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군 ‘꼬마 은행’들의 아름다운 통합
  • 부산/박병출 (pbc@sisapress.com)
  • 승인 2000.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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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다’ 남해군 5개 신협 통합 성공… 직원·주민 설득한 지 6년 만에 결실
인구 6만8천 명, 대기업이 단 한 개도 없는 어촌 지역, 재정 자립도는 전국 최저인 14.5%. 경남 남해군의 현재 상황이다. 이런 고장에 금융기관은 몇 개나 있을까. 지난 5월까지만 해도 정답은 ‘18개’였다. 이는, 남해군이 10개 읍·면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숫자는 아니다. 전국에 각 읍·면 단위마다 한 개씩 지역 농협과 새마을금고가 있고, 해안 지방에는 수협까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해군의 경우 지역 농협은 6개밖에 없다. 남해읍과 창선면·고현면·설천면·서면 지역만 독자적으로 농협을 설립했고, 나머지 5개 면이 함께 ‘동남해 농협’을 설립했다. 그밖에 새마을금고 7개, 읍내에 수협 1개가 있다. 남해군에 점포를 개설한 일반 금융기관이 국민은행과 농협중앙회, 지방 은행인 경남은행뿐이라는 사실과 함께 이 지역의 취약한 경제력을 일러주는 지표다.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농협조차 면마다 설립되지 못한 지역에 5개나 되는 신용협동조합(신협)이 들어섰다는 점이다. 군 단위 지역으로는 전국 최다 기록이다. 물론 신협은 엄밀한 의미에서 ‘은행’은 아니다. 조합원이 구성하는 협동체라는 점에서, 지역 농협과 유사한 단체이다. 하지만 생산자 협동체가 아닌 금융 협동체라는 점에서 은행에 더 가깝다.

퇴출 직원 한 명도 없어

남해군에 금융기관 과밀 현상을 불렀던 이 ‘꼬마 은행’들은, 최근 또 다른 기록을 세웠다. 5개 신협이 한 개의 신협으로 거듭나 통폐합 수에서도 전국 최다를 기록한 것이다. IMF 체제 이후 몰아친 구조 조정 과정에서 대형 은행들이 몸살을 앓은 데 비해 이들이 무려 6년에 걸쳐 통합을 준비한 점은 특히 돋보인다.

남해에 신협이 처음 설립된 때는 1970년대 초반이다. 남해 지역 어민들이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전환하던 시기다. 고급 횟감 생선과 꼬막·피조개 등 패류 양식장이 밀집한 삼동면에 맨 먼저 삼동 신협이 만들어졌다. 교사들의 한 달 봉급이 2만원이 채 안될 때 방어 한 마리에 3천원씩 팔렸으니, ‘고기도 지폐를 물고 헤엄쳐 다닌다’고 할 정도로 돈이 흔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은행 거래에 익숙지 않은 주민들은 돈을 흥청망청 쓰고 정작 필요할 때는 어려움을 겪기 일쑤였다.

“사실 은행만큼 문턱 높은 곳이 어디 있는가. 담보 능력이 없는 어민에게 은행 돈은 그림의 떡이다. 결국 어장(漁場) 수리나 치어를 사 넣을 때는 사채를 얻어 쓰게 되고, 나중에는 고리 대금 때문에 지역 인심이 흉흉해질 지경이었다.”

하종신 남해신협 이사장(54)은 신협이 주민들의 낭비벽과 고리대금업을 없애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신협은 조합원의 소액 출자와 상호 금융으로 운영되어 대출이 손쉽다. 조합원이 모두 사정을 잘 아는 주민으로 구성되어 부실 채권이 발생할 우려도 거의 없다. 문제는, 영업 구역 규제였다. 해당 읍·면·동 주민이 아니면 이웃에 신협이 있어도 조합원 자격을 주지 않은 것이다. 경제 운동·교육 운동·윤리 운동 등 신협의 3대 목표가 서민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한 정부가 영업 구역 규제를 통해 1읍·면 1신협 설립을 권장했기 때문이다. 규제는 1997년에야 다소 완화되었다.

