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여성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 魯順同 기자 ()
  • 승인 2000.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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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가 전하는 북한 여성의 삶/“남북 여성 모두 가부장제 피해자”
북한 여성에 대한 인상은 ‘여성적이면서도 당당하다’로 집약된다. 국내 여성학 연구자들은 북한이 다른 분야에서는 경쟁력이 없을지 몰라도, 여권을 보호하는 측면에서는 남한보다 앞선다고 입을 모은다. 북한의 보통 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최근 몇 년 사이 탈북한 여성들을 통해 북한 여성의 일상을 들여다보았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17년간 출판사에서 기자로 일한 엘리트 여성 김길선씨(55)는, 설화(舌禍)에 시달린 경험 때문인지 북의 현실에 대해 특히 비판적이었다. “후진 사회의 특징이 뭔지 아세요? 여성이 천대받는 거, 아동이 학대 받는 거, 노인이 천시당하는 거. 북한은 이 모든 경우에 해당해요.” 그녀는 여성 진출이 활발하지만 그 부피만큼 실속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게다가 1990년대 이후 여성의 권익을 보장하는 제도와 정책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극심한 경제난 때문이다. 그녀에 따르면 배급이 끊기고 노임이 밀리자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여성의 몫이 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군대에 보낼 옷과 음식을 마련하는 여성들의 동향이 자세히 보도되고,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 노인을 보살피는 여성이 부각되는 것을 단적인 예로 꼽았다.

집안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 고통을 ‘먹을 것 없을 때 밥 주걱 쥔 사람의 괴로움’이라고 표현했다. “남자들 배고픈 거 못 참는다. 남편이 짜증을 참지 못할 때 정말 미웠다.” 밤 12시가 넘어 들어와 밥을 내놓으라고 했던 남편은 남한에 와서 형편이 바뀌었다(이제는 더 바쁘고 노임도 많이 받는 아내를 위해 집안일을 거든다).

북한에서는 여성이 직장이 있건 없건 집안일은 오롯이 여성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탤런트 김혜영씨 가족은 예외에 속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집을 비울 때면 청소는 물론 손빨래도 마다하지 않았다. 딸만 셋인데 가끔 민망하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친구들의 집 사정을 알고 난 뒤 아버지가 특별했음을 알게 되었다.” 김씨의 부친은 열세 살 때까지 중국에서 살았고 무역업을 했기 때문에, 두루 다른 사회를 접해서 깨어 있었던 것 같다고 그녀는 말했다.

성별 분업이 있지만, 차별이 아니라 합리적인 배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남측 연구자들이 모두 지적하는 바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 원칙이지만,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분야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 여성 임금이 낮다. 하지만 일단 직업이 보장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성별 분업은 본인들에게는 그다지 심각한 문제거리로 여겨지지 않는 듯했다. 남자들은 군 복무 기간이 7∼10년으로 무척 길고, 제대한 후에는 같은 기간 동안 사회에서 일한 여성보다 더 높은 직책을 맡게 된다. 국방이 남자의 몫인 만큼 가정을 잘 돌보는 것은 여성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자가 나라 지킬 수 있나요? 아이 키우고 집안 돌보는 것은 여자가 해야지요.”

두만강 유역 온산의 협동농장에서 사상 담당 부위원장으로 일했던 최은실씨는 “남자가 돈을 더 벌기는 하지만, 남한처럼 차이가 크지 않다. 노임 문제는 중요한 줄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사무실 잡무 모두 여성 몫

여성 취업에 관한 주요 결정은 1958년 내각결정 84호가 꼽힌다. ‘인민 경제 각 부문에 여성들을 더욱 인입시킬 데 대하여’ 라는 제목의 이 결정은, 1961년까지 여성 노동력 비율을 교육·보건 부문에서는 60% 이상, 기타 부문에서는 평균 30% 이상까지 제고한다고 되어 있다. 국내 연구에 따르면, 여성 비율이 높은 곳은 교직·봉제·보건 분야 등이다.

그 가운데 여성 의사 비율이 45%에 이르는 것이 이채롭다. 남한의 의사처럼 최상류층은 아니지만 전문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문직에 진출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닌 셈이다. 실제 북한의 통계는 전문직 및 기술직 종사자 수가 2.5배 느는 사이 여성 전문직 종사자는 10배 가량이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초기에 워낙 열악한 탓이겠지만 여성 노동력의 고급화 경향을 보여주는 자료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제도와 관습의 괴리는 크다. 탈북 여성들의 증언에 따르면, 가정은 물론 직장에서조차 남성 우위 문화는 드문 일이 아니다. 17년 동안 출판사에서 기자로 일한 김길선씨는 김정일로부터 친필 휘호를 세 번이나 받았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은 직업 여성이다. 전문적이고 대우도 좋은 직장이었는데 기자 12명 가운데 여기자는 김길선씨뿐이었다. “지각하면 여자라서 더 눈총을 받는다. 남들이 기사 하나 쓸 때 서너 개를 써야 일 좀 한다는 평가를 듣는다” 라고 그녀는 말한다.

