는 주름잡지만 냉혹한 사회에 나가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공룡처럼 한순간에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9월5일 한총련은 대의원 대회를 연다. 이를 기회로 새로운 학생운동체 건설을 논의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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