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지팡이’가 불안하다
  • 나권일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3.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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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기강 해이 심각, 조직내 지역 갈등·권력 투쟁…‘최기문 출마설’도 한몫
민중의 지팡이’ 경찰의 기강이 엉망이다. 10월10일 오전 1시께 광주서부경찰서 북부지구대 소속 정 아무개 경사(38)가 자기를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연 관계를 맺고 있던 김 아무개씨(45·여)의 집을 찾아가 가스총을 쏘았다. 정경사는 광주시 서구 치평동 김씨의 집에 들이닥친 뒤 “엄마를 불러오라”며 김씨의 장남(24)과 차남(19)에게 가스총을 발사하고 폭행했다. 정경사는 도주한 지 10시간 만에 체포되었다.

비슷한 시각, 경남 거제에서는 112 순찰차를 운전하던 이 아무개 경장(44)이 거제시 마전동 옥림아파트 입구 내리막길에 쓰러져 있던 김 아무개씨(46)를 순찰차로 치어 숨지게 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경찰의 어처구니없는 과실이었다.

같은 날 오후, 서울 강남경찰서 기자실도 발칵 뒤집혔다. 교통 단속을 하던 젊은 의경이 법규를 어긴 20대 여성에게 성관계를 요구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가 징계를 받은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서울경찰청 특수기동대 이 아무개 수경(24)은 10월2일 밤 주행 중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사용한 한 아무개씨(25·여)를 적발해 부근 골목길에 정차시켰다. 그는 한씨가 “원하는 게 뭐냐”라고 묻자 “남자가 원하는 게 뭐겠습니까”라며 차량 조수석에 5분여 동안이나 버티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파문이 커지자 이수경은 경찰 품위를 손상했다는 이유로 뒤늦게 1주일 동안 영창에 수감되었다.

‘나사 풀린 경찰’은 간부들도 예외가 아니다. 10월2일 경찰청은 이한선 경찰종합학교장(치안감)을 직위 해제하고 특수수사과에 직무 고발했다. 경찰청은 이치안감이 건국대 재단이사장의 횡령 의혹 사건과 관련해 수사 기밀을 유출했고, 2002년 서울지방경찰청 수사부장일 때 수사비를 횡령했다고 밝혔다.

경찰의 도덕성을 실추시키는 사건이 잇따르자 경찰 조직이 불안에 빠져들고 있다. 올 들어 강·절도와 살인 사건이 속출하면서 최기문 경찰청장이 역점 시책으로 내건 ‘범죄와 사고로부터 안전한 국민생활 보장’ 약속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지난 8월부터 파출소 운영 체제가 지구대로 바뀐 뒤 범죄 예방과 민생 치안에 큰 구멍이 뚫렸다(하단 상자 기사 참조).

급기야 국회 국정감사장에서도 경찰 기강 문제가 다루어졌다. 10월8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의 서울지방경찰청 국감에서 통합신당 이강래 의원은 “경찰이 기강 해이가 심각한데도 서울청의 비위 처벌은 감소하고 있다”라며, 서울지방경찰청의 감찰 기능이 부실하다고 지적했다. 다음날 국감에서 한나라당 박종희 의원은 “경찰 고위 간부들의 불미스러운 비위 연루를 거론하는 ‘L시리즈’가 시중에 나돌고 있다”라며 고위직 비위 의혹을 받고 있는 인사들을 겨냥했다. 박의원이 거론한 인사들은 이한선 치안감을 비롯해 김영완씨 집 강도 사건을 비밀리에 수사하라고 지시한 혐의로 직위 해제되었다가 최근 경찰종합학교장으로 복직한 이승재 치안감, 굿모닝시티 분양 비리에 연루된 전직 경찰청장 이 아무개씨, 그리고 또 다른 치안정감 이 아무개씨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파견 경찰 41.4%가 영남 고교 출신

최기문 경찰청장 취임 2백일이 지났지만 바람 잘 날이 없는 이유로는 경찰 내 복잡한 세력 관계가 꼽힌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2003년 청와대 파견 경찰관의 출신 고등학교 지역 분석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출범 뒤 청와대로 파견된 29명 가운데 허준영 치안비서관 등 12명(41.4%)이 영남 지역 고교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오른쪽 표 참조). 나머지는 수도권
신 11명(37.9%), 호남 출신 4명(13.8%), 충청 출신 1명, 기타 1명으로 집계되었다.

