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카마호 반란자 수기/쇠몽둥이질은 참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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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6.1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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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천씨 수기 발췌/“하선 당하면 온가족 망한다는 절망감에 우발적 범행”
6월14일, 중국 북경에서 비행기에 올라 한국 서울에 도착하여 5시간 후 사이판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사이판에 도착한 뒤 다시 작은 비행기를 타고 티니안 섬에 이르러 페스카마 15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배에 오르자 저는 2항사로 배치 받고 1항사와 번갈아 당직을 섰습니다. 16일 저녁 출항하여 17일부터 작업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갑판장과 함께 선원을 데리고 보도줄 엮는 사시(끝결)부터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선원들이 배멀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배에 오른 선원은 배멀미에 시달려 갑판부 구멍마다 머리를 내밀고 토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갑판장은 돌아다니며 엎드려 있는 선원들의 궁둥이를 차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주로 낚싯줄 잇기, 낚시 달기, 낚시 찍기, 와이어와 스나프 달기 그리고 부이줄을 연결하고 부이줄을 뒤보도통으로 올리고 창고를 정리하고 어창을 정리하는 일로 매일 저녁 10시께까지 작업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접하는 작업에다 한국어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배에는 처음 보는 기구와 신기로운 것들이 많았는데, 부르는 명칭이 중국과 달라 알아듣기 힘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중국(조선족) 선원들이 한국인에게 희롱·폭행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작업에 익숙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마구리배에서 작업에 익숙해지려면 3개월을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19일 인도인 노만이 보도줄의 사시를 단단히 연결하지 못했다 하여 갑판장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습니다. 노만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갑판장이 다시 또바귀(쇠로 만듬,5근)로 노만의 이마를 때리자 맞은 부위가 공처럼 부어 올랐습니다.
“거렁뱅이들, 다 쳐죽이겠다” 도끼 휘두르기도

그 며칠 후 최금호가 저한테 귀띔해 주었습니다. “2항사 요새 주의하시오. 갑판장이 선장한테 고자질하는데 언제고 2항사의 코피를 터쳐 놓겠다 했습니다.” 20일 당직을 서고 있는데 갑판장이 저를 불렀습니다. 갑판장은 저를 보고 “이 새끼야, 빨리 안 기어 나오고 왜 이제 나오는 거냐”하며 대답할 새도 없이 저의 귀통을 후려쳤습니다. 두 눈에서 불이 번쩍이더니 코와 눈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저는 갑판장에게 빌었습니다. “잘못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하며 빌자 비로소 갑판장은 손을 뗐습니다.

6월22일 선원들은 애다를 정리해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갑판장·선장·항해사는 감독했습니다. 선원들이 제아무리 정성껏 애다를 사려도 그들에게는 반눈에도 차지 않았습니다. 화가 치민 선장은 선원들을 두 줄로 세워놓고 모두 엎드리라고 한 후 몽둥이로 엉덩이를 3대씩 후려쳤습니다. 모두들 다리를 끌며 일어서서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이러한 폭행과 핍박에 시달리는 동안 마침내 선원들이 참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6월26일, 중국 선원 6명(최만봉 포함)은 갑판장과 선장의 혹독한 핍박과 가혹한 행위에 더 참을 수 없게 되어 선장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그들은 갑판장의 폭행에 더 견딜 수가 없으니 선장님께서 갑판장을 교육하여 시정해 달라고 요구했으며, 금후라도 폭행만 시정하여 주면 우리는 선장님 슬하에서 참답게 작업을 할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 편지를 1항사에게 주면서 선장께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6월27일 아침 5시께, 모든 선원과 사관은 선미에 가서 첫 투승을 했습니다. 중국 선원은 투승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선장은 침실에서 구로뿔(큰고기의 뿔)로 만든 창(길이는 40㎝, 손잡이를 검은 테이프로 감았음)을 손에 들고 투승하는 데로 갔습니다.

갑판장은 1m쯤 되는 몽둥이를 손에 들고 작업 배치를 했습니다. 조선족은 말이 좀 통한다 하여 모두 앞선에서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한번 말로 가르쳐주었지만 처음 접촉하고 처음 보는 일이기에 작업이 손에 익지 않고 순조롭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욕설과 몽둥이질이 귀통을 후려치고 머리 위로 날아들었습니다. 최금호의 머리와 귀 윗부분에서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말도 못하고 긴장해 작업을 하느라 흐르는 피도 닦지 못했습니다.