일상 문화는 더 남성중심적이다. 부서에 배급이 나오는 날이면, 아무리 기사를 쓰고 있던 중이라고 해도 자신이 가서 물건을 타와야 했다. 그런 일은 으레 여자의 일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책상마다 배급받은 물건을 놓을라치면 젊은 남자들은 당연한 듯 받았다.” 그녀는 북한에 커피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농담을 했다.

이처럼 단순 취업률은 높지만 책임과 권한이 있는 자리에 여성이 진출하는 비율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 최은실씨는, 능력을 인정받아 일한 지 3년 만에 사상 담당 부위원장으로 승진한 보기 드문 경우다. 총책임자인 관리위원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성분이 좋아야 하므로, 현장 출신으로는 부위원장에 오르는 것이 최고 승진인 셈이기 때문이다. 최씨는 농장의 부위원장 넷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었는데 이 농장 역사상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온산의 협동농장 스물세 곳 가운데 여성이 관리위원장을 맡은 곳은 여섯 곳.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도농 격차가 극심한 것에 비추면 상대적으로 열악한 농촌, 그 가운데서도 젊은 남성이 일하기 꺼려 하는 협동농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여성들은 일단 책임자가 되면 바지런하고 이악스러워 실적이 좋다는 평가를 듣는다.겉보기에 정치 분야의 여성 진출은 눈부시다. 최고인민회의 대표자 가운데 여성 비율은 20% 남짓. 줄곧 최고인민회의 9~21%, 도인민회의 20~25%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정치적 영향력이 그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상징적 대표성을 가질 뿐 실제 국정을 감독하거나 비판하는 기능이 적다. 통일부 윤미량 서기관에 따르면 실권을 쥐고 있는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이나 상설회의 의원에 소속된 여성은 역대 통틀어 7명뿐이다. 역대 내각, 정무원 각료 2백60여 명 중에 여성은 단지 5명으로 2%에 불과하다. ‘정치·행정적 책임과 권한을 지녔다고 볼 수 있는 각료에 여성이 등용되기 어려운 것은 여성의 정치적 지위가 높다고 판단하기 곤란하게 만든다’라고 윤서기관은 지적했다(<북한여성정책연구>). 하지만 수치와 영향력이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대외 홍보용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성학자 남인숙씨는 “북한에서 불평등은 여전하지만 남한에 비해 열악한 것은 아니다. 실권이 없다고 해도 최고인민회의 여성 대의원이 20.1%라는 사실은 놀라운 비율이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경제 자립이라는 측면에서도 북한 여성은 훨씬 독립적이다. 차별적 직장 배치로 소득 차별이 엄존하지만 취업 자체는 방해받지 않으며, 결혼에 생애 전체를 걸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경제 위기로 복지 시스템이 가동되지 않아서 문제이지 정책과 의지 면에서는 단연 앞선다는 것이다.

결혼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가 모두 그렇듯이 이른 편이다. 여성의 경우 23~24세, 남성은 27~28세가 적령기다. 여성은 스물다섯이 넘으면 노처녀로 취급된다. 남자는 그 때가 되어야 10여 년에 걸친 군 복무가 끝난다. 연애는 배우자를 고르는 과정이다. 남한처럼 연애 따로 결혼 따로는 생각하기 어렵다. “만약 사귀다가 결혼을 못하는 경우 여성은 시집 가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더욱 몸을 사리게 된다”라고 김순영씨는 말한다.

결혼한 여성은 직장 생활을 하는 데 제약이 없으며 직장을 그만둘 수도 있다. 이는 미혼 여성의 경우 누구나 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에 배치되고 직장 생활을 하지 않을 경우 배급받을 자격이 없지만, 기혼 여성은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받아 절반은 배급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사나 육아 등 이중 부담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경향이 있다는 것. 1990년대에 발표된 단편 소설 <직장장의 하루>(강복례)는 직장에서의 책임과 가사 부담 때문에 갈등하는 직업 여성의 어려움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특히 중간 간부가 아이가 딸린 여성을 일 부담이 덜한 부서로 돌리자고 제안하는 대목은, 가사와 육아 부담을 추처럼 매달고 있는 여성을 부담스러워하기는 어느 체제나 마찬가지라는 점을 보여주어 흥미롭다. 관습적으로 이혼을 사상 해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짙지만, 미혼모나 이혼녀에 대한 정책은 잘 갖추어진 편이다. 자료에는 김정일이 중절 수술을 할 때 공민증을 요구하지 말고 미혼 여성에게도 시술해 주도록 지시했다는 대목이 나오며, 시기를 놓쳐 출산해야 할 경우 부녀보호시설에서 출산한 미혼모가 사회 생활을 제대로 영위하기 어려운 현실이어서 대부분 양육권을 포기한다고 한다. 북한은 1956년 합의 이혼이 폐지되어 현재 재판에 의한 이혼만 가능하다. 배우자 부정, 무자식, 고부 갈등이 주된 이유인데, 재판부는 대체로 ‘참고 살라’ 고 종용한다. 대신 성분이 문제가 될 경우 이혼은 신속하게 처리된다. “성분이 좋았지만 중간에 몰락한 경우 토를 달지 않는다. 계급적 원수와 헤어지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김길선씨는 말한다. 이혼할 때 생활용품 분배는 여성에게 유리하게 이루어진다.

