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해지역 주민들의 고단한 겨울나기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6.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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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구·원조 제대로 안돼 천막살이·더부살이
남편과 함께 한탄강 유원지 부근 속칭 미루나무골(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4리)에서 10년 넘게 매운탕집을 운영해온 김옥자씨(57)는 지난 여름 발생한 물난리만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워낙 창졸에 당한 일일 뿐만 아니라, 홍수로 인해 그동안 2억원 넘게 일구어 놓았던 재산을 송두리째 강물에 쓸려 보낸 쓰라린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날 오전 7시까지만 해도 물이 먼발치에서 찰랑찰랑했다. 동네 사람들이 우리집에 몰려와 걱정을 하기에 안심시키려고 커피를 끓여 대접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나가보았다. 그랬더니 이게 어쩐 일인가. 큰 물이 저쪽(상류를 가리킴)에서부터 몰려오는데 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물이 수직으로 꼿꼿이 서서 들어오고 있었다. 정신없이 집을 빠져나왔을 때에는 이미 집이 물에 잠겨 지붕만 보이던 상태였다.”

물이 빠진 뒤 김씨네는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고 그나마 남아 있던 앵글(손님 접대용으로 강기슭에 쳐놓은 차양)에 벽을 두르고 천막을 덧대 임시 거처를 지었다. 김씨는 방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한층 심해졌음에도 아직까지 천막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딱한 사정은 다른 수해 지역에서도 목격된다.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구읍1리에서 쌀농사를 짓다가 홍수 때 집을 잃은 경규헌씨는 토끼장과 아이들 놀이터 겸용으로 쓰던 헛간을 개조해 살고 있다. 이 마을 이장 경광현씨는 “우리 마을 농가는 모두 합쳐 스물일곱 세대인데 그 중 여덟 세대 가옥이 침수됐고 세 가구 집이 전파(全破)됐다. 새로 집을 지어 입주한 사람도 많지만 경규헌씨처럼 아직도 집을 짓지 못해 때아닌 피난살이를 하는 집도 여럿 있다”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강원도 철원군, 경기도 연천군, 파주시 등 지난번 집중 호우로 큰 해를 입은 수해 지역의 행정 관청들은 한결같이 ‘수해 복구 작업이 순조롭게 이뤄져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국비·의연금·지방비 등으로 확보된 수해복구비가 차질 없이 집행되고 있으며, 침수 주택과 파손된 도로·하천 정비 작업, 유실된 농경지 정리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수재민이 체감하는 실제 내용과 이들 행정 관청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한탄강 인근에서 천막살이를 하고 있는 한 수재민은 “일부에서는 수해 복구가 80~90% 진척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과 크게 다르다. 아직도 많은 수재민이 나처럼 들어가 살 집도 마련하지 못해 뿔뿔이 흩어져 친척집이나 이웃집을 전전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수해 복구냐”라며 목청을 돋구었다.

수재민들이 당국의 수해 복구 지원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수해가 난 직후 김영삼 대통령이 ‘특별 재해 지역에 준하는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하여 수재민의 기대 심리를 한껏 높여 놓은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수해 복구에 관계된 제도와 규정이 오히려 수재민들의 재난 극복 의지를 꺾기 때문이다.

통상 수재민에 대한 원조는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진다. 자연 재해임이 분명할 경우 자연재해대책법에 따라 ‘지원’하며, 인위적인 재해가 발생했을 때에는 재난관리법에 따라 해당 지역을 ‘특별 재해 지구’로 선포하고 해를 입은 사람에 대해 정부가 적절한 ‘보상’을 강구하는 것이다. 정부는 최종적으로 지난 여름 수해를 자연 재해로 규정해 지원하는 방식을 결정했지만, 수재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보상’요구 목소리가 높다. 한탄강 유원지 주민들의 보상 요구가 그 중 대표적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구호비 지원 기준·시행 방식 문제 많아

또 하나의 문제는 자연재해대책법 규정에 따른 ‘구호비 지원 기준’과 그 시행 방식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데 있다. 예컨대 현행 구호비 지원 기준에 따르면 2ha 이상 농지를 경작하는 농민이 수해를 입었을 경우 농경지 복구와 대파 비용에 대한 지원을 제외하고는 전체 피해에 대한 지원이 전혀 없다. 큰 농사를 지을수록 피해 규모가 크게 마련인데도, 지원은 오히려 줄어들거나 아예 없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수재민들의 생활 안정과 생계 수단 확보 측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유실된 주택이나 축사 따위를 짓는 일이다. 물론 당국은 쓰러진 주택이나 축사를 다시 지을 경우 장기 저리로 건축비 일부를 특별 융자해 준다거나 보조금을 지급하는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문제는 ‘주택은 선건설 후지원, 축사는 선입식 후지원’ 식으로 ‘지원 원칙’이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어 당장 착수금도 마련하지 못하는 처지인 수재민은 융자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국비·도비·수재의연금 등으로 각종 융자와 보조금이 나가고 있음에도 일부 수해 지역에서 천막살이를 하거나 더부살이를 하는 수재민이 의외로 많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여름 수해가 해당 지역에 상처만 안긴 것은 아니다. 관할 지역 대부분이 군사시설 보호 구역으로 묶여 있어 재개발이 지연되었던 경기도 연천군은 지난 여름 물난리로 지은 지 30~40년 된 불량 주택을 대대적으로 개량할 호기를 맞았다. 파주시도 지난 여름 물난리를 기화로 제2의 도약을 위한 장기 발전 계획을 설계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수재민 사이에서‘내일의 희망’을 꿈꾸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기울여야 할 노력의 크기에 비해 돌아오는 원조의 크기와 내용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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