선장은 입감 끼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몇번 가르쳐 주었지만 더 헷갈렸고 입감이 자꾸 떨어졌습니다. 선장은 갯수도 셀 줄 모르느냐며 X자로 된 고기뿔로 리춘성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또 애다 2장을 들고 나와 리춘성을 내리쳤습니다. 그때 만약 낚시에 걸렸으면 병신이 되었을 것인데, 요행히 낚시에 맞지 않고 요리도리에 맞아 코피가 났습니다. 고기뿔이 부러지자 선장은 밑에서 쇠파이프를 들고 와서 리춘성에게로 달려들었고 겁에 질린 리춘성은 이리저리 피했습니다. 화가 치민 선장은 뱃전을 돌아다니며 선원을 닥치는 대로 쳤습니다. 모두들 하얗게 질려 선장을 피해 다녔으며, 선장 손에 들린 쇠파이프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작업이 되지 않았습니다. 선장은 갑판장 보고 “걷어 치워”하며 투승을 걷게 했습니다. 선장은 “이 새끼들, 오늘 다 쳐죽인다”라며 선원들을 갑판부로 보내고는 뒤에서 사정없이 쇠파이프로 내리쳤습니다. 쇠파이프에 맞아 머리가 터진 사람, 코피가 터진 사람, 팔다리를 못쓰게 된 사람들이 갑판부 구석구석에 쭈그려 앉았습니다.

선장은 쇠파이프를 들고 첫번째로 리춘성씨를 꿇어앉혔습니다. 리춘성은 선장을 멀리 두고 꿇어앉았습니다. 리춘성이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움찔거리는데 선장이 머리 위로 쇠파이프를 내리쳤습니다. 날아드는 쇠파이프를 피하다가 어깨를 얻어맞은 리춘성은 벌떡 일어나 선장의 쇠파이프와 멱살을 움켜쥐었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중국인 백춘범·최만봉·최일규·최금호·박군남이 몽둥이와 칼을 들고 방위했습니다. 저와 1항사는 사태가 커질까 봐 선장과 중국인 사이에 서서 중국인을 설복했습니다.
이때 선장은 1항사 보고 “도끼를 가져오라. 이 거렁뱅이들을 다 쳐죽여야지”라고 외쳤습니다. 중국인은 선장 손에 들린 도끼를 보고 겁에 질려 모두 브리지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인도인도 모두 저항할 무기를 가지고 중국인과 함께 브리지 위층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선장은 노발대발하여 선원들을 보고 “이 개새끼들아, 모두 보따리를 싸가지고 갑판부로 내려와”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내려가지 않고 육지로 데려다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선장은 저를 불러 중국인에게 물어 보라 했습니다. 제가 위층에 올라가 중국인에게 묻자 그들은 “이제는 더 일하지 못하겠다. 집에 가겠다”라면서 편지를 전달한 사실을 얘기했습니다. ‘선장님께 폭행을 금지해 달라고 간청을 했건만, 오늘 보니 그 보복인지 이전보다 매가 더 심하다. 맞아 죽어도 하소연할 곳조차 없게 생겼다. 그만두고 집에 보내 달라’ 하였습니다. 내려와서 이 사실을 선장께 알리니 “무슨 편지?”하며 1항사를 불러 그런 일이 있었는가 물었습니다. 1항사가 “바빠서 선장께 올리지 못했다”라고 대답하자 선장은 그런 일을 알리지 않았다고 1항사를 원망했습니다.

그 뒤부터 중국인에 대한 선장과 갑판장의 폭행이 줄어들었지만 인도인에 대해서는 폭행이 계속되었습니다. 폭행은 비록 줄었으나 잠을 안재웠습니다. 27일 동안 3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습니다. 두 달 동안 고기를 겨우 30t밖에 잡지 못하자 선장은 우리한테 신경질을 냈습니다.

