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지갑 속 달러가 위조 지폐라면…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1998.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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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 23만 달러 적발… 외환 시장 개방되면 극성 부릴 듯
지난 11월 초 외환은행 외환업무부 서태석 과장은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정부 수사관이 미국 화폐 백만 달러짜리 3장과, 세관이 발행한 현금 등록증을 서과장 앞에 내놓았다. 진짜 지폐인지 위조 지폐인지 가려달라는 것이었다. 서태석 과장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백만 달러짜리 미국 지폐는 없다. 미국에서 관광 기념품으로 파는 것이다.”

이 지폐를 들여온 사람은 국내 소규모 무역업자였다. 중국에서 물품 대금으로 받아 세관에 신고한 것이다. 관세청도 처음에 이 지폐를 받고 현금 등록증을 써주었다고 한다. 그 뒤 세관원은 왠지 꺼림칙해 정부 수사 기관에 신고했다. 신고를 접수한 수사관은 지폐와 현금 등록증을 들고 위폐 감별가인 서과장을 찾은 것이다.

지난해 10월9일에도 서울 용산경찰서 수사과 직원이 백만 달러 지폐 5장을 들고 와 위폐 여부를 판정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시중 은행에 이 돈을 입금하고 현금 보관증을 받은 지폐 주인은 보관증을 담보로 해 제2 금융권으로부터 대출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대출 요청을 받은 종합금융사 직원이 담보물로 제시된 백만 달러짜리 지폐 5장을 보고 관할 경찰서에 신고했던 것이다.

서태석 과장은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여러 차례 경험했다. “(달러화에 대해) 기본 지식만 있어도 방지할 수 있는 사고였다. 위조 지폐나 화폐를 이용한 국제 범죄에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국, 위조 지폐 세탁 기지로 떠올라

국내에 유통되는 위조 지폐가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한 때는 94년. 그 뒤 해마다 위조 지폐가 평균 5만 달러 가량 적발되었다. 위조 달러화는 주로 한국과 경제 교류가 활발한 중국·러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 요즘에는 중동 지역 보따리상이 갖고 들어온 위조 달러화가 동대문·남대문 시장과 이태원에서 많이 발견되어 상인들의 피해 사례가 늘고 있다.

외환 위기 이후 위조 지폐 적발 사례는 크게 늘었다. 지난해 12월 외환 위기를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범국민적으로 추진된 ‘달러 모으기’운동이 벌어지면서 장롱 속에 있던 위조 달러의 정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97년 12월∼98년 10월 국내에서 발견된 위조 달러화는 무려 23만 달러에 이른다. 98년 3월까지 전개된 달러 모으기 운동을 통해 거둔 달러화를 미국 RNB은행 홍콩 지점 등지에 수출하는 과정에서 위조 미화가 14만 달러나 적발되어 되돌아왔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위폐 전문가는 “국제 위폐단들이 국내 외환 위기에 편승해 한국을 새로운 위폐 세탁 기지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마당에 99년 4월부터 외환 시장이 전면 개방되면 북한과 국제 위폐단들이 위폐를 국내에 대량 반입할 가능성이 더 크다.

위조 지폐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국내에서 만든 위폐는 컴퓨터 스캐너나 컬러 복사기를 이용해 위조한 것이다. 조잡하게 만들어 주의 깊게 살피면 쉽게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오프셋 인쇄기로 제조된 위폐는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판별하기 어렵다. 오프셋 인쇄 위폐는 주로 외국 전문 위폐단들이 제조·유통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위폐 가운데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다. 최근 들어 국내 유입이 눈에 띄게 늘고 있는 위폐는 슈퍼 노트(초정밀 위폐)이다. 초정밀 위폐는 진폐와 동일한 방법으로 만들어 육안이나 구식 위폐 감별기로는 식별하기 어렵다. 지난 1년간 적발된 위조 미화 23만 달러 가운데 3만7천여 달러가 초정밀 위폐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초정밀 위폐를 제작한다고 의심받는 집단은 전문 위폐단이 아니라 국가이다. 미국 재무부 비밀수사국 스티브 무어 요원은 서울 지방 경찰청이 마련한 ‘미화 위조 지폐 식별 교육’에서, 초정밀 달러화 위폐를 생산하는 국가로 북한과 일부 중동 국가들을 꼽았다.

진폐와 초정밀 위폐를 제조하는 데 사용되는 요판 인쇄기는, 승인된 국가 조폐 기관에만 판매하는 고가(1대당 1백50억원) 장비이므로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는 초정밀 위폐를 제조하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안기부 국제범죄정보센터는 달러 모으기 운동에서 드러난 위조 미화 14만 달러 가운데 3만여 달러를 북한이 유통시킨 초정밀 위폐와 같은 종류로 분류한다. 이 위폐는 북한에 망명한 일본 적군파 다나카 요시미가 96년 3월 태국에서 사용하다 들킨 위폐와 같은 종류이다. 또 98년 5월9일 이란인 무역업자가 동대문 시장에서 의류를 대량으로 구입한 뒤 의류 운송 대금으로 국내 운송업체에 지불한 5천1백 달러 전량도 96년 12월 몽골에서 북한 외교관이 유통시키다가 적발된 초정밀 위폐 11만 달러와 같은 종류로 확인되었다.
유통 위폐 80%가 100달러권

현재 국내에서 발견되고 있는 초정밀 위폐는 주로 88년·90년·93년에 발행된 100달러 구권이다. 96년 3월 발행된 100달러 신권 초정밀 위폐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신권 위폐는 오프셋 인쇄 위폐가 대부분이다. 이 신권 위폐는 국내에서 적발된 위폐의 20% 정도를 차지한다.

