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따라 춤추는 석유사업기금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0.10.0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 · 6공 땐 비자금, 그 뒤엔 선심용… 한국석유공사 사장 자리는 퇴역들의 안식처
국제 유가의 상승 곡선이 가파르다. 낙관론과 비관론이 교차하는 가운데 이에 적절히 대비하지 못한 우리 정부를 성토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정부가 기름값 인상이나 전기료 인상 등 국민에게 부담을 지워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생긴 문제인데 왜 국민이 고스란히 그 부담을 떠안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정부가 왜 고유가 시대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에너지 정책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한국석유개발공사(현 한국석유공사)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석유개발공사(석유공사)의 역사는 곧 정부가 석유 문제에 대응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1·2차 석유 파동을 겪은 후 우리 정부는 에너지 안보가 국가 안보에 필수라고 판단하고 1979년 석유공사를 설립했다. 석유공사의 임무는 해외 자원 개발, 비축 사업, 유통 구조 개선, 유가 예측. 정부는 이를 위해 석유사업기금도 따로 조성해 주었다.

석유공사의 초대 사장으로는 외무부장관을 지낸 김동조씨(1979∼1980)가 임명되었다. 중동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회복을 통해 석유 파동을 극복한 정부는 ‘에너지 문제는 정치·외교 문제’라고 인식하고 외교 전문가를 사장으로 선임했다.

낙하산 인사 하이라이트는 이원조 사장

그러나 석유공사는 이후 다른 공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낙하산 인사에 시달렸다. 주로 정권과 가까웠던 인물들이 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유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한 축은 동력자원부(현 산업자원부) 퇴직 관료들이었고, 다른 한 축은 은퇴한 군장성들이었다.

4대 유각종 사장(1990∼1993)과 5대 장석정 사장(1993∼1998)은 전형적인 퇴직 관료이다. 둘 다 동자부 출신으로 각각 차관과 기획관리실장을 지냈다. 유씨의 경우 차관 직에서 퇴임하고 나서 10년이나 지난 뒤에 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그가 ‘평통 자문위원회 상임위원’을 맡으면서 정권과의 끈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석정 사장은 퇴임후 S-oil사의 해외법인 사장으로 취임했다. 석유공사 사장 중에 관련 민간 기업으로 간 사람으로는 장씨가 유일하다. 장씨가 민간 기업으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동자부 자원개발국장과 자원정책실장 등 요직을 거쳐 인맥이 탄탄했기 때문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친한 사이로 알려진 3대 최성택 사장(1986∼1990)과 지금의 나병선 사장(1998년 취임)은 3성 장군 출신들이다. 이들도 모두 정권과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나사장이 임명되었을 때, 낙하산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직원들은 그를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박진호 노조 부위원장은 “공기업 구조 조정의 칼바람이 불던 때여서, 현정부 실세인 그가 바람막이가 되어주리라 기대했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14대 국회의원이었던 나사장은 국민회의 총재특보와 당무위원을 거친 여당 중진이었다.

석유공사 낙하산 인사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2대 이원조 사장(1980∼1986)이다. 5·6공 비리의 핵심으로 ‘금융계의 황제’라고 일컬어지는 이씨는 연임을 해 6년 동안 사장으로 재임했다. 그가 사장으로 임명되었을 때의 나이는 47세.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시중 은행의 부장이었다. 보통 공기업 사장 자리가 퇴물 관료나 정치인에게 돌아가는 것에 비하면 이씨의 취임은 상당히 유별났다.
그가 석유공사 사장에 임명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석유공사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막대한 석유사업기금을 이용해 정치 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금을 은행에 예치하고 재예치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막대한 기금은 은행측에 상당히 매력적인 돈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대출 압력을 행사하면서 정치 자금을 끌어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에너지 안보를 위한 기금이 정치 자금 마련을 위한 종자 돈이 된 셈이다. 퇴임 후에 그는 은행감독원 원장에 취임했다.

이씨의 이러한 행태는 석유공사에 씻을 수 없는 원죄를 안겼다. 김영삼 정부 들어 석유사업기금이 정치권의 젖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기금 운용 주체가 정부로 넘어갔다. 석유사업기금은 다른 몇 가지 기금과 함께 1995년부터 ‘에너지 및 자원사업 특별회계’(에특회계)로 통합되었다. 독자적인 예산권을 잃은 석유공사는 이로써 에너지 정책의 주체에서 객체로 처지가 바뀌게 되었다. 단지 주어진 예산에 맞게 집행하는 기관으로 전락한 것이다.

