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진 ''민주화 큰 별'' 고 명노근 교수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0.01.2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야 원로 명노근 교수 타계…‘행동하는 지식인’ 사표로 남아
새해 벽두에 한 재야 원로의 갑작스런 죽음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전남대 교수 출신으로 광주 지역의 대표적 재야 인사인 명노근 한국YMCA 전국연맹 이사장(68)이 지난 1월10일 아침 돌연 심장마비로 타계한 것이다. 고인이 된 명노근 전 교수는 영어교육론을 강의한 대학 교수라기보다는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끈 재야 원로이자 50년 가까이 YMCA 활동에 참여한 사회단체 지도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65년부터 전남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상아탑의 평범한 학자였던 명교수가 지식인으로서 ‘앙가주망’을 실천하기 시작한 것은 송기숙 전남대 교수와 함께 1978년 이른바 ‘교육지표 사건’을 주도하면서부터이다. 국민교육헌장을 전체주의의 도구라며 통렬하게 비판하고 인간화 교육을 주창한 당시 선언은, 박정희 독재에 시달리던 국민들로부터 ‘경이로운 양심의 결단’ 이라는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명교수는 서명 참여 교수 10명과 함께 정보기관에 연행되고, 교수 직에서 해임되었다가 복직되는 파란을 겪었다.

명교수는 이때부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구레나룻을 기르기 시작했다. ‘독재와 반민주에 저항하는 남성의 당당한 상징’으로 수염을 길렀고,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 깎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다. 고인은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뒤

5·18이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되자 수염을 깎았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기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이 유공자 관련 법안 등 5·18 문제에 소극적인 데 저항하는 표시였다. 명교수는 이처럼 독특한 자신만의 저항 방법을 실천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5·18 항쟁 주도…내란죄로 옥살이

1980년 5월 전남대 교수평의회 부의장이던 명노근 교수는 교수들을 설득해 1월14∼16일의 평화적 학생 시위에 교수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또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접수한 5월21일 이후 시민수습대책위원을 맡아 평화적 해결에 노력하다 항쟁이 진압된 뒤 내란중요임무종사죄로 1년 반 옥살이를 했다.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 하나. 송기숙 교수가 광주 보안대에 끌려가 김대중씨가 보낸 공작금을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강요당하며 살인적인 매질에 시달릴 때였다. 그가 무자비한 고문에 못이겨 김대중씨로부터 5백만원을 받아 명노근 교수에게 30만원을 나누어 주었다고 거짓 실토했다. 역시 다른 방에서 사흘 밤을 새우며 매질을 당하던 명교수도 50만원을 송교수에게서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 뒤 보안사 지하 취조실에서 팬티만 달랑 걸친 채 너무나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만난 두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듣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서로 진술한 액수가 맞았으면 영락없이 공작금을 주고받은 것으로 엮여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송기숙 교수는 “명교수는 어린아이같이 맑고 순수한 분이었다. 한번 결심하면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라고 고인을 추억했다.

지식인의 사회 참여를 당연시했던 명노근 교수는 그 뒤 ‘5·18 광주민중혁명 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과 5·18기념재단이사를 맡아 활동하면서 5·18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고 민중 항쟁으로서 위상을 정립하는 데 애써왔다. 1990년대에도 변함없이 재야 원로로서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을 격려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같은 민주화 투쟁과 활발한 사회 참여로 명교수는 조아라 여사·홍남순 변호사·송기숙 교수와 함께 광주 지역 재야 운동계의 대표적 인물로 꼽혀 왔다. 때문에 명교수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빈소가 차려진 전남대 병원 영안실에는 각계 인사 3천여 명이 줄을 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역시 유족에게 전화를 걸어 고인을 추모하고 위로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