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공무원 1백69명 ‘편법 취업’ 실태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7.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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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공무원 1백69명, 절차 무시하고 ‘불법 취업’
한보 사태로 고위 공직자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가는 등 세상이 한창 시끄럽던 지난 3월 초 고위 공직자 한 사람이 퇴임했다. 61년 한국은행에 들어가 비서실장·국제부장·자금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95년 한국은행 부총재 자리에 올라 통화신용 정책을 주물렀던 류 아무개씨였다. 그가 퇴임과 동시에 자리를 옮긴 곳은, 개정된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고위 공직자의 취업이 엄격히 제한된 한 시중 은행이었다.

법이 엄격하게 지켜졌더라면, 그의 시중 은행 취업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현행 법은 퇴임 전 2년간 맡았던 업무가 취업 예정 업체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경우 퇴임 후 2년간 해당 업체 취업을 금하고 있다. 이같은 제한이 있는데도 굳이 해당 업체에 들어가고자 할 경우에는 관할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윤리위)의 심사를 거쳐 취업 승인을 받아야 한다. 더욱이 류씨가 들어가려던 시중 은행은 한보 사태에 휘말려 전임 행장들이 줄줄이 사법 처리된 곳이었다.

물론 그는 윤리위에 취업 승인 신청서를 제출하고 적법한 절차를 밟았다. 문제는 윤리위의 심사 태도였다. 류씨가 새로 맡을 직위(은행장)는 △최근 2년내 취업 예정 업체와의 업무 관련성 △취업 예정 업체에 취업했을 경우 해당 기관·단체와의 업무 관련성 및 영향력 행사 가능성 등의 심사 항목에 비추어 보면 누가 보아도 전직(한은 부총재)과 관련성이 많았지만, 윤리위는 별다른 문제 제기 없이 그의 취업을 승인했다. 류씨가 몸담았던 한국은행측은 그의 취업이 당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은행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절실한 것으로 보인다며 오히려 류씨의 취업을 적극 추천하는 의견까지 덧붙였다.
부정 부패 공무원이 대기업 임원으로 ‘영전’

문민 정부 초기에 공직자들의 권력형 비리를 사회 개혁 차원에서 방지하기 위해 손질한 공직자윤리법이 흔들리고 있다. 퇴임 공직자들이 사기업체에 취업할 때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이를 엄격히 심사하는 취업 관련 규정과, 공직자들의 재산 변동 상황을 한눈에 파악해 부정 및 비리 가능성을 추적·감시할 재산 공개 관련 규정이 사문화하고 있는 것이다. 공직자 부패 문제를 집중 감시하는 시민 단체와 일부 행정 전문가들은 ‘이럴 바에는 차라리 공직자윤리법을 없애고 다른 대안을 강구하는 게 낫다’고까지 목소리를 높인다.

업무 관련성이 밀접한데도 사기업체 취업을 승인받은 류씨의 경우는 형식적이나마 윤리위 승인을 거쳤다는 점에서 나은 편에 속한다. 공직에서 물러난 고위 관료 대부분은 업무 관련성 면에서 류씨의 경우보다 훨씬 더 밀접한 연관이 있는 회사에 취업하면서도, 취업승인신청서 한 장 내밀지 않았다. 94~96년 3년 동안 공직을 떠난 4급 이상 국가 공무원 1천9백11명 가운데 법으로 정한 취업 제한 고시 업체에 취업한 인원은 모두 1백75명. 그 가운데 규정을 지켜 윤리위 승인을 받은 사람은 고작 6명이며, 나머지는 모두 소속 기관 감사담당관의 형식적인 서류 검토만 거쳐 취업했다.

이같은 사실은 조한천 의원(새정치국민회의)이 국정감사를 준비하면서 총무처를 통해 입수한 자료에서 밝혀졌다. 이 자료에 따르면, 사기업체에 취업한 퇴직 공직자를 가장 많이 낸 기관은 국방부이며, 재경원·정보통신부·통상산업부 등 주요 경제 부처의 고위직 공무원과 중소기업은행·한국수출입은행 등 국책 은행에서 퇴직한 임원 상당수가 취업 제한 고시 업체에 진출한 것으로 나타났다(도표 참조). 반면 같은 기간 윤리위에 취업승인신청서를 제출해 승인이 보류된 경우는, 지난해 SK텔레콤(전 한국통신)의 정보통신본부장 자리에서 해임된 송 아무개 국장(현재 ㅇ통신 부사장) 한 사람뿐인 것으로 밝혀졌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정부 기관의 요직에 앉아 있는 동안 독직이나 수뢰 등 각종 부정을 저지른 공직자들까지 업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기업에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취업했다는 점이다. 현재 삼성경제연구소에 재직하는 이종화씨와, LG그룹에서 일하는 정재호씨 두 사람은 각각 공정거래위원회의 독점국장(2급)과 정책국장으로 재임하던 중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큰 파문을 일으켰던 인물들이다.

