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해방촌'' 만든 무술목 청소년 축제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0.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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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목 청소년 축제, ‘문화 해방촌’역할 톡톡
밀레니엄 베이비 탄생, 새 천년 첫 결혼, 해맞이 관광 등 이른바 밀레니엄 이벤트로 세상이 떠들썩했던 지난해 12월31일 밤.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굴전마을 무술목 해변에서 수많은 청소년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21세기를 맞았다. 해질 무렵부터 숨가쁘게 춤과 노래와 영화가 한데 어우러진 그들만의 축전이었다.

‘무술목 청소년 축제 2000’이라는 이름으로 13~19세 청소년 축전이 진행된 무술목은 임진왜란 마지막 해인 무술년(戊戌年·1598년)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선 60여 척과 왜군 3백여 명을 섬멸한 승전지이자 동백꽃 군락지로 유명한 바닷가 유원지이다. 특히 무술목은 남해안 최고의 해돋이 장소인 향일암으로 가는 길목인데다 독특한 지형 때문에 화려한 일몰과 장엄한 일출을 함께 볼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전라남도(도지사 허경만)가 처음 개최한 청소년 축전은 해질 무렵인 1999년 12월31일 오후 5시부터 일출 시각인 2000년 1월1일 오전 7시30분까지 장장 14시간 넘게 진행되었는데, 그 흔한 연예인 한 사람 초청하지 않았는데도 5천여 청소년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연말이면 호프집·게임방을 전전하는 청소년들의 문화적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 영화·애니메이션·컴퓨터 게임·노래·댄스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청소년들의 ‘끼’를 마음껏 발산하도록 ‘문화 해방촌’을 조성한 덕분이다.

무술목 해변에는 공연을 펼칠 수 있게끔 대형 무대가 설치되었고, 2백여 평 규모 ‘사이버 돔’에 PC 70여 대를 설치해 인터넷 게임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14시간 동안 논스톱으로 단편 영화를 볼 수 있는 상영관도 마련했다. 주최측은 또 본선에 진출한 참가 팀에 참가비를 제공하고, 장애인과 불우 청소년 3백50명을 초청해 또래들의 재능과 끼를 감상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의전과 식순에서 단체장들의 의례적인 인사말도 제외했고, 따뜻한 물과 차를 무료로 제공했다. 먹거리를 파는 가게로는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분식집 몇 곳만 허가했으며, 추위에 지친 청소년들을 위해 군부대가 텐트를 마련했다.

이렇게 마련된 무술목 해변 축전에서 청소년들은 자기가 안무한 춤을 선보이며 연예인 못지 않은 솜씨로 대형 야외 무대를 장식했다. 춤과 노래에 지친 청소년들은 영화 상영관에서 단편 영화를 감상하거나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며 밤을 지새웠다.

이처럼 자기들의 끼와 재능을 마음껏 펼칠 멍석을 깔아주자 대중 문화의 가장 큰 소비자이면서도 자신들의 문화를 펼쳐 보이는 데 소극적일 수밖에 없던 청소년들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자신들의 문화를 선보였다. 쉬는 시간에 교실 한 구석에서 춤판을 벌이거나 방문을 잠그고 거울을 바라보며 춤을 추던 청소년들이 또래 집단 앞에서 마음껏 기량을 펼쳐 보인 것이다.

밤 새워 록밴드 공연과 또래들의 춤과 노래에 열광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은 마치 콜라텍이나 록 카페를 무술목 해변에 옮겨놓은 듯했다. 학부형과 교사들이 청소년의 끼와 재능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도 여느 청소년 축전과 다른 면모였다. 경남 김해에서 참가한 이승우군(16)은 “행사 수준이 우리들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과 맞는다. 댄스 경연이 특히 재미있었다”라며 즐거워했다. 축전 행사 가운데 단연 으뜸은 댄스 경연이었다.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단계를 넘어 스스로 자신들의 춤에 맞는 노래를 창작하거나 편곡한 팀이 대다수였고, 테크노·재즈 등 온갖 장르가 망라되었다. 이들은 구성원 모두가 유니폼을 맞추어 입고 자신들의 춤 세계에 빠져드는 등 전문 연예인 못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댄스 경연에서 대상을 차지한 서울·경기 연합팀 ‘Locking’의 김정석군(17)은 “직접 안무하는 팀이 늘었고, 수준이 모두 뛰어나다. 무술목 축전이 다른 댄스 팀들의 기량과 수준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대형 조명이 무술목의 해변을 밝히는 동안 사이버 돔에 마련된 DDR 기계 앞에는 청소년들이 끊임없이 줄을 섰다.