남해군내 신협은 1990년대 들어 결국 5개로 늘었다. 통합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결과다. 규모가 가장 큰 남해신협의 하이사장이 통합 논의의 물꼬를 텄다. 1994년의 일이다.

“남해의 경제는 오래 내리막길을 걸었다. 1980년대 13만 명에 달했던 인구가 지금은 절반인 6만8천 명으로 준 것만 봐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각 신협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통합 때까지도 모든 신협이 흑자를 냈다. 다만, 지역 여건이나 금융 환경을 예측할 때 언젠가는 통합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각 신협의 이사장들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들의 자리가 없어질 판이었기 때문이다. 통합의 당위성을 역설해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한 후에는 쉬운 일부터 하나씩 풀어 갔다. 우선 자연 감소 인원을 충원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통합에 따른 인원 감축 규모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통합 이후를 고려해, 중요한 문제는 이사장 다섯 사람이 의논해 처리했다. 이들이 내부 조율보다 더욱 신경을 쓴 부분은 여론이다. 고객이자 주인, 거기에 조합원이기도 한 주민이 반대할 경우 통합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통폐합에 부정적인 조합원이 많았다. 규모가 작은 신협은 이웃 신협에 흡수된다는 피해 의식 때문에, 큰 신협의 경우는 다른 신협을 떠안아 이익 규모가 줄어들지 모른다는 생각에 합병을 꺼리는 분위기였다. 이사장들이 ‘통합 전도사’로 나서서 주민을 달랬다.

1997년 닥친 IMF 관리 체제는, 통합 당위성을 인식시키는 데는 큰 도움을 주었다. 그래도 이사장들은 합병을 서두르지 않았다. 모든 조합원이 합병에 찬성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통합의 밑그림을 그린 지 5년 만인 지난해에야 각 신협은 조합원 총회에 ‘합병 추진 승인안’을 상정했다.

“철저히 조합원들의 심정을 고려한 안건이었다. 정관에 따르면 마지막 단계에서 통합 여부만 총회에 상정하면 되지만, 조합원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합병을 추진해도 좋겠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하종신 이사장의 말이다. 결과는 만장일치 승인이었다. 각 신협 임원들로 통합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소리 없이 한 가지씩 합병 절차를 밟아 갔다. 지난 1년간 지역 노인들과 마신 막걸리가 한 트럭은 될 것이라는 최상록 통합추진위원회간사(남해신협 상무)의 말은, 이들이 통합을 마무리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를 알려준다. 조합원 사이에 불만의 소리가 나온다 싶으면 달려가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몇 시간씩 설득하곤 했다는 것이다.

합병 형식도 독특했다. 신설 합병과 흡수 합병 두 가지 중 이들이 택한 것은, ‘외형적으로는 신설 합병, 법적으로는 흡수 합병’이었다. 면지역의 소규모 신협 조합원들에게 ‘우리 조합’이 없어진다는 상실감을 주지 않기 위해 대등한 위치에서 합병하되, 다시 설립 절차를 밟는 번거로움은 피해 간 묘수였다.

임직원의 희생 정신도 돋보였다. 이사장 네 사람이 한 개로 줄어든 이사장 자리를 가장 규모가 큰 남해신협의 하이사장에게 양보했다. 하이사장은 2001년까지 한시적으로 활동할 운영위원회를 신설해 4명의 당초 임기를 보장했다. 달라진 것은 이들의 입장이다. 신협의 속사정을 가장 잘 아는 전직 이사장들에게, 경영자가 아니라 조합원의 입장을 대변하고 경영진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긴 것이다.

지난 4월29일 금융감독위원회로부터 합병 승인을 받아 재출범한 남해신협은, 5월3일 합병 업무를 개시한 데 이어 지난 1일 합병 조합 인사까지 마무리해 정상 가동에 들어갔다. 직원 39명이 36명으로 줄었지만, 자리만 옮겼을 뿐 결혼을 앞두고 이미 사직원을 낸 여직원 3명 외에 타의로 신협을 떠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미국의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 사는 최근 우리나라에 대해 “더욱 강력한 금융 구조 조정을 단행하지 않을 경우 제2의 환란을 맞을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남해군내 신협들의 작고 아름다운 구조 조정 사례는, 대형 금융기관들에게도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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