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쳐보기 범죄,처절한 법규가 없다.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8.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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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법에 ‘훔쳐보기 범죄’ 처벌 법규 없어 속수무책
누군가 당신을 훔쳐보고 있다. 당신의 은밀한 신체 부위를 엿보려는 눈이 도처에서 번뜩인다. 사무실도 거리도 심지어 당신의 안방까지도 안전 지대가 아니다.

부산지방검찰청 형사부 유두열 검사는 6월26일 부산·경남 지역의 여자 목욕탕과 수영장 탈의실, 예식장 화장실 같은 은밀한 장소를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를 대량 유통시킨 박 아무개씨(27) 등 일당 9명을 잡아들였다. 불법 제조된 테이프는 화질이 좋지 않았지만 ‘798탕’ 따위 제목을 붙인 데다 배경 음악도 넣는 등 나름으로 편집이 되어 있었다. 이 테이프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성들의 벗은 몸이다.

다른 사람을 훔쳐보려는 사람들이 놓칠 수 없는 곳이 여관과 호텔. 4월 초 대구시 두성동의 한 여관 209호실에 김 아무개씨(30) 등 2명이 비디오 카메라와 도청기를 설치해 그곳에 투숙한 사람들의 정사 장면을 찍어 이들의 불륜을 미끼로 금품을 갈취한 사건이 발생했다. 심지어 자신과 여성의 정사 장면을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서울 세운상가 등에 팔아 돈벌이를 하는 사람까지 생겨나고 있다. 3월에는 서울의 한 극장 화장실에 들어가 옆칸에서 여성들이 볼일 보는 장면을 디지털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노 아무개씨(32)라는 치사한 남자도 검찰에 잡혔다.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해 혹은 돈벌이를 위해 타인을 몰래 훔쳐보는 범죄 행위가 빈발하고 있다. 올 들어 적발된 훔쳐보기 범죄, 이른바 ‘도찰(盜察) 범죄’만도 7∼8건이나 된다. 이 사건들은 그나마 피해자인 여성들에게 위안이 된다. 이들의 범죄 행위에 국가가 철퇴를 내렸기 때문이다. 여자 목욕탕 등을 촬영한 사건의 경우 이 피의자들은 음반및비디오물에관한법률 위반, 음란필름소지및판매제조 혐의로 구속되었고, 법원이 중형으로 다스린다면 3년 징역형까지 갈 수 있다.

협박·돈벌이에 이용해야 처벌 가능

그러나 한국의 형법은 도찰 범죄 그 자체에는 죄를 묻지 않는다. 엿보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현행 형법에 뚜렷한 처벌 법규가 없기 때문이다. 도찰이나 도청은 비슷한 유형의 범죄 행위이다. 그런데도 도청은 통신비밀보호법에 의해 피의자를 잡아들일 수 있지만 도찰에는 제재가 불가능한 것이다. 가령 지난해 7월 4층 여자 화장실에 폐쇄 회로 텔레비전(CCTV)을 설치해 물의를 빚은 서울 신촌의 그레이스백화점(지금은 현대백화점 신촌 분점) 사건은 무혐의로 종결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드러난 강원도 영월의 한 치과 병원 간호사 탈의실 엿보기 범죄도 담당 검사가 폐쇄 회로 텔레비전을 설치한 병원장을 잡아들이지 못했다.

올 들어 발생한 사건의 경우 검찰이 죄를 물을 수 있었던 것은 피의자들이 폐쇄 회로 텔레비전이나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를 자신만 보고 즐기는 데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판매할 요량으로 비디오 테이프를 대량 제조·소지·유통시켰거나, 이 테이프에 찍힌 사람들을 협박해 돈을 가로챈 경우에는 음반및비디오물에관한법률이나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으로 처벌이 가능하다.극장 화장실 사건은 또 다른 면에서 검찰이 기소에 애를 먹은 경우다. 당시 이 사건을 맡았던 서울지검 형사3부 최상진 검사(현 서울지검 공판부)는 경찰이 고심 끝에 적용한 통신매체이용음란행위죄로는 기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비디오 카메라는 통신 매체가 아니라 영상 기록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검사는 이 사건을 그대로 끝내기에는 노씨의 행위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판례를 이잡듯이 뒤진 끝에 찾아낸 것이 92년 부산 초원복집 사건 때 현장을 불법 도청한 요원에게 적용한 건조물 침입죄였다. 또 이용자가 점유하는 공간인 화장실의 칸막이 밑으로 노씨의 카메라와 손이 넘어왔기 때문에 방실(房室)침입죄를 적용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검찰의 ‘몸부림’으로 노씨는 구속되었지만, 최근 나온 법원의 판결은 맥이 빠지는 감이 없지 않다. 서울지법 형사1단독 김호윤 판사는 검찰이 건 두 죄목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노씨에게 2백만원 벌금형이라는 ‘가벼운’ 처벌을 선고했다. 이 죄로는 무거운 형벌을 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에서 옛 그레이스백화점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유병규 검사(현 원주지청)는 이 사건을 무혐의 처리하면서 지난해 10월 법무부와 대검찰청에 의견서를 냈다. 유검사는, 이 사건은 분명히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는 범죄 행위로 볼 수 있지만 법전과 판례, 외국의 예를 다 뒤져도 죄를 물을 수 없는 법 현실이 안타까워 의견서를 냈다고 밝혔다(이 사건은 건물 주인인 백화점의 행위였기 때문에 노씨에게 적용되었던 건조물 침입죄도 걸 수 없었다).

