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조짐 보이는 북한의 대남 공작
  • 이정훈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6.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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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정수일 사건/타성에 빠져 공개된 정보 받고도 ‘내용 우수’ 평가
 
‘무함마드 깐수’로 위장한 간첩 정수일 사건은 북한의 대남 공작 활동이 치밀한 동시에 조악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북한 공작의 치밀함은 정수일이 국적을 네 번이나 바꾼 데서 드러난다. 수사 발표를 통해 알려졌듯이 정수일은 북한·레바논·필리핀으로 국적을 바꾸어 왔다. 또한 그는 북한 국적을 얻기 전 중국 국적자로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에 근무한 바 있어, 모두 네 차례나 국적을 바꾸었다.

정수일처럼 북한 공작원이 국적을 ‘세탁’ 한 사례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92년의 간첩 이선실 사건(신순녀로 위장)과 83년 2월 일본에서 발생한 전설적인 ‘북한 공작원 박 아무개(아직도 실명이 밝혀지지 않았다)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70년 여름 일본 해안으로 침투한 박은 마쓰다(松田)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일본 여인과 동거 생활을 했다. 72년 그는 실존 인물 고쿠마(小熊)의 인적 사항을 도용해, 76년 2월 실재 고쿠마가 병사할 때까지 또 하나의 고쿠마로 행세했다. 80년 4월 그는 다시 행방 불명된 고즈미 겐조(小住健藏)의 인적 사항을 완전 도용하는 데 성공해, 고즈미 명의로 일본 여권을 발급 받아 한국 등 여러 나라를 들락거렸다.

“정수일이 서울 생활 즐긴 것 아닌가”

박의 신분이 드러난 것은 그가 일으킨 교통 사고가 계기가 되었다. 82년 지바 현에서 교통 사고를 일으킨 그는 ‘본의 아니게’ 경찰서에서 지장을 찍었는데 이 지문이 실재 인물 고즈미의 지문과 달랐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일본 경시청이 지명 수배하자 83년 2월 그는 고즈미 여권을 들고 말레이시아로 출국한 후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일본 경찰은 이 인물과 관련된 사람을 탐문 수사해 그가 70년 일본 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간첩이라는 것과, 그의 성이 朴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수사를 종결했다.

70년대 이전 북한은 한국에 연고자가 있는 사람을 공작원으로 선발해, 직접 한국에 침투시켰다. 그러나 한국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 연로해지자 북한은 북에서 태어난 사람을 새로 선발해 홍콩과 일본 등 제3국을 이용해 우회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발전한 것이 정수일·朴 아무개 사건처럼 다른 사람의 인적 사항을 도용하고 국적 세탁을 거쳐 한국으로 침투시키는 방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북한이 공작원을 침투시키는 까닭은 인적 수단에 의한 간첩 활동 외에는 별달리 대남공작을 펼칠 방법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활동의 결과로 북한이 얻는 성과는 그리 큰 것 같지 않다. 수사 발표에 따르면, 정수일이 보낸 자료에 대해 북한 공작 조직은 ‘내용이 좋다’고 평가했다고 하는데, 그가 보낸 정보는 <군사세계>를 비롯한 군사 전문 잡지에 보도된 것을 꼼꼼히 정리 요약한 ‘공개된 정보’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북한 공작 조직은 한국에서 공개된 정보마저도 제대로 분석하지 않으리만큼 타성에 젖어 있는 것 같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한국내 북한 동조 세력 확보는 첩보 취득과 더불어 북한 공작원에 부여된 임무인데, 우리로서는 이것이 훨씬 더 위협적이다. 부여 간첩 김동식 사건은 이런 사례 중의 하나이다. 김동식의 임무 중 하나가 포섭 대상자와 고정 간첩에게 무전기를 전달하는 것이었는데, 이 무전기는 유사시 한·미 연합군의 이동로를 북한에 알리는 데 사용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정수일·김동식 사건에서 나타난 특징을 정리해 보면, 에너지난과 식량 부족으로 인한 내부 경제 붕괴와 한·중, 한·러 수교로 인한 고립감 등으로 북한의 공작 조직 역시 매우 초조해 한다는 점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초조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투자 대 효과’ 면에서 북한 공작 조직은 아주 비경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인텔리 간첩 정수일은 이러한 속사정을 알았기에 검거된 후 곧바로 신분을 털어놓은 것이 아닐까.

수사 발표장에서 한 외신 기자는 “정수일은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해서 간첩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서울 생활을 즐긴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한 북한 전문가는 정수일의 내면 세계를 잘 읽은 질문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북한이 붕괴할 조짐은 북한 공작 조직 안에서도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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