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 대란이 즐거운 길거리 행상의 하루
  • 성기영기자 ()
  • 승인 1996.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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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행상의 하루/명절 때는 ‘야근’도 불사… ‘역귀성’ 풍속 등으로 매상 줄어
 
‘길뚫리면 망하는 사람들’. 몇년 전부터인가 고속도로·국도를 가리지 않고 교통 체증이 극심한 구간을 찾아다니며 음료수·오징어 따위를 파는 행상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연휴가 나흘이나 겹쳐 이번 추석에 전국의 도로를 메울 인파는 지난해보다 10% 정도 늘어나리라는 전망이다. 건설교통부는 연휴 기간에는 귀향 인구 1천2백30만명을 비롯해 2천9백만명이 대이동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 중에 서울에서 출발하는 귀성객은 4백50만명이고, 이 가운데 53%가 승용차를 이용할 것이라고 한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귀성 전쟁에 익숙해진 자가 운전자들은 이제 교통방송을 들으며 세련되게 우회 도로를 선택해 보기도 하지만, 숨바꼭질하듯 쫓아다니는 교통 체증을 피해 달아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지루함을 못이겨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거나, 피곤을 덜기 위해 운전대를 옆 사람에게 넘겨줄 때쯤이면 행상들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시속 10~20km구간이 요지


정미경씨(37·가명)가 고속도로에서 ‘근무’한 지는 이제 막 2년이 지났다. 그가 취급하는 품목은 음료수·오징어·쌀강정 따위이다.

정씨가 매일 오후 2∼3시쯤 출근하는 직장은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이 끝나는 서울 서초구 잠원동 고속도로 위. 정씨의 하루 일과는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서 물건을 사 이곳까지 승합차를 몰고와 고속도로 주변 주택가 이면 도로에 차를 세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징어나 뻥튀기만 팔 때는 별로 필요가 없었으나 여름철에 음료수를 팔기 시작하면서 소형 아이스 박스를 실을 수 있는 간이 손수레도 하나 마련했다. 물건을 많이 싣는 데는 손수레가 좋지만 단속이 시작되면 골칫덩어리일 뿐이다. 고속도로 위라 숨을 곳이 없어 고속도로 순찰 차량이 나타났다 하면 숲이 우거진 도로 옆 비탈길을 따라 ‘긴급 대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속을 피해 손수레를 품에 안다시피 하고 비탈길을 내닫다가 굴러떨어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단속을 피하려면 ‘퇴로’가 열려 있는 곳을 절묘하게 선택해야 한다. 방음벽이 설치된 구간은 피해야 한다.

요즘 정씨가 일하는 곳은 매일같이 오후 3~4시부터 서울로 들어오는 차량들이 10∼20㎞로 거북이 걸음을 하는 구간이라 이런 장사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정씨의 이동 구간은 채 2백m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2년 전 정씨보다 먼저 장사를 하고 있던 상인들보다 뒤쪽에 자리를 잡는다는 조건으로 어렵게 확보한 자리이다. 게다가 여기저기 비집고 들어오려는 새 행상들과 멱살잡이 직전까지 간 것도 여러 번이다.

해마다 설이나 추석 연휴가 되면 이런 일은 경부·호남 고속도로를 가리지 않고 전국적인 현상이 된다. 2시간 거리인 서울~대전이 8∼10시간, 5시간 거리인 부산까지 무려 15시간이 걸리기도 하는 극심한 교통 전쟁에서 예외인 곳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명절 연휴 때면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가 만나는 남이 분기점이나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만나는 회덕 분기점이 이들의 단골 무대이다. 심지어 대전 이북의 고속도로변 비상 활주로 파견 기지를 지키는 경비병들까지 명절 연휴 기간에 비번 시간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기도 했었다.
이들 고속도로 주변 행상들이 맨몸으로 뛰는 ‘솔로’라면, 서울 근교 국도변 또는 퇴근 무렵의 올림픽대로를 무대로 활동하는 부부들은 ‘듀엣’이다. 판교∼구리간 고속도로가 끝나는 지점인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은 판교에서 구리·서울 방향과 퇴계원 네거리에서 구리·서울로 향하는 차량이 합쳐지는 경기 북부 일원의 대표적인 상습 정체 구간이다.

