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수따기’식 개혁안 발표는 곤란
  • 李星鎬 (연세대 교수·전 교육부 대학정책실장) ()
  • 승인 1995.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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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만 고친다고 문제 해결 안돼…교수·학생 의식 변화 앞서야
교육 개혁이 정부와 국민의 큰 관심사로 대두된 최근, 각 대학에서는 각종 개혁 방안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이는 몇가지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우선 그동안 안일과 타성에 빠져 있던 대학들이 깨어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또한 대학은 밖으로부터 더 이상 보호 받거나 지배될 수 없으므로 대학 스스로 대학을 지키고 꾸려 나가야만 하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교육 개혁을 주도하고 추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머뭇거리고 있는 교육부에 경종을 울리며 개혁의 방향을 대학이 스스로 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최근 대학가에서 일고 있는 개혁 바람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볼 때, 지금 대학에 일고 있는 개혁 바람이 여러 측면에서 문제를 안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실천 가능성 검토부터

첫째, 대학 개혁의 기본 방향은 대학의 사명과 기능에 바탕을 두고 모색해야 하며, 그러한 기본 방향에 기초해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지금 대학이 추구해야 하는 보편적인 개혁의 기본 방향은 자율화·민주화·인간화·양질화·정보화의 다섯 가지로 집약되어야 할 것이다. 이 다섯 가지 방향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그같은 유기적인 연계 속에서 구상해야만 한다.

각 대학은 우선 총체적인 구도를 먼저 마련한 다음에 하부 구조 개혁 방안을 세워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사고를 선행하지 않은 채, 지엽적인 학사 개혁 방안만을 하나 둘씩 들고 나와서는 진정한 개혁을 이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최근에 저마다 발표하는 대학 개혁 방안은 우려감을 낳는다.

둘째, 개혁은 결코 전시 효과 식으로 추진될 수 없다. 유행을 타듯, 또는 그저 때를 놓치지 않고 한 건 발표해서 점수를 따겠다는 식의 찰나주의적이고 임기응변적인 개혁 방안 제시는 결코 창조와 지성을 바탕으로 삼는 대학다운 행동이라고 보기 어렵다. 어떤 개혁안이 발표되기까지는 그 개혁안에 대한 매우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서 실천 가능성을 검토하고, 구체적인 추진 전략을 수립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저 무엇인가를 내보여야만 하겠다는 강박 관념에 젖어 개혁안을 발표해서는 안된다. 과거에도 우리는 그러한 식의 개혁들이 한낱 구두선으로 끝나고 문서상으로만 기록에 남았을 뿐, 실제로 대학 현장에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음을 익히 경험하지 않았던가. 특히 지난날 정부가 그런 식으로 개혁에 접근했던 탓에 성공하지 못했음을 돌이켜 보면, 지금 각 대학이 거창하게 발표하는 개혁안들에 대해서도 우려를 금하기 어렵다.

셋째, 대학 개혁은 각 대학의 특성에 따라 좀더 주체적으로 개성있게 추진해야 한다. 결코 어떤 부류나 집단에 끼여야만 하겠다는 소속감 때문에 어떤 대학들이 어떤 개혁을 한다고 하니까 너도나도 따라 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예는 지난날 대학이 본고사 제도를 채택하는 과정이나 최근에 발표한 로스쿨 설치안에서 너무도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도 주체적으로 소신과 철학을 가지고 배짱 있게 살아야 하듯 대학도 줏대가 있어야 한다. 대학은 사회에서 흔히 외고 있는 대학의 순위를 스스로 깨고 일어서려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거의 매일 이어지는 대학들의 개혁안을 보면 마치 각 대학이 자기의 순서를 기다렸다가 줄줄이 발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각 대학은 분명한 철학과 소신을 갖고 배짱 있게 주체적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끝으로, 정부에서도 그러한 성향을 보이고 있어 안타까운데, 교육 개혁을 곧 제도 개혁인 줄로 착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점이 염려스럽다. 지금 한국의 교육 전체나 대학에서 본질적으로 문제되고 있는 것은 제도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예컨대 영어 교육은 국민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가르치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등학교에서 영어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예는 로스쿨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음식의 본질을 개선하지 않은 채 그릇만 바꾸어 낸다고 해서 그 음식이 맛을 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학이 필요로 하는 근본적인 개혁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이다. 교욱과 연구에 임하는 교수와 학생 들의 의식이 변해야 하고, 그것을 관리·운영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개혁되어야 한다. 제도를 바꾸기 이전에 그러한 사고와 행동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개혁이 우선적으로 추진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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