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진영의 오래된 습관 성희롱 고발한다"
  • 김은남 ()
  • 승인 2000.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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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사건’ 줄줄이 터져… ‘100인위원회’ 가해자 명단 곧 공개
노 조 집행부는 ○○○ 성 추행 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즉각 공개하라.’ 지난 11월 말 KBS 사내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랐다. ○○○는 KBS 제8대 노동조합 정·부위원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 중 한 사람. 입후보 과정에서 몇 년 전 그에게 성 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 조합원이 나타나자 노조가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었다. 그런데 조사 결과가 결선 투표를 앞둔 시점까지 공개되지 않자 항의성 게시물이 오른 것이다.

이에 대해 진상조사위에 참여한 노조 관계자는,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아 공개하지 못한 것일 뿐 조사 결과를 은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고 해명했다. 그는 또 현재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혐의를 극력 부인하고 있는 만큼 성 추행 사실 관계를 규명함과 동시에 이른바 ‘배후설’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선거를 앞두고 추문이 불거지자 일각에서는 폭로 배후에 상대 진영의 음모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KBS 노조는 조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중앙집행위원회 의결을 거쳐 이 사건을 ‘원칙대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진보 진영과 성 폭력. 1970∼1980년대식 잣대로 생각하면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조합이 운동 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극히 최근까지만 해도 진보 인사가 연관된 성 추문이 발생하면 ‘공안의 음모’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올 봄 장 원 교수(전 녹색연합 사무총장)의 성 추행 사건이 처음 알려졌을 때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피해자 ㅇ양을 ‘총선시민연대를 흠집 내려는 반동 세력의 프락치’라고 몰아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2000년은 진보 진영 내부의 성 폭력 문제가 공론의 도마에 오른 원년이라 할 만하다. 교수 장 원, 시인 박남철, 광주MBC 프로듀서 오창규(일명 ‘5·18 PD’). 한국 사회에서 진보 인사로 행세깨나 하던 이들이 줄줄이 성 폭력 사건에 휘말리면서 사람들은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진보=도덕적’이라는 단순 등식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유가 무엇일까. 진보 진영이 갑자기 ‘도덕적 해이’의 늪에 집단으로 투신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서울여성노조 정양희 위원장은 잘라 말한다. 수십 년간 곪은 상처가 터졌을 뿐 갑작스런 현상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운동 조직 안에서 성 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이를 외부에 발설할 수가 없었다.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공권력에 의해 조직이 박살 날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직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해도 전혀 먹히지 않는 분위기였다. 피해자가 선택할 길은 딱 두 가지였다. 입을 다물든가, 조용히 조직을 떠나든가.”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시행되자 사회는 급속도로 바뀌었다. 성 폭력·성 희롱 사범은 구속되고, 벌금을 물고, 회사에서 징계를 당했다. 노동부는 성 폭력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그러나 진보 진영은 잠잠했다. 조직 안에서 당한 성 폭력을 공개하는 피해자가 하나 둘 생겨났지만 이들은 여전히 ‘반조직 행위자’로 낙인 찍혔다. 가해자의 성 폭력 행위는 ‘조직을 보위한다’는 미명 아래 은폐·축소·왜곡되기 일쑤였다. 정양희 위원장의 말마따나 “지난 10년간 사회는 깨어났는데 운동권 성 폭력 문제만 잠자고 있었다.”

그 사이 성 폭력은 계속되었다. 최근 발생한 굵직한 사건만도 여러 건이다. △1998년 7월 민주노총 지도위원 ㅇ씨가 10년간 노동운동을 함께 해온 ㄱ씨를 성 추행했다. ㅇ씨는 ㄱ씨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놀러가 환담하다가 “한번 안아봐도 되느냐”라고 제안했다. 할아버지와 손녀뻘 관계인 데다 평소 ㅇ씨를 존경했던 ㄱ씨는 동지적 포옹으로 생각하고 이를 허락했다. 그런데 ㅇ씨는 ㄱ씨를 안은 상태에서 가슴을 만지고 엉덩이를 수 차례 주물거렸다.

△1999년 말에는 보건의료노조 송년회 뒤풀이에서 사무처장 ㅅ씨가 여성 간부 ㅂ씨를 여관에 끌고 가 추행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피해자는 이것이 선거에서 ㅅ씨를 지지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보복이자 운동조직 내 직위와 권력을 이용한 성 폭력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ㅅ씨는 ㅂ씨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여관에 데려갔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술기운에 더워서 옷을 벗고 자다가 잠결에 ㅂ씨를 끌어안은 기억은 있지만 추행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지난 1월에는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간부 ㅂ씨가 상급 단체인 금속연맹 여성 간부에게 성 희롱으로 간주될 수 있는 행위를 저질렀다. 당시 피해자는 ㅂ씨가 자신에게 성적 모욕감을 느낄 정도의 발언을 하고, 어깨에 손을 얹는가 하면, 집앞까지 쫓아오며 자신을 위협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금속연맹은 성 희롱 관련 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ㅂ씨는 자진해서 보직을 사퇴했다.
결국 나선 것은 진보 진영에서 일하는 여성 활동가들이었다. 서울여성노조·여성활동가모임·성폭력근절연대회의…. 앞서의 보건의료노조 사건 공동대책위에서 만난 이들 여성·인권 단체는, 지난 6월 급기야 장 원 교수 사건이라는 ‘지뢰’가 터지자 가칭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위원회’(100인위원회)를 결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성 폭력 자체도 문제지만 성 폭력 사건을 처리하는 운동 조직의 방식에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었다.

