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에서 지옥으로 간 사학 재벌 ‘황태자’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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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천씨 ‘살인 교사→무죄→무기 징역’ 전모 추적
‘예일·운화 학원 김예환 이사장의 작은 아들 김희천씨(42·재단 사무처장)는 급식업체를 선정하면서 리베이트로 2억5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었다.(중략) 김이사장은 교복을 선정하면서 리베이트로 1천1백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었다. (중략) 전교조가 김씨 부자의 재산 관리인 이 아무개씨(53)를 통해서 파악한 비리 내용은 훨씬 다양하고 구체적이다.’

2000년 <시사저널> 제578호(11월15일자)가 보도한 ‘곪아도 안 터지는 사학 비리’ 기사 가운데 한 대목이다. 당시 <시사저널>은 예일여고 ·환일고교 등 7개 학교를 소유한, 대표적인 사립 학교 재벌 ‘김예환 왕국’의 이면을 파헤쳤다. 깊숙이 가려진 치부는 내부 고발자나 다름없는 김예환 이사장의 재산관리인 이 아무개씨 제보를 계기로 세상에 알려졌다.

얼굴 없는 제보자 이기만씨(56·가명). 한동안 그와 연락이 끊겼다. 지난해 1월, 3년 만에 전해진 그에 대한 소식은 비보였다. “이기만씨가 청부 살해 되었다.” 사립 학교 비리와 관련해 이씨와 접촉했던 반부패국민연대 고상만씨(현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의 말을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지난해 1월21일 이씨는 고용된 킬러에게 살해되었다.

지난 3월31일 서울고등법원 형사 5부는 김희천씨를 이씨에 대한 살인교사죄로 무기 징역에 처했다. 지난해 11월 김씨는 1심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었다. 무죄에서 무기 징역으로 180° 운명이 바뀐 김희천씨(46). 그는 사학 재벌 김예환씨(80)의 차남이고 그의 후계자다. 경기고와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했고, 하버드 대학 교육대학원 교육행정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KS표에 하버드 박사학위까지 받은 최고 엘리트인 그가 살인교사범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 날 김씨는 법정 구속되었다. 김씨는 마지막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그가 다시 파기환송 판결을 받아 무죄가 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하지만 그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재판 과정이 또 다른 추문거리였기 때문이다.

2003년 1월21일 이기만씨는 법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김희천씨와 소송 재판이 열린 날이었다. 그런데 김희천씨 변호인이 바뀌면서 재판 일정이 연기되었다. 이씨는 그런 줄도 모르고 집을 나섰고, 뒤따르던 아반떼 승용차가 그를 치었다. 승용차에서 내린 청년이 이씨를 병원에 데려가겠다며 함께 타자고 했다. 이씨는 아무런 의심 없이 승용차에 올라탔다. 승용차는 병원이 아니라 인적이 드문 경기도 성남시 상적동 노루뱃길로 향했다. 그곳에서 이씨는 낯선 청년 2명에게 살해되었다.

이씨를 납치해 살해한 반 아무개씨(34)와 곽 아무개씨(28)는 이씨와 어떤 관계도 없다. 단지 사채와 카드빚을 갚아 주겠다는 유혹에 넘어가 살인을 저질렀다. 이들은 범행 하루 만에 춘천경찰서에 붙잡혔다. 반씨가 평소 안면이 있는 최 아무개씨에게 부탁해 시체를 암매장하려다, 최씨 신고로 덜미가 잡혔다. 둘 다 실형 전과 기록이 없는 아마추어였다.
특히 범행에 가담한 곽 아무개씨는 세계청소년유도대회에 나가 동메달을 딸 만큼 유능한 유도 선수였다. 곽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인대를 심하게 다쳐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자 학교를 자퇴했다. 카드 빚 3천만원 때문에 곽씨는 범죄에 가담했다. 반씨 역시 사채 3천만원이 화근이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에게 청부 살해를 요청한 사람은 김순환씨(45)였다. 수배된 김씨는 지난해 3월 부천에서 검거되었다. 검거 과정에서 김씨는 도망치다가 7층에서 떨어져 골반을 심하게 다쳤다. 김씨가 체포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 확대되었다. 김순환씨마저 이기만씨와는 원한 관계가 없었다. 굳이 청부 살인을 교사할 뚜렷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무직이나 다름없었고 곽씨와 반씨의 카드 빚을 갚아줄 재력가도 아니었다.

경찰은 김순환씨보다 윗선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윗선이 바로 김순환씨와 초등학교 동창이자 사학 재벌의 황태자 김희천씨였다. 김희천씨와 이기만씨는 앙숙 관계였다(상자 기사 참조).

검거된 김순환씨는 경찰 조사와 검찰 1차 조사 때까지 김희천씨가 사주했음을 시인했다. 주임검사이던 춘천지방검찰청 이진우 검사는 검찰에 송치된 첫날부터 김순환씨를 직접 신문했다.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진술을 비디오에 담았고, 변호인 입회도 허락했다. 이검사는 정공법을 택했다. 신원 조사를 한 뒤 “김희천으로부터 이기만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받아 두 사람에게 살해하라고 했느냐”라고 물었다. 김순환씨는 “예, 사실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김순환씨 변론을 맡은 유 아무개 변호사가 중요한 대목에서 끼어들어 조사를 2~3일 늦추어 달라고 했다. 이검사는 거부했다. 그러자 유변호사는 갑자기 단독접견권을 요구했다. 접견권을 허락하지 않으면 김씨에게 진술을 거부하게 하겠다고 했다. 이검사는 고심 끝에 15분 동안 접견권을 허락했다. 접견을 마치자, 다시 유변호사는 김씨가 아프다며 병원에서 조사받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병원으로 옮겨 진술을 시작하면서부터 김순환은 2심이 끝날 때까지 김희천 몰래 자신이 모두 지시했다고 말을 바꾸었다.