7월27일 새벽 2시께 저는 브리지에 올라가 방광 결석으로 작업을 계속하지 못할 것 같으니 하선하겠다고 보고서를 써서 1항사에게 주었습니다. 갑판장과 함께 일하기 싫어서였습니다. 갑판에서 저녁조는 갑판장이 데리고 일하고 새벽조는 제가 데리고 일합니다. 그런데 갑판장은 선장이 있을 때는 갑판에 와 돌고, 선장이 없으면 침실이나 식당에 가서 술을 마십니다. 저는 두 조의 일을 다 맡아 하며 욕도 혼자 도맡아 먹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갑판장과 2년을 같이 일하자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7월28일 중국 선원들이 모두 아파서 작업을 못하겠다며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날 오후 선장은 중국인 6명(최만봉 포함)을 브리지에 불러 오라 했습니다. 제가 그들을 설복하던 중 선장이 와서 일 못하는 원인을 물었는데, 아프다니까 약을 주었습니다. 더 이유가 없게 된 중국인은 계속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7월29일 새벽 2시 입감을 꺼내고 4시30분에 투승조를 깨웠습니다. 처음에 갑판장을 깨우고 두번째로 백춘범씨를 깨웠습니다. 백씨는 투승을 못하겠다며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최금호를 대신 시킨 후 투승을 마쳤습니다. 오후 3시에 우리를 깨웠지만 저만 일어나고 나머지 중국인 5명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원래 최일규가 맡았던 고기 처리하던 일을 저와 조기장이 대신 처리했습니다.

7월30일 저녁 무렵, 선장은 중국 선원을 모두 브리지에 모아 놓고 “누가 집에 가겠나”하고 물었습니다. 중국인 백춘범·최일규·최금호·박군남·리춘성은 모두 몸이 아프니 하선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선장은 “그래, 너희 소원대로 해 줄께”하며 1항사보고 하선경제보증서를 쓰게 했습니다. 처음 듣는 보증서가 무엇인 줄도 모르는 우리에게 도장을 찍으라 했습니다. 그러나 뒷면에 꼬리표가 달렸습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손도장을 찍었습니다. 뒷면 내용은 “중국인 6명이 승선 후 선장과 갑판장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작업을 거부하고, 흉기를 들고 선장을 살해하려 달려들었으며 폭행적인 행위가 있으므로 강제 하선시킬 것을 결정한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죽을 바엔 우리 가족의 행복 끊은 자들 죽이고 죽자”

선장은 우리에게 “거지 같은 놈들, 그렇게 수월하게 보낼 줄 알았냐. 사모아 구류소에 석 달은 갇혀 있어야 할 거다. 구류소에서 먹고 자는 비용을 너희 가정에서 부쳐 와야 중국으로 보낸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사모아까지 가는 배의 비용(연료 등) 일체를 중국인 6명이 모두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저는 방광 결석으로 하선서를 떼줄 줄 알았는데, 폭행을 말린 저에게 도리어 흉기를 들고 폭행에 참가했다고 덮어씌운 것이었습니다. 계산해 보니 오가는 항공비 3만위안, 사모아까지 가는 비용 5만위안, 구류소에서 3개월간 먹고 자는 비용 2만위안, 중국에서 올 때 보증금으로 친구의 백평짜리 집을 눌러 놓은 것까지 총합계가 15만위안이었습니다. 이 많은 돈을 집에서 어떻게 부담하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8월1일 당직을 끝내고 저녁을 먹은 후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술이나 먹으려고 최일규 침실에 갔습니다. 침실에 들어서니 모두 고개를 떨구고 수심에 잠겨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모아에 가서 달아날 생각, 집에 가도 평생 외지에 있을 생각, 서로가 신세타령이었습니다. 저는 연변회사에서 오고 그들은 장춘회사에서 와서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날에야 비로소 이들의 비참한 처지와 내막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국인 6명은 94년에 장춘회사에다 신청하고 현금 만위안 빚을 내 비용에 쓰며 집에서 2년을 기다렸습니다. 2년 만에 만위안 빚이 2만위안이 되었습니다. 96년 6월10일 출국했는데 매달 봉급은 1백90달러, 장춘회사에 보증금으로 집 두 채, 금액 5만위안의 지표를 눌러 놓았다 했습니다. 나이 어린 이들이 생전 처음 배에 올라 2개월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매일 욕 먹고 매를 맞으며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개처럼 고생만 한 결과,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도리어 빚만 잔뜩 걸머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선상 반란자로 몰려 사모아 구류소에 갇힐 신세가 되었습니다. 2년 만기를 채워도 집으로 중국돈 2만위안밖에 가져가지 못하는데 한 사람 앞에 20만위안이라는 손해배상비가 다 무엇입니까. 자자손손 10대를 갚아도 못갚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너희들이 이 역경에서 빠져나오려면 단결을 하여 한마음으로 선장을 찾아가 무조건 꿇어앉아 용서를 빌고 잘못을 뉘우쳐야 한다. 이대로 집에 가면 가정은 파산되고 자식들이 길가에 나앉는 것은 물론 우리도 죽은 목숨이니 집에 갈 면목이 안 선다. 선장님, 우리 가족을 살려주십시오 하고 빌면 돌사람이라도 용서를 해 줄 것이다”라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랬는데도 백춘범씨가 대표로 항해사에게만 애원했습니다. 항해사는 말도 안된다며 일언지하에 돌려보냈습니다.
저는 침실로 돌아와 있다가 마음이 불편하여 최일규 침실에 술을 먹으러 갔습니다. 그때가 10시였습니다. 침실에 가니 이들이 모두 앉아 있었습니다. 선장께 찾아가 보았는가 물으니 모두 안갔다 하며 백씨만 혼자 찾아가 이야기했는데 쓸 데 없다고 하였다 합니다. 저는 화가 났습니다. 백씨보고 술을 달라 하여 상한 가슴에 술을 마셨습니다. 술이 점점 취하니 제 신세가 가련했습니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비참한 처지였습니다. 오직 배를 잘못 탔고 선장을 잘못 만난 탓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우리는 선장이 우리에게 죽는 길을 선택해 주었고, 가족에게도 죽을 길을 마련해 주었다고 원망했습니다. 우리는 죽으려 했습니다. 이대로는 집에 갈 수 없으니 오직 죽음으로 고통을 없애려 했습니다.