이들에 따르면, 성 폭력 사건에는 어김없는 공통점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를 부인하거나 왜곡하며, 만취해 기억에 없다고 한다. △가해자의 부인과 가족은 예외 없이 피해자를 비난하며 가해자를 비호한다. △고통이 가중된 피해자는 활동을 중단하며, 가해자는 일정 시간이 흐른 뒤 활동에 복귀한다.

실제로 가해자들이 ‘술에 취해 기억이 안난다’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발뺌할 때마다 여성 활동가들은 “지겨워, 또 그 타령이야”라고 비명을 지른다. 발뺌을 넘어 도리어 성을 내는 ‘철면피’도 적지 않다. 진보적인 언론 매체로 손꼽히는 한 신문사에서는 3년 전 취재 기자인 ㄱ씨가 한밤중에 여기자 휴게실에 잠입한 사건이 있었다. 여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진상 파악에 나서자 문제의 기자는 ‘치사하다’며 사표를 제출했다. 남편을 감싸는 ‘한국판 힐러리’ 또한 도처에 널려 있다. 앞서의 현대자동차 노조 간부 ㅂ씨의 아내는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울분을 터뜨렸다. ‘만취가 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을 놓고 성희롱으로 단정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상황이 심각해도 운동 조직은 피해자를 나몰라라 하기 일쑤였다. ‘사건이 알려지면 적에게 유리할 뿐’이라며 피해자를 설득하려 드는 조직은 그래도 양질인 편이었다. ‘조직에 누를 끼치고 당신은 남아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며 피해자를 몰아세우는 조직, ‘일부 세력이 성(性)을 무기로 노조 지도부를 거세하려 한다’는 음모론을 퍼뜨리는 조직, ‘총파업이 내일 모레인데 이런 문제로 적전 분열될 수는 없다’며 성 폭력을 주변적이고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는 조직. 이들 모두가 여성 활동가로서는 ‘2차 가해자’이자 타협할 수 없는 적이었다.

11월 말 현재 100인위원회에 가입한 여성 활동가는 70명에 이른다. 단 회원 명단은 공개하지 않는다. ‘위원회 발족과 동시에 진보 진영 내 성폭력 가해자 명단을 실명으로 공개하겠다’는 방침이 알려지면서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딴죽을 거는 세력이 늘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100인위원회 소속임을 밝히려면 동성애자가 커밍아웃하는 것과 비슷한 용기를 내야 하는 조직도 적지 않다”라고 이 모임 회원 엄혜진씨(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는 말했다.

이들이 발표할 명단에 누가, 몇 명이나 포함되어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명단 발표 시기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회원 간에 선정 기준을 합의하는 문제만 남아 있을 뿐 명단에 오를 후보는 이미 충분히 확보한 상태이며, 이 중에는 ‘깜짝 놀랄 만한 진보 진영의 대표격 인사’‘평소 페미니스트인 양 일반인을 현혹한 유명 진보 인사’도 포함되어 있다고 100인위원회 관계자는 말했다.

물론 100인위원회의 활동 방식에 대해 ‘음모론적 피해 망상’‘무차별식 폭로주의’라는 비판도 있다. 특히 이 모임이 ‘피해자 동의 없이도 사건을 공개한다’는 원칙을 표명하자 논란이 더 거세졌다. 그렇지만 사건을 덮어둘 경우 제2, 제3의 피해자가 속출하는 것이 성 폭력 사건의 특성인 만큼 정황 증거만 충분하면 사건을 공개하겠다는 것이 100인위원회의 입장이다.

성평등 관점에선 ‘보수’ ‘진보’ 구분 무의미

이들은 무엇보다 가해자 명단 공개가 ‘적’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주장에 단호하게 맞선다. 100인위원회 회원 정주연씨(여성활동가모임)는 ‘우리가 보호해야 할 진보는 어떤 진보인가’라는 질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성평등 관점을 적용하면 기존 보수·진보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성(性)의 문제로 돌아오면 진보 진영 또한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가부장적·군사주의적이라고 정양희 위원장은 비판한다. 한 예로,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 60만명 중 여성 비율은 18%에 이르지만 의결 기구에서 여성 간부 비율은 여기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대의원대회 6.24%, 중앙위원회 6.97%, 중앙집행위원회 4.34%). 그렇다면 판을 뒤엎기 위해 가해자 실명제는 비켜갈 수 없는 고육지책이다. 제 살을 찢는 아픔으로 치부를 공개하지 않고서는 운동권이 거듭날 수 없다는 이들의 외침이 진보 진영에 거대한 회오리를 몰고 올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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