석유사업기금이 에특회계로 바뀌면서 운용의 투명성은 높아졌다. 그러나 에너지 정책이 독자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정부 예산 정책의 기조에 따라 결정되자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났다. 예산이 해외 유전 개발이나 석유 비축 사업 등 에너지 관련 사업보다 다른 목적에 전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정치적 목적으로 전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석탄산업지원기금이다. 1979년에서 1994년까지 조성된 석유사업기금 9조2천5백64억원 중에서 석탄산업지원액은 전체의 18.4%였다. 그러나 에특회계로 바뀐 다음 1995년에서 1999년까지 조성된 8조3천8백82억원에서 석탄산업지원액은 전체의 32.3%로 배 가까이 늘었다. 반면 석유비축사업비나 유가완충기금은 각각 15.7%에서 9.5%, 13.3%에서 6.7%로 줄었다.
석탄산업지원금은 주로 폐광·무연탄 생산 지원, 폐광지역 경제 활성화 등 ‘석탄산업 합리화’ 명목으로 쓰였는데, 대부분 회수가 잘 안 되는 소모성 자금이다. 지원금은 피폐해진 폐광지역 민심을 수습하려는 정치적 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정치인들이 주인 없는 돈으로 너무 생색을 내고 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고 있다”라고 말하며 사업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석유공사의 한 관계자도 “피폐해진 탄광촌의 활성화 대책을 세우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예산의 쓰임에 대한 경중과 선후에 대한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에너지 기금으로 에너지 낭비 산업 키워

특히 탄광촌에 카지노와 리조트를 건설하는 사업에까지 자금을 지원하고 있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최기련 교수(에너지경제학 박사)는 “에너지를 흥청망청 탕진하는 사업을 하라고 에너지기금을 대주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라고 말하며 적절하지 않은 쓰임이라고 말했다(호텔 건물은 가장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건물 중 하나이다. 실례로 호텔롯데의 1년 전력 사용량은 6천8백73만5천kW로 일반 가정 2만8천 가구가 사용하는 양과 맞먹는다).
사실 현정부도 탄광 지원에 공을 들이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민주당은 지난해 12월, 석탄산업지원금으로 1조원을 추가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또 총선 전에는 2001년까지 해산하도록 되어 있던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을 2005년까지 연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때문인지 지난 4·13 총선에서 민주당은 강원도에서 선전했다. 태백·정선 선거구에서 김택기 의원이 당선되는 등 전체 9석 중에 5석을 민주당이 차지했다.

에특회계가 이렇게 엉뚱한 곳에 쓰이고 있는 동안 정작 돈을 써야 할 곳들은 예산이 부족해 허덕이고 있다.

해외 유전 개발 사업이 그렇다. 수입 원유 중에 우리가 직접 개발한 원유(자주개발 원유)가 차지하는 비율은 1.7%로 일본의 15.3%에 비해 턱없이 낮다. 이런 결과를 두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들인 돈을 감안한다면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일본이 석유 개발에 쏟아부은 돈은 우리보다 20배 정도가 많다.

예산이 부족해 정부가 전략비축유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것도 문제이다. 우리의 비축 시설은 9천6백만 배럴을 저장할 수 있는 규모인데 비축량은 5천8백만 배럴에 불과하다. 3천8백만 배럴 규모의 비축 시설이 놀고 있는 것이다. 석유공사는 고육책으로 해외 석유회사에 비축 시설을 대여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석유공사는 노르웨이의 국영 석유회사 Statoil사와 8백만 배럴 규모의 저장 계약을 체결했다.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갈팡질팡하는 동안 수혜자가 되어야 할 국민은 또다시 소외되고 있다. 에특회계는 원유를 수입할 때 붙는 석유 수입 부과금이 주 재원이다. 이 돈은 국민이 정부로 하여금 에너지 위기에 대비하고, 가격이 오를 때 가격 안정을 이루라며 기꺼이 내어 준 돈이다. 그런데 정부는 수혜자가 되어야 할 국민에게 오히려 또 돈을 내 놓으라며 손을 벌리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