이 때 누군가가 “죽을 바엔 우리 가족의 행복을 끊은 선장을 죽이고 죽자”라고 말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사람 죽일 생각은 안했습니다. 허나 이 말 끝에 모두 선장과 갑판장을 죽이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자 했습니다. 우리는 죽자는 분위기에서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술기운에 단순히 너 죽고 나 죽자고 나섰습니다. 이때의 분위기는 아주 강렬했습니다. 안하겠다고 말하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또 중국인 5명이 서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섭기도 했습니다. 참가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내가 2항사로서 평소에 선장을 찾고 하니 내가 선장을 침실에서 데리고 나오는 임무를 맡겠다고 자청했습니다. 그때가 밤 12시였습니다. 1시면 교대해야 합니다. “자, 그러면 나는 간다. 상세한 것은 너희가 상의해라”하고 침실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살인 초기의 상태는 이러합니다. 절대 사전에 계획도 없었고 살해 음모도 없었으며 두목도 없었습니다.

일을 저지른 후 우리는 묶여서 한국해양경찰서에 넘겨졌습니다. 우리는 서로간 말을 하지 못하고 매일 조사를 받았습니다. 후에 백춘범씨가 저에게 미루었기에, 저는 중국인에게 “너희들은 사실대로 말해라. 백씨가 이미 말을 했으니 괜히 고통받지 말자. 한 가지는, 너희들은 젊었고 하니 일체 모두가 다 내가 시켜 했다 하라. 나 혼자 사형 받으면 된다. 한 가지 부탁은, 너희들이 살아 집에 갈 수만 있으면 우리 집을 잘 돌봐 달라. 그러면 내가 너희들 대신 죽어도 마음이 편할 것이다”라고 얘기하고 김○○ 형사에게 상세히 진술하면서, 모두 제가 시켜서 했으니 그들을 살려 달라 했습니다. 때문에 제가 지시한 것으로 되었고, 제가 두목으로 되었습니다.

저는 현재 살아서 반성문도 쓰고 가족이 그립고 쓰라린 마음이지만, 영영 이 세상을 떠나신 분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아 있는 그들의 부모·형제·아내·자식 들의 가슴은 얼마나 쓰라리겠습니까. 저는 한국 국민과 유가족께 용서 받지 못할 가슴 아픈 죄를 졌습니다. 엎드려 사죄합니다. 만약 이 몸에 칼탕을 쳐서 유가족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렇게라도 해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꿈인 양 싶고 끔찍합니다. 세상에 돈이 무엇인지, 돈 없는 세상은 없는지, 이 모두가 가족 생계를 위해 생존을 위해 빚어진 피비린 사연, 반성합니다. 하나님께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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