이 의견서에는 형법의 비밀침해죄(316조)·주거침입죄(319조)·주거신체수색죄(321조)·명예훼손죄(307조)와 통신비밀보호법, 경범죄처벌법,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 등 걸 만한 법률을 모두 검토했으나 적용할 수가 없었다고 적혀 있다. 유검사 팀은 형법·특별법을 만들거나 경범죄처벌법을 개정해 엿보기 처벌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었다.

이에 대해 법무부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법무부 검찰 4과 이건주 검사는 “피해자는 사생활 침해에서 오는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겠지만, 엿보는 행위의 어디까지를 범죄로 볼 것인가에 대해 한계를 긋기 어렵다는 현실적 난점이 있다”라면서, 이런 점 때문에 외국에서도 입법된 예가 없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미적거리는 사이 권영자 의원 등 한나라당 소속 의원 23명은 최근 의원 입법으로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자기 또는 타인의 성적 욕망을 유발하거나 만족시킬 목적으로 주거 관리하는 건조물·선박·항공기 또는 점유하는 방실에 카메라·비디오 등을 설치하여 촬영한 자는 5년 이하 징역 또는 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자는 것이 개정안의 요지다. 권영자 의원은 “엿보기 범죄는 전기·전자 기술의 발달에 따라 가능해진 신종 범죄로 명백한 인권 침해요 사생활 침해다. 피해자도 대부분 여성이다. 이런 유형의 범죄를 다스릴 법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라며, 올해 안에 이 법의 개정안이 통과될 것으로 낙관했다.

출판사에 다니는 김혜정씨(33·서울시 불광동)는 언제부터인가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건물 벽에 금이 갔는지, 천장에 몰래 카메라가 있는지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1∼2년 사이 빈발하고 있는 엿보기 범죄를 의식한 자기 방위 본능이 작동한 셈이다. 그러나 김씨가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몰래 카메라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핀홀 렌즈를 끼운 폐쇄 회로 텔레비전은 아주 작은 틈만 있으면 설치가 가능해 육안으로 관찰하기 어렵고, 손가락 반만한 극소형 비디오 카메라도 수없이 많다. 특별법 제정해 ‘엿보기 범죄’ 근절해야

올 여름 여성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은 더 있다. 지난해 7월 이후 일본에서도 사회 문제로 번진 투시 카메라가 국내에 대량 반입된 것이다. 일반 비디오 카메라에 2천∼만 엔(2만∼10만 원)짜리 특수 적외선 렌즈를 덧씌우고 부속 한두 개쯤을 갈면 바로 투시 카메라로 둔갑한다. 적외선 렌즈가 수영복을 뚫고 들어가 알몸이 훤히 보인다는 것. 아직은 몸에 달라붙은 옷 속을 투시하는 수준이지만, 투시 깊이와 선명도를 높이는 제품이 곧 개발될 것으로 보여 몸을 가린다는 옷의 기능은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 관음증을 가진 ‘재단사 톰’(백작 부인의 알몸 시위를 엿본 재단사 톰에서 유래된 말로 관음증 환자를 지칭)들이 이제 거리에서도 여성의 알몸을 감상할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온 것이다.

훔쳐보려는 욕망은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있지만, 그것이 중증일 때는 범죄가 될 수밖에 없다. 권영자 의원 등이 제출한 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성 행위와 관련된 훔쳐보기 범죄에 상당히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어떤 종류건 타인의 사생활 침해에 너무나 무감각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 참에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을 흡수하는 비밀보호법(가칭)을 제정해 공적·사적 비밀을 침해하는 모든 유형의 도청·도시(盜視)·무단 촬영·무단 녹음 행위를 광범위하게 규제하는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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