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가정, 어린이 방치 늘고 있다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5.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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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 가정, 어린이 방치 늘어… 학교 교실 개방해 ‘방과후 학교’ 운영해야
국민학교 2학년인 승엽이(가명·9세)는 오락에 빠져 있다. 승엽이 엄마 아빠는 맞벌이 부부인데, 엄마는 오후 6시쯤에나 집에 돌아오신다. 집에 혼자 있기가 무서워 오락실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버릇이 되었다. 하루라도 오락실에 안 가면 밥맛이 없을 지경이다. 요즘 승엽이가 빠져 있는 오락은 <진 사무라이2>인데 <스트리트 파이터>류의 격투기 게임이다. 오늘도 승엽이는 태권도 학원이 끝나자마자 가방과 도복을 집에 던져놓고 곧바로 오락실로 향한다.

‘나 홀로 어린이’ 전국에 70만~80만명

승엽이처럼 학교가 끝난 후 방치되는 어린이가 늘고 있다. 맞벌이 부부가 급격히 늘어나는 바람에 덩달아 늘어난,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이다. 개중에는 승엽이같이 오락에 빠지는 아이도 있고, 만화영화에서 성인물까지 비디오란 비디오는 모두 섭렵하는 아이도 있다.

한국여성개발원은 92년 현재, 일터에 나가는 엄마를 둔 국민학교 어린이를 70만∼80만명 정도로 추정한다. 이 중 조부모나 외조부모·가정부 등 맡아 줄 사람이 없는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퇴근할 때까지 학원에 가거나(21.4%),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보고(20.1%), 친구들과 어울리면서(18.7%) 시간을 때운다(한국어린이보호회, 1992년).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는 등 혼자 계획을 세워 시간을 보내는 아이는 극소수이다.

이처럼 방치되는 아이들을 위해 ‘방과후 학교’ 일명 ‘애프터 스쿨(After School)’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 활발하게 일고 있다. 방과후 학교란 국민학교·지역사회 복지관 등 공공 시설이나 교회·기업체 등 민간 시설에서 혼자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특별하게 짠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학교를 말한다. 이 제도는 미국·일본·유럽 등지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정착되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살다 온 이 옥 교수(덕성여대 아동가족학과)는 “새 학기가 시작될 때쯤이면 공립 학교 앞에 긴 줄이 늘어서곤 했다. 개중에는 슬리핑 백을 들고와 밤새워 줄을 서는 사람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바로 ‘방과후 아동 보육 프로그램’을 신청하기 위한 학부모 행렬이었다.

부모들이 방과후 학교에 아이를 맡기고 싶어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현재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있는 부모 중 67.4%가 믿을 만한 방과후 지도 프로그램이 있다면 그곳에 아이를 맡기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한국여성개발원, 1992).

이와 관련해 교육 관계자들은, 지금의 학원이 아이들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장소인가에 대해 회의를 나타낸다. 지식을 주입하는 형식적인 교육기관 역할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부모를 대신해 정서적인 안정을 줄 수 있는 진정한 보육 기관 노릇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방과후 학교가 아주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 현재 서울 지역의 경우 36곳의 사회복지관이 ‘공부방’ ‘방과후 교실’이라는 이름으로 학교가 끝난 어린이에 대한 지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저소득층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민간 공부방도 26곳이 운영되고 있다. 대개의 프로그램은 간식을 먹이고, 숙제를 돌봐주고, 특별 과목(컴퓨터·영어 등)을 지도하는 형태로 짜여 있다. 국민학교 교실을 개방해 방과후 학교로 활용하자는 얘기가 몇년 전부터 나오고 있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많아 이를 실행하는 학교는 몇 되지 않는다(상자 기사 참조).

서울시 가락동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 자리잡은 가락종합사회복지관의 경우 전직 교사 출신인 책임 교사 1명과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보조 교사 2명이 어린이 15명을 보살피고 있다. 보육비는 한달에 10만원. 국민학교 1∼3학년인 어린이들은 수업이 끝나는 대로 이곳 공부방에 와 간식을 먹고 숙제를 한다. 프로그램은 6시까지 진행되지만 학원에 갈 아이는 미리 자리를 뜬다. 한쪽에서 학습용 만화를 읽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선생님 허리에 매달려 ‘공차기 하자’고 조르는 등 분위기가 매우 자유롭다.

중산층·저소득층 공부방 양립시켜야

그러나 가정적인 분위기를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교육 부문을 좀더 보강해 달라’는 부모들의 주문이 많다는 것이 이곳 간사 곽연희씨(29)의 얘기다. 교육열에 불타는 ‘한국적 특수 상황’을 방과후 학교 또한 비켜가지 못하는 것이다.

방과후 학교가 필요하다는 데 절대 다수가 공감하면서도 세부적인 추진 방침을 놓고 설왕설래하는 이면에는 이같은 현실적 갈등이 놓여 있다. ‘학습’에 중점을 두느냐, ‘보호’에 중점을 두느냐. 한국여성개발원의 한 연구원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에 각각 맞게 이원적인 방침을 세우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겠느냐’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는다. 이화여대 종합사회복지관처럼 비싼 보육료를 받는 대신 특기 과목마다 전공 출신 교사를 투입하는 등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곳과, 저소득층 대상의 지역 공부방처럼 보육료를 거의 받지 않되 안전한 보호처를 제공하는 곳이 현실적으로 양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 방과후 학교 설치를 둘러싸고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는 ‘방과후 아동지도사’의 법적 자격 인정 문제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방과후 아동지도사란 일정한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방과후 학교에서 교사 일을 하게 될 인력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여성개발원·YWCA가 아동지도사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방과후 학교의 성패를 좌우할 열쇠가 이들 방과후 아동지도사임에 틀림없지만, 문제는 보사부가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보사부는 천시간 이상의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만 하는 보육교사(2급)와의 형평성 문제를 들어 이들의 자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현재 아동지도사의 교육 시간은 1백50시간 정도).

그러나 절대적으로 부족한 교사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문 지식뿐 아니라 봉사자로서의 마음 자세를 갖고 있는 이들 아동지도사를 어떤 형식으로든 합법적 틀 안에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여성계의 주장이다. 특히 학원에 갈 경제적 여유가 없는 저소득층 자녀를 위해서 아동지도사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우수하고 봉사심 강한 아동지도사를 육성하는 일과 지방자치 단체 및 교육부·보사부 등 관련 부처의 적극적인 지원, 이는 지금 막 걸음마 단계에 접어든 방과후 학교를 정착시키고, 맞벌이 부부의 마음 부담을 덜어주는 데 필수적인 지렛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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