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는 ‘빌딩 바람’보행자 생명 노린다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6.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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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건물에 부딪혀 발생…‘바람 환경 평가’ 제도화 시급
보통 40층이 넘는 건물을‘초고층 빌딩’이라고 부른다. 이같은 건물을 지을 때 가장 먼저 고려되는 사항은 지진에 대한 대비책이다. 일정 강도의 지진에 견딜 수 있게끔 이른바 ‘내진 설계’를 하는 것이다. 60층이 넘는 건물은 ‘초초고층 빌딩’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건물을 지을 때는 우선 고려 사항이 달라진다. 이 경우 건물의 안전에 영향을 미치는 최대 요인은 바람이다. 바람은 지상에서 상공으로 올라갈수록 높이와 비례해 속도와 세기가 강해지는 특성을 갖는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높은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면 세찬 바람에 옷깃을 여며야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초초고층 건물을 지을 때에는 바람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안전 장치를 마련한다. 건물 윗 부분을 바람의 진행 방향에 맞추어 앞뒤로 조금씩 흔들리게끔 설계한다거나, 건물 주변에 작은 건물을 지어 큰 건물과 한데 묶는 방법이 그것이다. 전자는 바람에 의한 건물 하중을 줄이기 위한 것이며, 후자는 바람에 의해 건물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건물이 좌우로 진동하는 까닭은, 바람이 건물에 부딪힌 뒤 바로 지나가지 않고 건물을 휘감으며 지나가기 때문인데, 이같은 바람을 학자들은‘칼만(Karman) 와류’라고 부른다. 또 이같은 진동을 막기 위한 설계를 ‘제진 설계’라고 부른다. 초고층 이상 건물은 저마다 형태와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이같은 제진 장치를 갖추고 있다.

제진 설계와 안전 장치로 바람의 영향에 대한 대비가 완벽하다고 볼 수 있는가. 바람의 영향을 환경공학 측면에서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이다. 오히려 이들은 초초고층 건물에 대한 바람의 영향은 건물 위로 올라갈수록 심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렇다고 아래로 내려가면 훨씬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도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니라고 경고한다.

일반인에게는 아직 생소하지만 바람의 종류 가운데에는 고층 건물의 벽에 부딪혀 발생하는 ‘빌딩 바람’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일정한 높이 이상 부는 바람은 건물의 옥상을 타고 넘어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건물 높이 3분의 2 아래쪽에 부딪힌 바람은 대부분 건물 아래로 하강했다가 다시 방향을 틀어 건물 옆으로 빠져나가는 특성이 있다. 이를 측류(corner stream)라고 한다.

건물에 부딪힌 바람 중 일부는 대개 건물 아래 중앙 부분에 설치되어 있기 마련인 보행 통로나 공간이 있는 곳으로 빠져나가기도 하는데, 이를 통과류(through flow)라고 부른다.

초초고층 건물에 부딪힌 바람은 다시 주변의 낮은 건물에 부딪혀 일종의 소용돌이가 되는데, 이 때 발생한 바람의 유형은 와류(vortex flow))라고 불린다.
산책하던 노인, 강풍에 쓰러져 사망

문제는 측류가 되었건 와류가 되었건 또는 통과류가 되었건 일단 건물 벽에 부딪힌 바람은 지상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때때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강풍으로 돌변한다는 사실이다. 빌딩 바람 전문가인 김영덕 교수(관동대·환경공학)는 “경우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보통 이렇게 해서 지상에 내려온 바람의 세기는 건물 꼭대기에서 부는 바람보다 세기가 2배 이상이 되기도 한다”라고 설명한다.

도시의 고층화가 진행되고, 빌딩 바람의 영향일 것으로 의심되는 피해 사례가 급증하면서, 최근 빌딩 바람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 가고 있다. 관동대·연세대 등 학계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를 비롯한 몇몇 연구기관의 전문가들은 벌써 몇년 전부터 빌딩 바람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관련 전문가 20여 명으로 구성된 이 모임은 빌딩 바람의 실체를 연구하고, 세미나를 열어 빌딩 바람이나 이와 관련된 ‘바람 환경 영향 평가’라는 개념을 건축학계에 도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빌딩 바람의 존재는 70년대 중반까지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92년 5월 영국에서 고층 건물 주변을 산책하던 한 노인이 강풍에 쓰러져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주목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빌딩 바람은 크게 사람과 건물, 영업 활동, 자연 환경에 장해를 일으킨다. 대표적인 것은 물론 신체에 끼치는 장해이다. 펜워든이라는 건축학자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바람이 초속 10.8 ~13.8m로 불면 사람들은 보행에 불편을 느낀다. 초속 17.2~20.7m 상태에 이르면 앞으로 나아가기가 곤란하다. 초속 20.8~24.4m에 이르면 사람의 몸이 바람에 날려 넘어지게 된다. ‘위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아래 표 참조).

