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차별, 법률로 보장되었다?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1999.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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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전에 ‘남성 위주’ 조항 수두룩…법 적용·해석에서도 불평등 사례 많아
이 법률들은 큰 논란 없이 개정 및 제정되었으나 한 가지 법률만은 그렇지 못했다. 바로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안(47쪽 상자 기사 참조). 이 법은 12월24일 우여곡절 끝에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지만,이 과정에서 양성 평등을 저지하려는 남성 중심 사회의 편견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90년대에는 여성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법이 많이 바뀌거나 만들어졌다. 하지만 상징적 의미만 클 뿐 법의 이행력과 규제력은 매우 취약했다. 법조문부터 차별적인 법이 적지 않다. 여성계는 한국의 육법 전서에 여전히 성차별적인 조항이 우글거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성별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다’는 헌법(11조)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법은 ‘남성 천국’…헌법 정신 위배

우선 가족법. 가족법은 58년에 제정된 민법의 제4편(친족)과 제5편(상속)을 통칭하는 용어로 친족·호주·가족·혼인·상속 관계 등을 규율하는 법률이다. 가족법에 왜 성 차별적인 조항이 많은가? 중국의 가(家) 제도라는 부계 혈통 중심의 가족 제도에 기초한 데다 일본의 천황제 ‘가족 국가론’의 이데올로기가 가미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족법에는 여성들의 인권이 설 자리가 없다. 호주제가 좋은 예다. 여성은 남성 호주 승계인이 없을 경우에만 승계인이 될 수 있다 (984조). 70대 할머니가 핏덩이 손자보다도 법적 지위가 낮아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과 조화될 수 없다. 남편이 처가에 들어가는 입부혼인 경우는 예외이지만, 여성은 결혼하면 남편의 가에 입적해야 한다(826조 3항).

부부가 둘 사이에 낳지 않은 아이에 대해서도 법은 남녀를 다르게 취급한다. 남편은 아내가 낳지 않은 아이를 동의 없이 입적시킬 수 있지만, 아내는 남편의 동의와 그 아이의 호주 동의를 얻어야 한다(784조). 여성의 부모로서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또 아이들은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고 입적해야 한다(781조). 아버지를 모르거나 아버지가 처가에 입적한 경우만을 예외로 두어 어머니 중심의 가정을 비정상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혼 후 여성이 친권과 양육권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머니는 동거인일 뿐 아이들은 아버지 호적에 남아야 한다. 이처럼 국가 공권력에 의해 이상적인 가족상을 제시하는 민법이 부부가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여성, 특히 어머니의 법적 지위를 형편없이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화숙 교수(경원대·가족법)는 “호주제가 형해만 남았다고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기능하는 파괴력은 여전하다. 부계 혈통 중심의 호주제와 호적법(민법의 절차법)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한국 사회에 종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물결을 주도해 왔다”라고 지적한다. 물론 호적이 주민등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신뢰성이 높은 신분 증명 자료이며, 그것을 일시에 바꿀 때 엄청난 돈이 든다는 현실적 어려움을 감안하면, 호주제 자체를 폐지하기보다 문제가 되는 조항을 평등하게 바꾸는 것이 현명하다는 주장도 없지는 않다(최금숙 이화여대 교수).

호주 제도는 세법이나 각종 사회보장법 그리고 국제 사법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세기본법(74년 제정)은 성 중립적인 색채를 띠고 있지만 유독 친족의 개념에서는 옛 민법의 영향을 받아 차별적이다. 이 법 39조는 출자자의 제2차 납세 의무자인 과점 주주를 구성하는 친족 기타 관계인의 범위를 시행령 20조에서 모계 혈족보다 부계 혈족을 더 넓게 잡고 있다. 남녀를 달리 취급하는 것이다. 주주가 결혼한 여성인 경우 그 남편과의 관계에 의하여 친족을 정하도록 한 규정도 성 차별적이다.

여성에게 실질적 영향력이 큰 법인 상속세법도 마찬가지다. 명시적으로 남녀에게 다른 규정을 두거나 결과적으로 여성에게 불리한 규정을 두고 있다. 가령 상속세 과세 가액에 포함되지 않는 재산 범위를 정하는 기준의 하나로 성별을 포함한다거나(시행령 3조), 공익 사업의 요건을 구성하는 특별한 관계에서 모계 혈족보다 부계 혈족의 친족 범위를 넓게 잡고 있는 것이다.

