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과 김운용, ‘배’가 맞았다?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3.12.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먹 거물들, 이권 널린 태권도협회 몰려…“김씨, 조직 장악 위해 ‘어깨’ 활용”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동호인을 보유한 체육 종목은 태권도다. 대한태권도협회(대태협)에 따르면 국내외 태권도 인구는 5천만명. 한국 사람치고 태권도 한 번 안해 본 사람이 없고, 남자는 군대에 가면 모두 유단자가 되니 그리 과장된 숫자도 아닐 것이다.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이 설립된 후 꾸준히 성장해온 태권도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명실상부한 세계적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이런 대한민국 대표 상품, 국기(國技) 태권도를 폭력계 대부들이 좌지우지해온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대태협 이승완 상임 고문(63)과 박종석 전 전무(60·본명 박 익) 그리고 한용석 전 부회장(63)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협회 요직을 차지하고 스포츠 행정가로 나섰지만, 틈만 나면 ‘조폭 본색’을 드러냈다. 검찰 조사 결과 이들은 대태협 내에서 태권도 유단자들을 상대로 폭력과 갈취 등을 서슴지 않았고, 회장 선거 과정에서는 폭력배와 태권도인을 동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민속씨름협회 부회장을 지낸 이강환·최창식, 아시아아마추어복싱연맹 부회장을 지낸 김옥태 등 조폭 출신 거물이 경기단체 임원을 지낸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태권도처럼 최근까지 거물급 조폭들이 협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 대태협 인사는 “지방 협회로 갈수록 조폭 출신 태권도인의 수는 늘어난다. 최고의 무도인들이 깡패들에게 잡혀 있다”라고 말했다.

대태협 2인자 이승완, 대표적인 전국구 주먹

김운용 IOC 부위원장을 제외하고 대태협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던 이승완씨는 호남 조폭의 대부로 통하며, 전국구 주먹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거물이다. 1970년대에 서울로 진출한 이씨는 일명 ‘용팔이 사건’이라고 불리는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했고, 1988년에는 월드컵파·수원파·창조파 두목 등 거물 폭력배와 운동 선수들을 모아 우익 단체를 표방한 ‘호청련’을 결성했다. 이씨는 조폭 선후배들 사이에 신망도 두터워 세력 쟁탈 전쟁을 벌이던 양은이파 조양은과 서방파 김태촌의 화해를 주선하기도 했다. 그의 힘은 국산양주 주류판매조합장을 맡아 주류 도매상을 장악하고 유명 호텔 나이트클럽을 운영해 얻은 막대한 부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주고등학교 태권도 선수 출신인 이승완씨는 1990년대 중반까지 태권도 지도관 관장을 지내면서 태권도와 인연을 맺기는 했으나, 협회 일과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그러다 1996년 삼성 이필곤씨가 대태협 회장을 맡자 협회 부회장에 오르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한때 이씨는 대태협 개혁파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지만, 김운용씨와 타협한 뒤로 그의 대리인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이씨는 지난해 9월께 ‘전자 호구’ 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와 과학기술장학재단 관계자를 협박해 8억원을 빼앗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전 대태협 전무 박종석씨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서울시 태권도협회장의 측근으로 활동하다 2001년 김운용씨에 의해 전무로 영입되면서 대태협과 인연을 맺었다. 박씨는 2001년 10월 김운용 당시 대태협 회장이 자신을 축출하려 하자 태권도인 100여 명을 동원해 대의원 총회를 무산시켜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목포 출신인 박씨는 번개파를 결성해, 서울에서 호남 주먹 전성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1970년대 말 명동 사보이호텔에서 신상사파에 치명타를 안긴 조양은이 당시 ‘모시던’ 사람이 바로 박씨였다. 박씨는 1988년 일본 야쿠자와 칠성파 이강환이 의형제를 맺는 사카즈키배 의식에 범호남파 회장 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또 1989년에는 경기도 파주의 한 기도원에서 휘하에 있던 서방파 김태촌 등 조폭 3백여 명을 모아 ‘신우회’를 결성했다.