세차게 부는 빌딩 바람은 바람이 부는 지역을 먼지투성이로 만들거나, 쓰레기를 날리기도 하고, 입간판을 쓰러뜨리는 등 영업 활동과 자연 환경에 장해를 주기도 한다. 강풍에 목욕탕 굴뚝이 무너지거나, 신축 공사장에서 비계가 내려앉는 사고는 주변에서 자주 목격되는 일이다. 이 때 일반인들은 그저 일기가 나쁘거나 바람이 세게 불어서 그렇거니 하지만, 전문가들의 생각은 다르다. 사고가 발생한 현장 주변에 고층 건물이 있으면 사고의 원인은 빌딩 바람과 관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 것이다.

건물 모양 바꾸거나, 風穴로 예방 가능

빌딩 바람의 또 다른 문제는 언제 어느 정도 세기로 부는지 파악하기 힘든 ‘예측 불가능성’과, 그에 따라 대책을 세우기가 어렵다는 점에 있다. 70년대 중반 캐나다의 바람 학자 다벤포트는 확률 개념을 도입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예컨대 특정 지역(또는 건물)에 대해 대책을 세울 경우, 일단 그 지역에 연중 부는 풍속을 측정하고 그 가운데 강풍이 부는 날을 일정 횟수 이하로 떨어뜨리기 위해 방풍림을 조성한다거나 건물 설계를 바꾸는 것이다. 다벤포트에 따르면, 평가 대상 지역이 보도 구역일 경우, 뷰포트 넘버 6(뷰포트가 정한 풍력 계급의 단위·초속 10.8~13.8m) 상태는 연중 발생 횟수가 주 1회 미만이어야 한다.

이처럼 선진 외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빌딩 바람 영향 평가 개념이 실제 건축에 적용되어 왔다. 주요 대책은 정해진 목표에 맞게 방풍림을 조성하는 것이지만, 설계 단계에서 건물의 배치를 변경하거나 건물의 모양을 일부 바꾸고, 바람이 빠질 수 있게 풍혈(風穴)을 설치하는 방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일본은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환경영향평가 조항을 두면서 바람 환경에 대한 조항을 삽입해 15층 이상 건물에 대해서는 의무적으로 평가를 받도록 규정했다. 한 예로 일본 도쿄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일본전기(NEC)는 43층짜리 사옥을 지을 때 설계 단계에서부터 빌딩 바람에 대한 영향 평가를 실시해 10층과 13층 사이에 풍혈을 설치했다. 건물 윗부분에 부딪힌 바람이 아래로 내려가 강풍으로 돌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바람 빠지는 구멍을 낸 것이다.

국내의 경우, 빌딩 바람은 극히 최근에야 본격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표 사례는 92년 대전 정부제3종합청사를 설계할 때‘바람 환경 영향 평가’를 실시하면서 이 개념을 도입한 것이 고작이다. 그나마 청사 설계를 건설교통부(당시 건설부)가 심의할 때 무사 통과되려던 원안에 대해 참석했던 관련 전문가 한 사람(연세대 이경희 교수)이 제동을 걸어 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을 정도로 빌딩 바람에 대한 국내의 인식은 전무한 상태이다.

92년 건축학회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바람 환경’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열었다. 당시 세미나에서는 여의도 63빌딩, 강남 무역센터, 인터콘티넨탈호텔 등 한국의 대표적인 고층 건물 주변이 빌딩 바람의 위험에 드러나 있음이 관련 전문가들에게 지적되기도 했다.

빌딩 바람의 해를 입은 사례가 발생해도 피해자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상황은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김영덕 교수(관동대·환경공학)는 “특히 문제가 되는 곳은 어린이·노약자 등 인구가 밀집해 있는 대규모 고층 아파트 지역이다. 재산상의 피해는 물론 인명 피해가 우려된다”라고 말한다. 건축법 손질, 관련 조항 조례화 등 법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빌딩 바람은 여전히 ‘고층 건물 공간의 불청객’으로 보행자들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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