법 밖의 현실은 더욱 열악하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부모들은 딸보다 아들에게 더 많은 재산을 물려준다.부부가 혼인 기간에 공동으로 모은 재산의 경우도 비슷하다. 민법은 부부 한쪽이 결혼 전 모은 재산을 인정하는 부부재산계약제(829조)나 결혼 생활 중에 자기 명의로 취득한 재산을 별도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부부별산제(830조)를 택하고 있지만 여성에게는 없는 것과 진배없다. 현실은 같이 모은 재산이라도 거의 남편 명의로 해 놓기 때문에 남편의 재산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아내는 이혼하거나 또는 상속할 때 매우 불리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 가령 이혼할 때 여성이 행사하는 재산 분할 청구권의 경우 현재까지의 판례를 보면 남편으로부터 많아야 40% 선의 재산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이 분할 비율에서 전업 주부는 가사 노동의 가치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맞벌이 주부보다 더욱 불리하다. 최금숙 교수(이화여대·재산법)는 “우선 재산을 부부 공동 명의로 해 놓는 것이 중요하다. 또 별산제 자체가 부부의 재산 축적에 대한 공동 노력을 반영하지 못하므로 민법 830조를 개정해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혼인 중 부부 한쪽 명의로 취득한 재산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부부 중 한쪽이 아니라 부부 공동 소유로 표현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열등한 존재인 여성은 사회에 나와서도 비슷한 대접을 받는다. 국민연금법은 성 차별의 냄새가 강하다. 유족 연금 지급의 경우, 아내가 유족 연금을 받을 때는 아무런 요건을 두지 않지만 남편에 대해서는 그가 60세 이상이거나 2급 장해자여야 한다(63조). 이 조항은 얼핏 여성에게 유리한 것 같지만, ‘남성=경제 활동자,여성=생계 의존자’라는 사회 통념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가정 내의 성별 역할 분리를 정상적이며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독신·맞벌이 부부 등 새로운 유형의 가족 형태를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이번 정기 국회에서 ‘혼인 기간이 5년 이상인 자가 이혼한 경우 배우자가 분할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조항이 새로 생겨 이혼자에 대해서는 다소 보완 조처가 이루어졌다. 사회 복지 전문가들은, 여성의 취업 구조로 보아 연금 혜택에서 소외되어 있는 여성이 많은 데다 국제적으로도 여성에 대한 독립 수급권을 인정하는 추세를 감안해,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으로 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유족 연금 수급권자인 처가 18세 미만 혹은 장해 등급 2급 이상의 자녀와 생계를 같이 하지 않을 때는 50세 이전이라도 유족 연금 지급을 정지하도록 되어 있다(66조). 여성의 경제 능력의 한계를 50세로 보고 있는 것이다(생활보호법에도 50세 이상의 여성을 근로 능력이 없는 자로 보고 있다). 아들이나 손자는 결혼해도 연금 유족 수급권을 그대로 갖지만 딸이나 손녀에 대해서는 그 권리가 소멸되는 것도 명시적인 성 차별 규정이다. 소득과 부양 요건에서 성별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정하고 있는 의료보험법이나, 여성 피보험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되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경우도 국민연금과 엇비슷하게 차별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장해 등급을 정하면서 양쪽 고환을 잃은 남자와 얼굴에 뚜렷한 흉터가 남은 여자에게 같은 등급(7급)을 매긴다는 사실이다. 남성에게는 성 기능을, 여성은 외모를 중시하는 현행 법의 가부장적 시각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대목이다(근로기준법 시행령 59조에도 똑같은 규정이 있다). 이밖에 국제 사법, 국가 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등에서도 성차별적인 조항이 적지 않다.

법 조문 자체는 아니지만 사법부나 검찰의 법 적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법 실무 차원의 차별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형법의 강간죄이다. 한국 사법부는 강간범에게 관대하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형법 297조에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문제는 강간죄 성립 조건인 가해자의 폭행 또는 위협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피해자인 여성(부녀)은 ‘죽을 정도로’저항했다는 것을 법관에게 입증해야 비로소 가해자를 강간범으로 처벌할 수 있다.

