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 약값 깎기’ 팔 걷은 개업의들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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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사는 고가 약값 내려라” 요구…종합병원·약사 동참 여부 관심
경기도 성남시에 사는 최 아무개씨(40)는 한 달에 두 번 병원을 찾는다. 치료약을 살 처방전을 받기 위해서다. 2000년 8월 최씨는 B형 간염 판정을 받았다. 교통사고를 제외하면 사망률이 가장 높은 질환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의사는 탁월한 치료약이 있다며 최씨를 안심시켰다. 글락소 스미스 클라인(GSK) 사가 1999년에 개발한 ‘제픽스’였다. 하지만 대체약이 없기 때문에 비싸다는 것이 이 약의 흠이었다.

비싸지만 목숨을 구하는 약이나 다름없어 최씨는 그때부터 제픽스를 복용했다. 당시 한 알 가격은 3천9백16원. 매일 한 알씩 복용해야 하는데, 건강보험 대상이어서 한 달에 3만6천원만 내면 한 달치 약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1년 뒤부터, 최씨의 약값은 매달 13만원이 들었다. 약값이 올라서가 아니다. 현재 제픽스는 한 알에 3천8백77원으로 오히려 떨어졌다. 건강 보험 혜택을 한푼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최씨가 약값을 100% 부담해야 한다.

샐러리맨 생활 15년째, 직장 건강보험료가 월급에서 꼬박꼬박 빠져나가지만, 최씨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이 중병에 걸렸는데도 건강보험 혜택을 한푼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픽스가 고가약이기 때문이다.

의약분업 초기, 정부는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의사들이 고가약 처방을 남발하는 것이었다. 의약분업 전에 전체 약품의 26%였던 고가약 처방이 분업 후에는 56%까지 늘었다. 고가약 처방이 증가하면서 건강보험 재정은 밑 빠진 독이 되고 말았다.

결국 건강심사평가원(심평원)은 고가약 처방을 줄이기 위해 까다로운 심사 기준을 만들어, 조건에 어긋나면 보험 지급 대상에서 제외했다. 제픽스도 간효소치가 100 이상인 경우에 한해서, 그것도 최대 1년 동안만 보험 혜택을 볼 수 있게 제한했다. 최씨처럼 간효소치가 100 이상이더라도 1년 후부터는 무조건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식이었다. 고가약 처방 남발→보험 재정 악화→비급여 대상 확대라는 악순환 때문에 최씨는 건강보험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고가약 처방 남발은 개원의들에게도 부메랑이 되었다. 재정 악화를 막기 위해 심평원이 제동을 걸었다. 심평원은 고가약 처방을 많이 한 병원에 대해 현장 실사를 포함한 정밀 조사를 벌였고, 청구된 진료비마저 삭감해 버렸다.
뒤늦었지만 의사들이 스스로 고가약 처방의 악순환을 깨겠다고 나섰다. 지난 4월27일 대한개원의협회(대개협·회장 김종근)가 고가약 처방을 줄이고, 제약사에게는 고가약 가격 인하를 권고했다. 회원 2만1천 명을 둔 대개협이 제약사를 상대로 고가약 가격 인하를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의료계에서는 신선한 반란으로 받아들여졌다.

대개협은 이 날 전격적으로 고가약조정위원회(장동익 위원장)를 발족했다. 우선 12개 제약사 18개 제품을 지적해 제약사 스스로 약값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약값을 인하하지 않으면 그 회사의 약품을 쓰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대개협이 인하 대상으로 삼은 고가약은 심평원에서 보험금 지급이 삭감되는 약품들 위주로 선정했다. 제픽스·아반디아(한국글락소스미스클라인) 포사맥스·바이옥스(한국MSD) 세레브렉스(한국화이자제약) 엘도스(대웅제약) 오메프라졸(한국아스트라제네카) 등이다. 국내 제약사 약품도 있지만 주로 다국적 제약사 약품들이다.

사실 의사들의 반란은 지난해부터 준비되었다. 지난해 10월 대한내과개원의협회 장동익 회장과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이 의기 투합했다. 김의원은 의약분업 신봉자이자 의료개혁주의자여서 의료계에서 내놓은 ‘공적’이었다. 하지만 고가약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김의원과 장회장이 의견 일치를 보았다. 장회장은 김홍신 의원과 함께 정부·국회·시민단체가 참여하는 ‘범 고가약 조정위원회’를 발족하려 했다. 그러나 의료계 내부에서 공적인 김홍신 의원과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반발이 나오면서 반란은 주춤했다. 연말을 넘기면서 급한 대로 우선 의료계만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한때는 듬직한 아군이던 의사들의 기습 행동에 대해 다국적 제약사들은 겉으로는 태연하다. 국내에 진출한 29개 외국 회사가 회원인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는 공식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협회 관계자는 “일단 지켜볼 것이다. 회원사들로부터 어떤 대응 요구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자는 “한국 제약사가 연구비로 100원을 투자하면, 우리는 4천원을 투자한다. 그래서 높은 가격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약을 단지 가격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제약사만 손해 보고 값을 내리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겉으로는 태연하지만, 대개협의 1차 타깃으로 선정된 해당 기업은 물밑 움직임이 활발하다. 기자회견 다음날, 외국 제약사 2개는 장동익 회장 병원을 직접 찾았다. 또 다른 외국계 제약사 두 군데는 자사 제품 3개의 가격을 자진 인하하겠다고 제안했다.
고가약 인하 운동의 성패는 대형 종합병원들의 동참 여부에 달렸다. 아무래도 고가약 소비는 1차 진료기관(개원의)보다 3차 진료기관인 종합병원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고가약의 65%를 종합병원이 소화한다.

의약분업의 한 축인 약사들의 움직임도 관건이다. 고가약조정위원회 장동익 회장은 약사회를 방문해 동참을 요구할 작정이다. 그러나 약사들의 시선이 따뜻한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약값 결정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신형근 정책국장은 “좋은 시도이지만 약가 계약제 등 합리적인 약가 결정을 위한 근본적인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성분명 처방이나 대체 조제 등 그동안 약사회가 요구한 의약분업 개선안에 대한 의사들의 기선제압용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약값이 비싸면 보험 혜택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B형 간염 감염자 최 아무개씨. 그는 지난 4월23일 퇴근길에 병원을 찾았다. 그는 제픽스를 살 수 있는 처방전을 병원에서 받았다. 처방전을 받는 데 드는 1만5천원도 본인 부담이다. 최씨는 약국에서 100% 본인 부담으로 제픽스 15알을 샀다. 연말 정산을 받기 위해 그는 카드로 결제했다. 6만7천5백원짜리 카드 영수증이 그에게 돌아왔다. 이틀 후 최씨는 월급 명세표를 받았다. 명세표에는 건강보험비 5만2천원이 공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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