사이버 경진대회는 <스타크래프트> 게임 올림픽과, 주어진 문제의 답을 인터넷으로 찾아 텍스트 파일로 제출하는 정보사냥대회, 해양 관광을 주제로 한 홈페이지 만들기, PC 조립 대회 등으로 다양하게 치러졌다. 특히 <스타크래프트> 게임 결승은 대형 멀티비전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영화 마니아들은 또래들이 직접 제작한 청소년 창작 영화·단편 영화·애니메이션을 감상했다. IMF로 아버지가 실직한 가정의 힘겨운 노력을 그린 영화와 왕따 현상을 그린 영화들이 특히 호평을 받았다.민·관이 함께 상업성과 선정성 배제

무술목 청소년 축전이 이색적이면서도 내실 있게 치러진 데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다른 밀레니엄 잔치들과 성격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우선 연예 기획사에 위탁하지 않고 민·관이 힘을 모아 내용 면에서 상업성과 선정성을 철저히 배제했다. 유명 연예인 대신 청소년들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고른 언더그라운드 그룹 ‘8·15’와 ‘네이키드’ 등 인디밴드가 초대되었다. 무술목 축전 홍보실장 정연승씨(29)는 “청소년들이 주위 시선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들의 정서와 문화를 만끽하며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했다”라고 밝혔다.

청소년들의 관심 분야를 망라한 종합 경연 대회로 진행된 무술목 축전은 행사가 열리기 전부터 청소년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부문별 대상 수상자에게는 문화관광부장관과 교육부장관이 주는 상패와 100만원 상금이 주어졌다. 공부를 못하더라도 춤 하나로, 노래 하나로 청소년기를 보내는 마니아들에게는 더없는 축복이자 대학 진학에도 유리한 ‘경력’이었다.

전국 각지 중·고등학교 동아리들이 학교 지원을 받아 지역 예선에 참가했는데 신청자만 3천2백 여 명이 넘었고, 인터넷 홈페이지 조회 수는 2만5천회를 기록했다. 댄스 경연 분야에는 전국에서 무려 5백35개 팀이 참가를 신청해 시·도 별로 예선을 거친 20개 팀만이 본선에 올랐다.

무술목 축전 뮤직 페스티벌 분야에서 대상을 받은 공주 금성여고 그룹 사운드 ‘금성 21’을 지도한 이종철 교사는 “물가를 잡자는 사회성 짙은 곡으로 대상(교육부장관상)을 받아 지금 공주 시내가 떠들썩하다. 학생들이 재능을 펼쳐 보일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무술목 축전 집행위원회는 앞으로 댄스·음악·영화 등 부문별 대상 수상자들을 2010년 세계박람회 홍보 사절로 위촉해 여러 나라의 축전과 문화 현장을 둘러보게 할 예정이다. 아울러 영화제 대상 수상 팀에는 제작 지원비 3백만원을 주고, 미술·사진·영상 작품은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전시회를 가질 계획이다.

집행위원회는 또 애초 2년에 한 번씩 비엔날레로 계속할 것을 검토했으나, 이번 ‘성공’에 힘입어 매년 5∼6월에 개최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키로 했다. 청소년들이 ‘동아리 후배들을 교육해 다음 기회에 꼭 도전하겠다’ ‘2회 축전에도 꼭 참가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의견을 인터넷에 계속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집행위원회는 특히 단편영화제 부문을 아시아권을 포괄하는 세계적인 청소년 영화제로 만들기 위해 연구 중이다.

새천년준비위원회가 12월31일 밤 광화문에서 폭죽과 전광판 쇼로 소비한 예산은 37억원. 그러나 무술목 축전은 6억원으로 전국 청소년들의 꿈과 창조적 에너지를 승화시킨 실험적인 무대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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