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숙려제도로 ‘홧김에 이혼’ 줄어들까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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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려·상담 제도 둘러싸고 논쟁 가열…여성·법조계, 복지부안 비판
“이혼을 후회하지는 않는데, 좀 대책이 없었다 싶기는 하다. 남편이 당장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으니….” 올해 마흔한 살인 주부 박미영씨는 이혼 2년째다. 결혼을 일찍 한 탓에 벌써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다. 아이 교육비를 책임지겠다던 남편은 벌써 1년째 모르쇠다.

하지만 돈을 받아낼 뾰족한 방법이 없다. 박씨는 “이혼을 하네 마네 실랑이는 오래 했다. 그런데 정작 양육비는 어떻게 할 것인지, 아이와는 어떻게 접촉할 것인지 차분히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라고 털어놓았다. 박씨는 남편이 이혼에 동의하고, 법원에서 협의이혼확인서를 받자마자 서둘러 구청에 신고를 마쳤던 것이다.

협의 이혼으로 아내와 헤어진 김성락씨. 그는 이혼 후 두 자녀를 키우는 아내에게 양육비를 주지 않고 있다. 돌이켜보면 자신의 잘못이 더 컸지만, 아내가 먼저 이혼을 요구한 것에 대한 감정의 앙금이 가라앉지 않아서다.

위 사례는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협의 이혼의 실태를 보여준다. 이름만 협의 이혼이지, 실제 협의되는 내용은 없다. 현행 협의 이혼에서 법원이 확인하는 것은 당사자의 이혼 의사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혼 의사를 확인하면 법원은 확인서를 내어주고, 당사자는 3개월 안에 구청에 신고하면 이혼이 성립된다. 경솔한 결정이건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건, 실질적인 협의 내용 없이 이혼이 가능하다는 것이 한국형 협의 이혼의 가장 큰 특징인 셈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협의 이혼을 통해 헤어지는 비율은 전체 이혼의 86%에 이른다.

지난 5월10일 가정법률상담소(소장 곽배희)가 마련한 ‘이혼숙려(熟慮) 제도와 이혼 전 상담에 관한 공청회’는 너무 쉬운 이혼으로 인한 문제점을 해결해 보자는 취지로 마련되었다. 참석자 대부분이 현행 협의 이혼 절차가 너무 간략하다는 데 공감했다. 정미화 변호사는 “위자료·재산 분할·부양료 등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이혼에 아무 지장이 없다. 이렇게 쉽게 이혼을 허용하는 제도를 갖고서 세계 제1의 이혼국이 될 수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김삼화 변호사도 “미성년 자녀가 있을 경우 확인서에 친권자를 표기하도록 되어 있지만 이마저도 의무 사항은 아니다”라고 협의 이혼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나마 협의 이혼에 법원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1979년에 이르러서이다. 1960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한 협의 이혼이 힘 있는 남편이 아내를 내쫓는 ‘축출 이혼’ 방편으로 악용되자, 이를 막기 위해 법원이 양 당사자의 의사를 직접 확인토록 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현행 협의 이혼이 결혼을 신속히 해소하는 데만 초점이 맞추어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제도라는 데 공감했지만, 막상 어떤 방식으로 협의 이혼 제도를 손질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을 드러냈다.

처음 논의가 시작된 것은 보건복지부가 마련한 건강가족지원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부터다. 지난 3월 말 김화중 보건복지부장관은 이혼 전 상담 의무화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논란에 불을 댕겼다. 김장관의 발언은 ‘상담 필증을 받아야 법원에 이혼 신청을 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혼인증제’로 받아들여졌고, 여성계를 중심으로 반발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국여성민우회(민우회)는 보건복지부안이 ‘이혼 허가제’에 불과하며, 이혼 절차를 까다롭게 해 이혼을 막아보겠다는 발상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우회 산하 가족과성상담소 유경희 소장은 자칫 이혼을 결심한 이들의 고통을 지연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뿐이라고 말했다. 협의이혼확인서를 받은 후 3개월 안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는 현행 제도가 실질적인 유예 기간 성격을 갖는 만큼, 협의 이혼 협의 내용을 보완하는 것으로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정법률상담소의 반발도 거세다. 하지만 이유는 조금 다르다. 보건복지부가 수십 년간 노하우를 축적해온 민간 단체들을 배제하고 굳이 많은 국고를 들여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에 의문을 표한 것이다. 상담에는 전문성이 중요한데, 양성 평등의 관점을 가진 훈련된 상담 기관이 어느 순간 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곽배희 가정법률상담소장은 “지난 50년간 우리는 이혼 숙려 제도와 상담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성급하고 졸속으로 진행되는 보건복지부의 논의에 우려를 표한다”라고 말했다. 이미 보건복지부는 이혼 전 상담 서비스제를 시범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서울과 지방에 건강가족지원센터 세 곳을 지정한 상태이다.