이 곳에서 1년째 번데기와 오징어 등을 팔고 있는 신성준씨(40·가명)는 부부가 함께 오후 내내 이 국도변을 지킨다. 신씨는 아예 소형 트럭을 개조해 이동 매점을 갖추고 나섰다. 매점을 갖추는 데 든 돈만도 적지 않았다. 요즘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안 파는 곳이 없는 ‘맥반석 오징어’를 판매하기 위해 청계천에 나가 맥반석을 구입하는 데만 20만원을 쓴 데다 가스·전기 시설과 손님을 끌기 위한 최신 오디오까지 갖추느라 ‘창업 비용’이 1백50만원을 훌쩍 넘었다.

 
하루 매상 고작 3만~4만원 수준


그러나 들인 돈에 비하면 최근 매상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약간 ‘엄살’이 섞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신씨에 따르면 ‘하루 매출이 고작해야 3만~4만원 수준’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단속에라도 걸리면 하루 매상의 꼬박 두 배를 벌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에 가끔씩 출동하는 경찰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는다.

즉심에 넘겨져 법원을 드나든 경험만도 여러 차례이다.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판매량이 줄어 요즘 신씨는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전에는 구리∼퇴계원간 국도변에 트럭을 갖다 대면 퇴근 무렵 ‘짭짤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전 여기서 북쪽인 진접읍 쪽으로 우회 도로가 뚫리면서 차량이 분산되자 행상들도 하나둘 떠났다. 신씨도 ‘근무지’를 현재 위치로 옮겼다. ‘길 뚫리면 망한다’는 이 바닥의 서러움을 신씨는 요즘 어느 때보다 질기게 곱씹고 있다.

차량이 밀리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렇듯이 여기에도 얄미운 운전자들이 있다. 정지 신호에 대기하면서 차창 너머로 물건을 건네 받고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돈도 안 내고 내빼 버리는 얌체족이다.

하루가 다르게 매상이 줄어드는 데다 이런 일까지 겹치면 전업을 고려하기도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요즘 신씨는 오토바이를 몰고 새로운 무대를 찾아 헤매고 있다. 북쪽으로는 광릉내, 남쪽으로는 올림픽대로변까지 차가 밀릴 만한 곳을 찾아가 보지만 아직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서울과 춘천을 잇는 46번 국도, 이른바 경춘 국도는 정체 구간을 노리는 행상들에게는 황금 노선이다. 인근 주민들은 “한여름 피서철이면 팔당·청평·대성리·가평·춘천 등 줄줄이 늘어선 이 일대 피서지를 찾는 피서객들로 이 도로는 교통 체증과 더불어 ‘행상 체증’까지 겪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서울에서 차를 몰고 올림픽대로를 타고 팔당대교를 건너는 운전자들은 주말이면 팔당대교를 넘어 생수통과 옥수수·오징어를 손에 가득 든 채 차량 행렬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아줌마 부대’를 만날 수 있다.

팔당대교를 넘자마자 덕소 쪽으로 향하는 6번 국도와 합쳐지는 지점은 다리를 넘은 차량들과 미금시 쪽에서 오는 차량들로 늘 정체된다.

지난 여름 피서가 절정에 달했을 때 이곳은 밀려드는 차량 숫자에 정비례해 늘어난 이들 아줌마 부대로 성시를 이루었다. 차량이 많이 밀리자 2천원 하던 오징어 한 마리가 2천5백원 또는 3천원으로 널뛰기하기도 했다. 청평 부근에서는 방학을 맞은 고등학생들이 용돈을 벌기 위해 행상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이곳만이 아니다. 마석을 지나 남양주군 화도 휴게소 부근이나 대성리·청평 검문소 부근에는 주말이면 늘 이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이같은 행렬은 청평을 지나 가평군에 접어들어야 종적을 감춘다. 차량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내 이동하는 것이다.
행락철 팔당대교 부근에는 아예 소형 트럭을 개조해 천막을 씌운 이동식 매점을 차려놓고 이곳으로 출퇴근 하는 상인들도 적지 않다.

