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러 평원에 탈북자 사냥 기승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7.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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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탈북 벌목공 등 추적·감시 강화… 교포 도움 차단되어 동사자·아사자 속출
잠수함 침투 사건의 여파로 남북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던 지난해 10월, 러시아로부터 북한 인권 상황을 감시하는 국내의 한 시민 단체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추위에 떠는 초췌한 사람이 당신의 집 대문을 두드리고 있다. 눈물이 글썽하여 애원하는 그를 당신은 문을 열고 집안에 들여놓은 적이 있는가. 인도주의나 자선 같은 말은 그만두고라도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사는 사람으로서 기꺼이 그에게 의자를 권한 적이 있는가.’

일본의 한 언론인을 통해, 지난해 5월 발족한 ‘북한 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시민연합’(시민연합·상자 기사 참조)으로 전달된 이 편지의 임자는 ‘외화벌이’를 하러 시베리아로 갔다가 작업장을 이탈하여 곧바로 탈북을 결행한 북한 벌목공 이동성씨였다. 그는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탈북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설명하며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탈북자들이 쫓기고 있다. 사상 유례 없는 식량난과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러시아 벌목 현장에서 작업장을 이탈하거나, 국경 수비대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는 북한 사람이 크게 늘면서 이들 지역에 탈북자 경계령이 떨어진 것이다.

귀순자들의 증언, 최근 나온 국제사면위원회 보고서, 러시아·중국에서 탈북자를 보호하다 일시 귀국한 활동가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상황은 심각하다. 북한 당국은 사회안전부 요원들을 현지에 보내 탈북자를 잡아 강제 송환하는 한편, 탈북 사태 파급을 막기 위해 현지 고려인 또는 조선족에게 ‘탈북자들은 범죄자’라는 악소문까지 퍼뜨려 탈북자와 교포들간 접촉을 차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일단 북한 당국에 잡힌 탈북자들은 함경북도 온성·청진·화성, 평안남도 개천·승호 등 북한 전역에 산재한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심할 경우 공개 처형까지 당한다는 점이다.

탈북자에 대한 북한 당국의 무자비한 보복이 자행되고 있는 곳으로는 러시아와 중국이 꼽힌다. 러시아쪽 탈북자들은 대부분 외화벌이를 위해 시베리아 지역으로 진출했다가 탈출한 벌목공이며,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 문제는 최근 북한의 감시가 한층 강화되면서 탈북자들이 거의 발붙이고 살기 어려울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는 것이다.이는 지난 3월6일 저녁 서울 시내 한 곳에서 인권운동가와 탈북 귀순자 들이 참석한 시민연합 월례 모임에서도 확인되었다. 이 날 모임에는 93년부터 러시아 지역에 나가 선교 활동을 하면서 탈북자 5명을 보호하고 있는 ㅇ목사도 참석했다.

앞으로 할 일이 많다며 절대로 신분을 드러내지 말라고 요청한 ㅇ목사는 이 날 러시아 지역 탈북자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러시아 지역에 있는 탈북자들은 대개 다음 세 가지 형태로 살아가고 있다. △현지 농촌으로 숨어들어 고려인 행세를 한다 △중국인 보따리 장사 틈에 섞여 들어가 장사꾼 노릇을 한다 △아예 고려인과 결혼해 위장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마저도 쉽지 않게 되었다. 탈북자를 보호하는 사람에게까지 북한 감시원의 손길이 뻗쳐 신변 위협을 느낀 현지 주민들이 탈북자와 상대하기조차 꺼리는 바람에 유력한 은신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탈북자 가운데에는 귀순을 원치 않는 사람도 꽤 있다. 자기가 대한민국에 귀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즉각 해가 미치기 때문이다. 탈북자 다수는 러시아에 남기를 원하지만, 러시아 당국은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극히 소극적이다.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고, 영토가 광할한 러시아에 있으면서도 결코 안전하지 못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ㅇ목사는 말했다.

탈북자가 처한 상황은 중국 쪽이라고 해서 더 나을 것이 없다. 오히려 중국 방면은 북한과 중국의 전통적인 우호 관계, 러시아 쪽보다 한술 떠뜨는 중국 공안의 위협으로 인해 탈북자 수가 훨씬 많음에도 안전하게 살아가기가 더 힘들다는 것이다. 3월6일 월례 모임에는 종교·신앙의 자유가 법으로 제한되어 있는 중국에 신분을 숨기고 들어가 흑룡강성 하얼빈 지역에서 역시 선교 사업을 벌이며 탈북자를 보호해온 ㄱ 아무개씨도 참석했다.

역시 신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ㄱ씨는 “중국으로 넘어간 탈북자 가운데에는 거지가 유달리 많다. 탈북자를 보호하다 발각되면 중국 공안에게 엄중한 처벌을 받기 때문에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구걸로 연명하는 사람이 발생하는데, 나도 거지로 전락한 탈북자를 목격했다”라고 말했다. ㄱ씨의 증언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중국 방면의 탈북자 일부가 공안 당국의 추적에 쫓기고 현지 주민에게 냉대받는 와중에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국제 사회의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데도 탈북자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는 시민연합을 비롯한 일부 인권 단체가 탈북자 보호를 국내외에 호소하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기에는 요원하다. 정부 당국 역시 탈북자 문제는 고사하고 귀순자에 대해서조차 일관된 해결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탈북자 인권 문제가 당분간 사각 지대에 놓이게 될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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