여성계뿐 아니라 법조계도 보건복지부의 행보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서울가정법원 김선종 부장판사는 “복지부가 추진하는 이혼 전 상담제도는 형식적인 과정이 될 수 있다. 이미 법원이 협의 이혼 과정을 맡고 있는 만큼 사법부가 이 문제를 담당하는 것이 적당하다”라고 밝혔다. 대법원 문준필 재판연구관은 “대법원장의 자문기구인 사법개혁위원회에서도 가정법원개편방안을 논의하고 있으며 이혼숙려기간제와 이혼 전 상담제가 중점 검토 사항이다”라고 말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보건복지부는 “이혼 전 상담을 의무로 할 것인지 권장 사항으로 할 것인지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라고 한 발짝 물러섰다.

협의 이혼을 보완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는 이들은 대체로 숙려 기간 도입과 이혼 전 상담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상담을 의무화하는 데는 우려를 표했지만, 사회적 책임이 발생하는 사안인 만큼 사회적인 조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외국의 사례와 비교하며 현행 제도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부산대 김삼용 교수에 따르면, 외국에서는 협의 이혼의 경우에도 법원이 자녀 부양 등과 관련해 실사를 함으로써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경우 이혼 절차 개시 전에 이혼 안내 모임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한다. 참석 3개월 후 비로소 법원에 이혼 신고를 할 수 있으며 숙려 기간은 9개월이다. 안내 모임부터 계산하면 숙려 기간이 무려 1년에 이르는 셈이다. 프랑스는 법원이 부부의 의사를 확인한 후 2개월의 숙려 기간을 둔다. 독일은 별거 1년 후 비로소 이혼 청구를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는 6개월 이상의 별거를, 프랑스는 3개월의 숙려 기간을 두고 있다.

김삼용 교수는 “법원이 제반 사항에 대해 합의서 제출을 요구하지만, 파경을 맞은 부부가 합의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은 만큼 전문 상담을 받도록 함으로써 합의 과정을 돕는다”라고 설명했다.

문준필 연구관은 숙려 기간과 상담 제도를 협의 이혼과 재판 이혼 모두에 적용할 수 있으며, 합의가 되지 않는 사건을 재판 이혼으로 보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문연구관은 무엇보다 유책주의를 택하고 있는 이혼의 개념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숙려 기간이나 상담 제도를 채택하는 나라들은 대부분 파탄주의를 기본 개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파탄주의는 파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보다, 회복할 수 없는 파탄 상태이냐 아니냐를 판단 기준으로 삼고, 파탄에 이른 경우 위자료·재산 분할·양육권 문제 등 제반 사항을 법원의 관여 아래 논의한다.

프랑스는 이혼 절차 간소화 적극 추진

정미화 변호사도 미국의 사례를 집중 분석하면서 “법원이 관여해 어느 한편이 현저하게 불리한 처우를 받지 않도록 한다. 한국의 협의 이혼은 그런 절차가 없다”라고 지적했다. 미국 역시 단순히 당사자가 이혼할 의사가 있다는 것만으로 이혼이 허용되지는 않는다. 펜실베이니아는 이혼 합의와 최소한 2년의 별거를, 앨라배마는 1년 이상의 별거, 루이지애나는 6개월, 텍사스는 3년 등 많은 주에서 별거를 이혼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례적인 흐름이 있다. 지난 4월 프랑스는 이혼 절차를 간소화하는 합의에 도달했다. 프랑스 법무부는 ‘이혼이 증가하고 있는 사회 추세에 맞추어 파경을 맞은 부부가 평화롭게 헤어지도록’ 규제를 대폭 완화하자고 제안했고 이를 프랑스 하원이 받아들인 것이다. 프랑스는 이혼율이 40%에 이르며, 이혼에 걸리는 기간은 평균 12.8개월이다.

이혼이 증가하니 이를 막을 방편으로 대기 기간을 만들자는 이른바 ‘건강 가족’ 신봉자들의 발상과 이혼이 늘어나니 파경을 맞은 부부가 평화롭게 헤어지도록 배려하자는 프랑스 간에 발상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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