나중에야 이검사는 유변호사의 이상한 행동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유변호사는 김씨가 검찰에 송치되기 전에 서울로 올라가 김희천씨를 직접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김희천씨 고문 변호사인 이 아무개 변호사는 “유변호사가 김박(김희천)을 만나서 수임하겠다고 했다더라. 김박이 유변호사가 속한 법무법인에 사건을 주는 방식으로 선임료를 주기로 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변호사는 “1년 전 일이다. 기억도 안 나고 내가 굳이 확인해줄 필요가 있느냐”라고 말했다. 비공식 선임을 했다면 유변호사는 이중 플레이를 한 것으로 ‘옐로 카드’감이다. 유변호사가 속한 법무법인 대표는 현재 여권의 유력 국회의원이다. 그 역시 선임계에 이름이 올라 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들의 이해할 수 없는 일탈은 계속되었다. 김희천씨는 검거되기도 전에 반 아무개씨와 곽 아무개씨 수사 기록을 미리 확보하고 치밀하게 고문 변호사와 대비했다. 담당 변호사나 피고인 가족도 아닌 제3자에게 수사 기록이 유출된 것이다. 검찰이 확인해 보니 김희천씨는 고문 변호사 이 아무개씨로부터 수사 기록을 넘겨받았다.

김희천씨는 관련자들의 진술서를 받고 몰래 대화까지 녹취해 검찰 수사에 대비했다. 고문 변호사 이 아무개씨는 “2000년 공금 횡령으로 조사를 받던 때 너무나 억울하게 당해서 미리 준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수사 기록을 확보한 것은 자신의 사무장이 혼자서 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변호사업계 관행상 사무장은 변호사 허락을 받고 움직인다.

김희천씨는 지난 5월 구속 기소되면서 대규모 변호인단을 꾸렸다. 검사장 출신부터, 부장판사로 있다가 옷을 벗어 전관예우를 받을 수 있는 변호사까지 4명을 선임했다. 지난 11월3일 1심 선고 공판에서 살인교사 혐의에 대해 김씨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기만씨 유가족은 ‘무전 유죄, 유전 무죄’를 실감했다고 한다. 유가족뿐 아니라 반 아무개씨와 곽 아무개씨 변론을 맡은 박연철 변호사마저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었다. 박변호사는 대법원 상고 이유서에서 ‘사건의 배후이자 중심(김희천)은 무죄를 받고 피고인들이 더 중한 무기 징역을 받았다’고 밝혔다.
무죄 판결을 받은 김희천씨는 자기가 선임한 김 아무개 변호사와 골프를 치는 등 여유를 찾았다. 김희천씨에 대한 무죄 선고는 2심에서도 이어질 듯했다. 적어도 이진우 검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1심부터 주임검사이던 이검사는 무려 73쪽에 달하는 항소이유서를 통해 조목조목 1심 재판부의 무죄 판결을 반박했다. ‘망각’ ‘과오’ ‘오류’ 같은, 웬만해서 쓰지 않는 용어를 쓰며 1심 재판부의 판결을 강하게 비판했다. 김희천씨의 유죄를 확신하는 간접 진술뿐 아니라 범행에 쓰였던 ‘대포 휴대전화’를 확보하면서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청부살인자들은 아마추어였지만 대포 차와 대포 휴대전화를 준비하는 등 범죄 준비는 치밀했다. 김순환씨와 반 아무개씨는 서로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해 대포 휴대전화 2대를 빌렸다. 한 대는 반 아무개씨가, 한 대는 김순환씨가 사용했다. 이 휴대전화는 범행에만 사용했고, 범행 후 당일 고속도로 변에 버렸다. 누구도 번호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검사는 경찰을 동원해 반 아무개씨가 동거녀 이름으로 대포 휴대전화를 빌렸다는 서울 청계천 가판 휴대전화 대여점을 전부 조사했다. 발로 뛴 결과 대포 휴대전화 번호를 찾아냈다. 통화 기록을 조회해 보니 김순환씨가 사용한 대포 휴대전화에서 범행 직후 김희천씨의 집으로 통화한 기록이 나왔다. 완전 범죄를 깨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엽기적인 청부 살인에 이은 무죄 판결, 이를 뒤집은 무기 징역. 지난 1년 동안 이기만씨 가족은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지난 4월3일 이씨의 부인 엄 아무개씨(56)는 아들과 함께 서울 강남 능인선원을 찾았다. 엄씨는 장미꽃 한아름을 안고 남편의 유골이 보관된 납골당에서 통곡했다. 지난 3월31일이 결혼 30주년 기념일이었다. 대법원 판결이 두렵다는 엄씨는 불을 끄고는 잠자리에 들지 못한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갇힌 김희천씨 역시 24시간 불이 켜진 상태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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