북한은 이미 70년대 초 유럽으로부터 인쇄기와 인쇄 잉크를 구입해 달러화 오프셋 인쇄 위폐를 제조했다. 90년대 초부터는 초정밀 위폐를 제조하고 있다. 귀순자의 진술을 비롯해 안기부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북한은 은빛 무역회사 등 위폐 제조 전문 기관들을 평양 근교에서 운영하면서 막대한 위폐를 유통시키고 있다.

북한의 위조 미화 유통 수법을 보면, 90년대 이전에는 주로 무역 대금을 지불할 때 오프셋 위폐를 진폐에 섞어 소량으로 유통시켰다. 90년대 들어서는 외교관과 무역상사 등을 통해 초정밀 위폐 유통에 직접 개입했다. 94년 이후 북한은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4백50만 달러가 넘는 위폐를 유통시키다 들켰다.

지난 4월에는 북한 노동당 고위 간부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위조 미화 3만 달러를 환전하려다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체포될 때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무역참사부 소속 이문무라고 신분을 밝혔다. 하지만 나중에 북한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 겸 김정일 비자금 담당 서기인 길재경으로 확인되었다.

길재경은 70년대 중반 스웨덴 대사로 일할 때 외교관 신분을 이용해 마약을 밀매하다가 스웨덴 정부로부터 추방된 인물이다. 그는 김정일 전용 일용품을 조달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길재경이 사용한 위폐 3만 달러는, 96년 3월 태국에서 일본 적군파 요원 다나카 요시미가 사용한 위폐와 같은 종류였다. 다나카 요시미가 사용한 위폐(3백만 달러)는 94년 6월 마카오에서 북한 조광무역이 유통시킨 위폐(25만 달러)의 앞면을 그대로 둔 채 뒷면을 수정·보완한 신권 초정밀 지폐이다.

북한은 초정밀 위조 달러를 대량 유통시키다가 적발되자 97년 위폐 유통을 잠시 중단했다. 그러다가 최근 각국의 감시가 소홀해지자 위폐 식별 능력이 뒤떨어지는 러시아 같은 곳에서 위폐를 다시 유통시키고 있다. 따라서 한국과 교류가 활발한 러시아·중국 등 제3국을 통해 북한이 제조한 위폐가 국내에 유입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더욱이 금강산 관광 유람선 취항을 계기로 남북 교역이 다시 활성화하면서 북한이 제작한 초정밀 위폐가 국내에 직접 유입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전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미화 4천5백억 달러 가운데 3분의 2 이상인 3천억 달러가 미국을 제외한 지역에서 유통되고 있다. 해외 유통 미화 가운데 80% 가량이 100달러권이다. 위조 미화도 대부분이 100달러짜리이며, 해마다 1억∼3억 달러 가량 적발되고 있다. 미국 통화 당국은 현재 위조 미화가 수십억 달러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의심스러우면 은행에 물어봐야

오프셋으로 인쇄한 위조 미화는 주로 콜롬비아와 아르헨티나에 있는 국제 위폐단들이 제조해 유통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3월 콜롬비아 정부는 대규모 위폐 조직을 적발해 오프셋 인쇄기, 신권 위조 미화 백만 달러, 그리고 상당량의 초안 위폐를 압수했다. 또 지난 7월 아르헨티나에서는 8년 동안 위조 미화 약 2천만 달러를 제조해 유통시킨 대규모 위폐 전문 조직원 25명을 검거했다. 대만 정부도 11월에 형제 위조범을 적발하고 100달러권 위폐 천만 달러를 압수했다.

오프셋 위폐는 조금만 주의 깊게 관찰하면 식별하기가 어렵지 않다. 기초 지식만 갖추면 된다. 하지만 초정밀 위폐는 최신 위폐 감별기나 전문가를 동원하지 않으면 식별이 곤란하다. 따라서 위폐 식별 교육을 통해 전문가를 양성하고 최신 위폐 감별기 보급을 확대해야 한다.

위폐 식별 능력을 높이기 위해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곳은 안기부 국제범죄정보센터. 국제범죄정보센터는 올해 시중 은행 외환 취급자·공항 검색 요원·환전상을 대상으로 위폐 식별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안기부 위폐 전문가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위폐 식별 능력을 보강하고 제도적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

또 일반인들이 위폐를 소지하면 본인이 손해를 보게 되므로 항상 미화를 검사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위폐를 식별하기 곤란할 때는 은행에 물어보고, 위폐를 발견하면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 위폐라는 사실을 알고도 사용하면 형법 210조에 따라 2년 이하 징역이나 5백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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