까다로운 승인 절차를 피하기 위해 기업 스스로가 아예 ‘우회 입사’라는 편법으로 공직자를 채용하는 사례도 있다. 현재 삼성자동차 전무로 있는 홍순직씨가 이같은 사례의 본보기로 지목된다. 홍씨는 삼성이 자동차산업에 진출한 94년 상공부(현 통상산업부) 수송기계과장으로서 삼성이 낸 자동차 기술도입 신고서를 수리한 주무 부서의 실무 책임자였다. 95년 취업 제한 규정을 피해 삼성경제연구소에 우회 입사한 홍씨는 96년 삼성자동차로 자리를 옮겼다. 업계 주변에서는 그가 삼성자동차의 기아자동차 합병·매수 시비가 터질 때까지 통상산업부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며 정부 로비를 전담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홍씨의 경우처럼 사기업체에 취업한 퇴임 공직자의 상당수는 과거 자기가 일했던 정부 부처·기관·단체를 상대로 한 로비에 나서고 있다. 이는 95년 효산콘도 비리 사건을 폭로해 자기가 일하던 감사원에서 사실상 쫓겨난 현준희씨의 증언으로도 간접 확인된다.

현씨는 감사원 재직 때 한국통신(현 SK텔레콤)이 추진한‘신용카드 전화기 사업’을 감사한 적이 있다. 현씨가 조사한 결과 그 사업은 문제투성이임이 드러났지만, 감사원은 이런 감사 결과에 대해 징계·시정·개선 요구 및 권고 등 감사원이 동원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행사하지 않았다. 현씨는 아직도 당시의 감사에 한국통신측의 로비가 작용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는 실제로 감사 현장에서 감사원 국장을 지냈던 한국통신 신 아무개 감사로부터‘잘 봐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현씨처럼 공직에 있을 때 부정·비리를 폭로했던 양심적인 공직자들은 직장에서 물러난 이후 변변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
고위 공직자가 퇴임 후 사기업체에 들어가 재임 기간에 쌓은 전문성과 경륜을 발휘하는 일은 국가 이익을 위해 오히려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간단치가 않다. 공직자의 부패 문제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퇴임 공직자에 대한 제한 없는 사기업체 취업 허용은 정(관)·경 유착을 강화하고 부패의 싹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영종 교수(숭실대·행정학)는 “문제는 부정한 방법을 동원한 로비 가능성이다. 로비스트의 자격과 활동이 법으로 엄격히 제한된 미국에서조차 ‘미국은 로비에 의해 이익 단체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로비의 해악은 크다. 이를 방치할 경우 공직자 사회의 정화는 공염불에 그칠 공산이 높다”라고 지적한다.

“공직자윤리법 폐지, 부패방지법 신설”

조한천 의원은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되었던 공정거래위 두 국장의 사례를 들면서 “관련 규정을 강화하여 최소한 재직중 업무 비리와 연관되어 형사 처벌을 받은 사람이 재직중 업무와 관련이 있는 사기업체에 들어가는 일만큼은 막아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반부패 활동을 활발히 펼쳐온 ‘참여 사회를 위한 시민연대’(참여연대)의 입장은 한층 더 강경하다. 참여연대 김창국 공동 대표는 “현행 공직자윤리법으로는 한계가 있다. 공공의 이익에 합치되는 한, 기본권의 일부를 제한하면서라도 부패 통로를 차단해야 한다. 이를 실현할 장치가 바로 부패방지법이다”라고 주장한다.

현행 법에 따르면, 국가 기관 및 공직 유관 단체의 장은, 취업 제한 대상자가 퇴임한 경우 2년간 취업 상황을 점검하여 윤리위에 보고해야 한다. 그러나 조한천 의원의 조사에 따르면, 개정 법안의 효력이 발효된 93년 7월 이후 이 조항을 지킨 사례는 97년 9월 현재 단 1건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직자윤리법이 겉도는 동안 제2, 제3의 한보 사태를 부를지도 모를 부패 공간은 더욱 넓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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