지난 여름 청평 검문소 부근에서 짭짤하게 매상을 올렸다는 한 상인은 “땡볕과 차량 매연 때문에 한 나절 장사하고 나면 녹초가 되기 일쑤이지만 이것도 한 철 장사 아니냐”라며, 서울 시민에 대해 내년 피서철에는 경춘가도를 더 많이 이용해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 상인의 말처럼 여름 땡볕과 매연은 이들의 생업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아스팔트가 녹아 내릴 것 같은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맨몸으로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 매연과 싸울 수 있는 장비라야 마스크가 유일하다.

게다가 안쪽 차선 쪽에서 경음기를 눌러대는 소비자들에게 물건을 배달하려면 차량 행렬을 헤집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늘 사고 위험이 따른다. 그러다 보니 해마다 연휴 교통 사고 통계를 보고 있노라면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기 일쑤이다. 지난해 추석 연휴 기간에 발생한 교통 사고는 하루 평균 5백78건이다(94년은 7백49건). 하루 평균 사망자만도 20명을 웃돌았다.

고속도로가 아니더라도 오전·오후 할 것 없이 하루에도 수만 대의 차량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강변 도로는 이들을 그대로 위험에 빠뜨리는 지역이다. 밀릴 때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차가 늘어서지만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100㎞가 넘는 속도로 차량들이 질주하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차량의 흐름을 보아가며 도로 중앙으로 진출과 후퇴를 거듭하는 이들 행상들도 이런 위험을 모르지는 않는다.

길 안내 방송 등으로 설자리 좁아져

경찰도 이런 위험한 상황을 뻔히 알고 있지만 ‘차 사이로 막 가’족을 한 사람 한 사람 단속하기란 쉽지 않다. 노량진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행상 때문에 교통 체증이 더 심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들이나 우리나 똑같은 서민이어서 강력하게 단속할 수 없는 데다 매우 위험하다”라고 토로한다. 그러니 단속은 결국 ‘체포’보다 ‘추방’ 위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체포를 목적으로 추격전을 벌이다가는 오히려 더 큰 사고를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고속도로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경기도 지역을 관할하는 고속도로 순찰대 제1지구대는 신갈∼안산 고속도로 기점과 중부고속도로 하남 분기점 등 상습 정체 구간마다 행상이 자주 출몰하는 지점을 모두 파악해 놓고 있지만 적극 단속하지는 못한다. 경찰들은 “일부 행상은 단속 경관 차량이 눈에 띄자마자 중앙 분리대를 뛰어넘는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재주로 그들을 잡겠느냐”라고 하소연한다.

행상들 중 경찰 단속에 걸려 즉심에 회부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수시로 법원 문턱을 들락거리면서도 장사를 그만두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매연과 사고 위험에 시달린다는 것말고는 ‘반짝 경기’가 괜찮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부터 명절 경기가 눈에 띄게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귀성 전쟁에 지친 사람들이 ‘역귀성’ 현상을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자식들이 고향을 찾아 내려가는 대신 부모들이 서울로 올라와 차례를 지내고 자식을 만나고 가는 새로운 풍속이 출현하면서 이들의 매상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정부의 주도 면밀한 귀성 차량 분산책과 교통방송의 입체 안내 방송 등으로 인해 이들이 설 자리도 많이 좁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은 한결같이 올해 경기를 보아 장소를 옮기거나 다른 직종을 고려하겠다고 입을 모은다.

올 추석 연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또 몇 마리나 오징어를 사먹어야 서울에 도착할까. 하지만 명절을 마음놓고 쉬기는커녕, 이 기간에 1년 중 가장 고된 ‘초과 근무’와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생각한다면 귀경길의 짜증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길이 막히면 마음을 열라고 했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귀성길에 오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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