경찰 간부 인사를 살펴보면 김대중 정부 5년 동안은 호남 경찰 전성 시대였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청와대 파견 경찰관 중 호남 출신 비율은 35∼40% 수준을 유지했다. 2002년에는 청와대 파견 경찰관 23명 가운데 13명이 호남 출신이었고, 영남 출신은 1명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올해부터는 다시 영남 출신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경찰 주변에서는 이 때문에 지난해까지 권력을 장악했던 호남 출신 간부들의 소외감이 커지면서 경찰 조직에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파견 경찰관은 청와대 쪽에서 원하는 경찰관을 보낼 수밖에 없다”라며, 특정 지역 편중 현상이 경찰청이 의도했던 상황은 아니라고 밝혔다.

차기 치안 총수 자리를 노리는 세력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최근의 기강 해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이른바 경찰 조직의 치열한 내부 암투설이다. 경찰청 주변에서는 차기 치안 총수에 가장 근접한 후보군으로 이근표 서울지방경찰청장·이상업 경찰대학장·임상호 경찰청 차장을 꼽는다. 이들 세 치안정감은 모두 1947년생(56세)으로 최기문 청장(51세)보다 나이가 많다. 당사자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경찰 안팎에서는 정년이 가깝기 때문에 그만큼 조급하지 않겠느냐고 해석한다. 경찰 조직 내부의 권력투쟁설은 최근 이한선 치안감 직위 해제 파문 때도 그럴듯하게 유포되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이치안감이 ‘직무 감찰’을 자청한 것이 최청장에게 ‘항명’으로 비쳤다. 최청장이 자신을 흔드는 특정 지역 세력과 경찰 고위직의 주류 학벌 가운데 하나인 ㄱ대 출신들에 대해 경고하고 견제하는 뜻으로 이한선 치안감을 전격 직위 해제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청은 정당한 직무 감찰에 따른 직위 해제 조처라며 이같은 ‘정치적’ 해석을 일축했다.

경찰이 정치 권력의 흐름에 민감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경찰 고위 인사 일부는 청와대 인사들과 직·간접으로 인연을 맺고 있다. 경남 창원 출신인 이상업 경찰대학장은 문희상 대통령 비서실장의 매제이다. 이학장은 윤창렬씨의 굿모닝 게이트가 터지면서 한때 구설에 올랐지만 금방 수그러들었다. 김세옥 대통령 경호실장의 친동생인 김옥전 치안감도 언론의 눈길을 끌고 있다. 김치안감은 지난 5월 한총련 학생들의 5·18 묘역 시위와 관련해 직위 해제되었다가 최근 경찰청 경비국장으로 복귀했다.

영남 출신 간부들의 줄대기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서울지방경찰청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노무현 대통령의 친구이자 특보 내정자인 이 아무개씨가 서울청과 대구청 인사에 관여하고 있다는 소문이 한때 돌았다. 영남 출신 일부 간부들이 권력에 줄을 대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이 경찰 조직 내 영·호남 간부들의 세력 균형을 위해 수도권 출신을 우대하고 있지만 특정 지역 출신들끼리 ‘자가 발전’하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최기문, 김두관이 부탁하면 출마한다?

경찰 조직이 불안정한 원인으로는 끊임없이 나돌고 있는 최기문 경찰청장의 총선 출마설도 빼놓을 수 없다. 최청장은 내년 총선에서 고향인 경북 영천 지역의 유력한 출마 예상자로 꼽힌다. 민주당 영천지구당의 한 당직자는 “최청장은 지역에서 신망이 있어서 신당으로 출마한다면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믿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영천지구당 위원장인 박헌기 의원(67)측은 “최청장이 자신을 흔드는 세력들에 넘어가지 않을 것으로 본다”라며, 최청장 출마설이 세대교체론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경계했다. 최청장도 자신의 출마설 자체를 ‘경찰청장 흔들기’로 파악하고 분노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정치권 주변에서는 통합신당 바람을 일으키는 데 동분서주하는 김두관 전 장관이 최청장에게 부탁할 경우 거절하기 어려우리라고 보는 관측도 있다. 행자부장관 해임안의 원인이 되었던 ‘한총련 시위 사태에 대한 경찰 책임론’이 최청장에게 ‘빚’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기강 확립’의 칼을 빼든 최기문 청장이 오는 10월21일 경찰의 날을 계기로 조직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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