박씨는 본명이 박 익이지만 그동안 철저히 박종석으로 살아왔다. 그의 지인들조차 본명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박씨는 자신의 은행 계좌는 전혀 이용하지 않을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썼다. 또 한 달에 한두 번씩 휴대전화를 바꾸고, 심지어 운전기사를 제외하고는 집을 아는 사람이 없을 만큼 철저했다. 이승완씨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박종석은 공소 시효가 끝날 때까지 도망다닐 사람이고, 국내에 있으면 산 속에라도 숨어 있을 인물’이라고 했다. 1990년대 초반 박종석은 검찰의 수사망을 피해 산 속 움막에서 살았다고 한다.

지난 10월 초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된 직후 박씨는 미국으로 피했다. 그는 현재 미국으로 도피해 있는 조폭 두목 오기준씨와 친하고, 경희대 체육학과 출신으로 LG스포츠단 단장을 지낸 정학모씨와도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다.

전 태권도협회 부회장 한용석씨는 충청 지역의 유명한 사업가이다. 하지만 검찰은 한씨가 대전·충남 지역의 폭력 조직인 옥태파와 족제비파 등을 휘하에 거느리며 대전과 충남 지역 폭력 조직의 대부로 군림해 왔다고 밝혔다. 한씨는 이태원과 대전에 호텔을 소유한 상당한 재력가인데, 속리산카지노 사건으로 이승완·정덕진과 함께 처벌받기도 했다.

구천서씨를 회장으로 옹립할 때처럼 이들은 때에 따라 손을 잡기도 했지만 평소에는 묘한 경쟁 관계였다고 한다. 지난해 국기원 이사회에서 이승완과 박종석, 이승완과 한용석은 멱살잡이와 주먹다짐을 벌였다. 이승완은 ㅌ신문, 박종석은 ㅇ신문 등 태권도 전문지를 만들어 경쟁하기도 했다.

그러면 폭력계 대부들이 대태협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태권도인들은 이에 대해 태권도가 저변이 넓어 다양한 사업이 가능하고, 승단(승급)·용품·도장 경영 등 이권을 챙길 부분이 많다는 점을 꼽는다. 다른 경기보다 대회가 자주 열리고, 실업팀·도장 운영·경호 회사 등 진로가 다양하다는 점 또한 조폭들이 꼬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서울지검 김홍일 강력부장은 “폭력배들이 태권도계에 진출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돈벌이를 했다”라고 말했다. 대검 강력부장인 조승식 검사장은 “운동을 하다 그만둔 사람들 가운데는 깡패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쪽 세계에 가서 돈을 번 깡패들은 그럴싸한 공식 직함을 원한다. 태권도 단체는 지역에서 유지 대접을 받는 이점도 있어 깡패들이 선호했다”라고 말했다.

조폭들이 대태협으로 몰려든 것은 김운용씨의 용인술 탓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다. 김운용씨가 자기에게 충성하고 이용하기 좋은 조폭 출신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김운용씨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정학모씨를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실패로 인해 문책론이 나올 당시 김운용씨는 이승완을 보디가드로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대태협 전 임원인 강원식씨는 “조폭 인사들을 누가 끌어들였는지 몰라도 결정을 내린 사람은 김운용씨이므로 책임도 그가 져야 한다. 김씨는 그들을 이용해 일을 처리했다”라고 말했다.

김운용, 충성하는 ‘어깨’들 끝까지 챙겨

김씨가 2인자들을 경쟁시켜 자기 체제를 확고하게 다지려고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김씨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충성만 하면 끝까지 책임지고 대우했다. 대태협의 한 관계자는 “대태협과 국기원 간부들의 급여는 체육 단체 중 최고 수준으로 대기업을 능가했다. 보너스 700% 이상에 전무 연봉은 판공비를 합해 1억2천만원이 넘었다”라고 말했다.

반면 김운용씨는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에게는 태권도계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가혹하게 보복했다고 한다. 서울 지역의 한 태권도장 관장은 “승급·승단 시험에서 물을 먹이고, 대회에서 편파 판정으로 도장의 문을 닫게 만든다. 태권도학과 교수나 강사도 그의 뜻을 거스르면 자리를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태권도계 인사는 “30여 년 동안 김운용에 대한 비판은 신성 모독과도 같았다”라고 말했다.

협회 일각에서는 조폭 출신 간부들이 대태협에 해를 끼친 것은 별로 없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대태협 간부는 “김운용 때문에 그 사람들이 희생양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