국제 회의에서 북한 여성을 만났던 남한 대표자들은, 그들이 ‘여성스럽고 당당하다’고 말한다. 북한 여성들이 건강하고 공동체 의식이 투철하다는 것은 모두가 지적하는 바다. 김길선씨는 ‘북의 유일한 자산은 잘 훈련된 인민뿐’이라고 말한다. 최은실씨는 “북한 여성치고 말 못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당연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도록 하고 있고, 자기 비판과 호상 비판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유일한 자산은 잘 훈련된 인민”

탈북한 여성, 그래서 불만이 많을 것이라고 여겼던 평범한 여성들은 정작 북한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었다. 경제난 탓일 뿐 여성이기에 겪는 부당한 어려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같이 남한 여성들의 사회 의식이 낮다고 혀를 찬다. “남한 여성들 왜 그렇게 관념이 없어요? 배우나 덜 배우나 다 마찬가지여요.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구서 어떻게 개인의 삶이 좋아질 수 있나요?” 그들은 특히 대중 매체를 통해 묘사되는 여성의 삶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처음에는 윤택하고 편한 생활에 눈이 가지만, 조금 지나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많다는 것. 애인을 찾아 탈북해 최근 결혼식을 올린 최은실씨는 자신의 기사가 실린 여성지를 받아 보고 대경실색했다. “옷·성 이야기, 요리 외에는 관심이 없나 봐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청바지를 찢어 입는 것을 보고는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고 한다. 김길선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남한 여성들이 사회에는 관심이 없고 매사에 돈 돈 하며 가족에만 파묻혀 사는 듯하다”라고 말했다. 아이들을 지나치게 보호하는 것도 의아하다. 아파트에서 살다가 따질 일이 있어 옆집을 방문했는데 그 집 어머니가 입도 벙긋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내일 아들이 시험이니 제발 조용히 하라고 통사정하더라는 것. 그녀는 “그렇게 자식을 키워 뭣에 쓰나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북한이 따라 배워야 할 전범으로 내세우는 여성들을 보면 그들의 여성관을 짐작할 수 있다. 여성관은 시기 별로 조금씩 강조점을 달리했다. 정권 건설 초기에 투쟁적 혁명가를 지향했으나 권력 강화와 더불어 수동적·가정적·보조적 어머니상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남편의 안해(아내), 아들의 어머니, 집안의 며느리 역할을 두루 강조하는 것은 어느 시기에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북한의 체제가 유교적 가부장 제도와 사회주의가 기묘하게 결합했다는 혐의를 받는 근거가 되어 왔다.유교적 가부장제와 사회주의의 기묘한 결합

그 예로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 여사는 맏며느리에 열두 자녀의 어머니 노릇을 하면서도 ‘시부모 앞에서 말대답하거나 변명하시는 일이 한 번도 없는 효부였다’고 강조된다. 남녀평등권법령이 발포될 때 김정숙이 한 발언도 북한의 여성관을 잘 보여준다. “우리 녀성들이 법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여 녀성으로서 해야 할 일과 갖추어야 할 품성을 잊어서는 안돼요. 혁명사업에서는 남자들 못지 않게 간결해야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녀성다운 맛이 있어야 하고 언행이 아름다워야 해요.” ‘사회가 건전하려면 사회의 세포를 이루는 가정이 건전해야 하며, 가정이 건전하려면 한 가정의 주부인 며느리가 제 구실을 옳게 해야 한다’는 김정일의 교시는 여러 형태로 변주되고 있다.

박혜란씨(이화여대 여성연구원)는 “두 체제 모두 명목으로 양성 평등의 이념을 부르짖으나 내용으로는 강력한 가부장제 문화를 유지했다”라고 말한다. 비록 북한 여성이 사명감으로 기꺼이 가부장적인 질서를 수용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박씨는 “정작 심각한 것은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남북한 여성 간의 가치관 충돌이 아니라 남북한 여성에게 닥칠 불이익이다”라고 지적한다. 즉 통일 과정에서 여성의 권익을 대변할 길을 찾지 못할 경우 독일의 예처럼 북한 여성이 가장 불리한 위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상자 기사 참조). 가부장이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하는 상태에서 가부장제에 적합한 덕목만 강조되는 삶. 이것이 바로 남북 여성들이 공동으로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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