△피해자가 가능한 모든 수단과 기회를 이용하여 구조 요청을 했는가 △모르는 사람이었는가 △성교 후에 말을 했는가 따위의 판단 정황들도 여성에게는 불리하게 적용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의붓아버지로부터의 강간 같은 가족 내 성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낯선 사람보다 아는 사람으로부터 강간당하는 경우가 많은 현실을 사법부가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영란 교수(숙명여대·형법)는 “강간 범죄에 관한 한 사법부의 태도는 법의 형식 논리에 얽매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라고 주장한다.

수센 에스트리치 교수(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 법률센터)는 하버드 대학 교수 시절인 86년 〈진짜 강간(Real Rape)>(‘법 앞에 불평등한 여성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음)이라는 책에서 자신이 강간당했던 체험을 기초로 강간죄가 미국의 수사 및 기소, 재판 과정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경찰과 법원의 판단과는 반대로, 낯선 사람에게 흉기로 위협받거나 2명 이상의 남자에게 윤간당한 ‘가중 강간’만이 강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는 사람에게 큰 폭행 없이 당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명백히 강간이며, ‘단순 강간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진짜 강간’이라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같은 비판에 따라 미국은 거의 모든 주에서 몇년 전부터 저항 수준을 ‘최후 순간까지’에서 ‘합리적 수준’으로 누그러뜨렸다. 뉴욕 주는 더 나아가 가해자의 강제력 사용이 인정되면 피해자의 저항 유무와 상관없이 강간죄를 인정하고 있다. 현실적 저항이 없었더라도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이 입증되면 강간죄를 인정하고 있는 독일과 비슷해진 것이다. 강간죄의 보호 법익이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기 때문이다. 박상기 교수(연세대·형법)는 “여성이 동의하지 않는 어떠한 형태의 강간도 처벌해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올해는 헌법이 제정된 지 50년. 그동안 그야말로 ‘남성의 갈비뼈 수준’이었던 여성의 인권이 많이 신장된 것은 틀림없다. 특히 80년대 후반부터 당시 정무2장관실과 여성계와 여성 법률가들이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지원을 받으며 똘똘 뭉쳐 법 제정 운동을 들불처럼 전개했다. 이 결과 90년 가족법 개정을 비롯해 93년 성폭력특별법, 95년 여성발전기본법, 97년 가정폭력방지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가정폭력범죄처벌에관한특례법이 만들어졌다. 97년에는 국적법이 양성에게 평등하도록 고쳐졌으며, 동성 동본 불혼 규정(민법 809조1항)도 헌법재판소가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림으로써 삭제될 운명에 놓여 있다.

“성별 역할 분리론 만연한 탓”

그럼에도 아직도 법에 성 차별적인 조항들이 그득한 이유가 무엇일까. 김선욱 교수(이화여대·법여성학)는 “무엇보다‘여성은 가정, 남성은 일 또는 여성은 사적 영역, 남성은 공적 영역’이라고 하는 성별 역할 분리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법을 만들고(입법), 법을 적용하여 재판하고(사법), 법을 집행하는 일(행정)과 법학자들이 거의 남성이라는 점도 법의 남성화를 완강하게 부여잡고 있는 요인일 것이다. 98년 4월 현재 여성 법조인은 판사 6.9%, 검사 1.7%, 변호사 2%에 불과하다. 여성 국회의원도 2%가 안되며 여성 법학자도 3%가 안된다.

법의 성 차별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한국여성개발원 김엘림 법·정치 연구부장은 “우선 법조문은 물론 법 해석에서도 남녀에 대해 모든 기회와 대우를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이것으로 충분할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김부장은 법률적 평등을 넘어 실질적 평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차별의 원인인 전통적인 성별 역할 분리론과 여성의 능력과 특성에 관한 고정 관념에 기초한 제도 및 관습, 의식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법조문을 양성에게 평등하도록 고치는 일은 남녀 평등으로 가는 지난한 여정에서 첫걸음을 떼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법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 구성원의 상반되는 이해 관계를 조정한다는 점, 사람들이 법을 당연하고 정당하고 정의로운 것으로 떠올린다는 점에서 양성에게 평등한 법이 갖는 의미는 평등 실현의 기폭제가 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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