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프리즘] 귀순…재입북 기도…체포, 김형덕의 고통스런 ‘남한의 삶’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6.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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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덕씨, 귀순→재입북 기도→체포 ‘고난의 삶’…자본주의 적응 실패, 사회의 책임 커
“석달간 감옥 생활이 1년 동안 여기저기서 천대받았던 것보다 오히려 편했다.”

지난 2월3일 인천에서 중국행 배편으로 재입북을 기도하다 적발되어 3개월간 구치소 생활을 한 귀순자 김형덕씨(22·귀순 당시 사로청 평남돌격대 소속)는 자신이 자본주의 적응에 실패한 것으로 규정했다. 그는 탈출을 기도한 것이 지난 2월이지만 지난해 7월께부터 재입북하려고 마음 먹고 구체적인 준비를 해 왔다고 털어놓았다.

김씨와의 인터뷰는 그가 남북교류협력법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붙잡혀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은 뒤 서울구치소에서 출감한 다음날인 5월23일 부천 시내의 한 다방에서 이루어졌다. 마침 이 날은 김씨와는 달리 밝은 미래가 예견되는 또 한 명의 귀순자 이철수 대위가 미그 19기를 몰고 자유의 품에 안긴 날이기도 했다.

김형덕씨가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 땅에 발을 디딘 것은 94년 9월이다. 그는 귀순 동기와 관련해 “사로청 평남돌격대에서 일하다 대대장의 비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이유로 노동교양소에 수용되면서 탈출을 결심했다”라고 밝혔다. 그 후 그는 중국 연변에서 6개월을 지내며 주중 한국대사관을 통해 입국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중국을 떠나 베트남 등지를 떠돌기도 했다.

김씨는 귀순한 뒤 줄곧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신문 배달부터 골프 연습장 보조원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을 다 해 보았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데다 아버지와 누이들을 저버린 데 대한 죄책감까지 겹쳐 결국 죽음을 무릅쓰고 그가 선택한 사회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일단 탈출하겠다는 결심이 서자 그는 치밀하게 움직였다. 밀항과 재입북에 대비해 근무하던 골프 연습장 뒷산에서 아침마다 체력을 단련하고 중국 생활이 길어질 것에 대비해 틈틈이 한자도 익혔다. 재입북에 성공할 경우, 현지에서 트럭을 탈취하려는 생각으로 주유소 운전 기사로 취직해 탱크로리를 몰면서 운전 연습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 중국 무술인을 고용해 동행하거나 그도 안되면 연변에서 자신을 보살펴 준 조선족 이 아무개씨의 도움을 얻어 아버지와 누이들을 중국으로 불러내려는 계획까지도 단계적으로 세워 나갔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죽음의 터널을 뚫고 스스로 선택했던 한국에서의 삶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을까.

“이남으로 넘어왔을 때는 출신 성분이 나빠 북쪽에서 피눈물 나도록 고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와 보니 그것이 아니더군요. 거기서 부끄러웠던 사실이 여기서도 똑같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무척 놀라웠습니다. 남한 사람들도 고급 정보를 가지고 월남한 사람들만 우대하더군요. ‘자본주의는 실리를 중시하니까 그렇겠구나’라고 이해하면서도 내가 선택한 자본주의가 나를 인간적으로 대해 주지 않는 것에 견딜 수 없었던 겁니다.”
“돈보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아쉬웠다”

실제 그는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 아무 데서도 따뜻한 정을 느껴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주변의 시선은 한결같이 ‘귀순자가 왜 이러고 사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진폐증에 걸려 신음하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도 그의 재입북을 재촉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어려서부터 사실상의 ‘반공’ 교육을 받아 왔다. 그의 아버지는 김씨의 탈북을 가장 먼저 부추긴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운수 노동을 해 초가집 생활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잇던 아버지가 광산으로 뛰어든 것도 사실은 노동당에 입당하라는 자식들의 성화를 못이겨서였다. 여기서 아버지는 6년 동안 밤낮없이 하루 14시간을 일하다 진폐증을 얻고 말았다(그는 인터뷰 내내 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복받치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했다).

출신 성분이 좋지 않으니 김씨는 군대에 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출신 성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김씨가 알게 된 것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뒤였다. 그의 큰 누나가 고등중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지원했다가 고등중학교 성적이 전교 2등인데도 입학이 허가되지 않았을 때 김씨는 비로소 그의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치안대원이었던 사실을 알았다. 그만큼 출신 성분에 항상 발목을 잡혀 하류 생활을 전전할 수밖에 없던 그에게, 한국에서도 하류 생활이 계속된다는 사실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김씨가 남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운전 면허도 땄고 컴퓨터 학원에도 다니는 등 이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주변에서 그를 제대로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김씨에게도 다른 귀순자들과 마찬가지로 거주지 경찰서에 담당 형사가 있었다(귀순자들은 관계 기관의 조사가 끝난 뒤 2년간 이들로부터 보호 받도록 규정되어 있다). 김씨는 자신의 밀항 기도로 인해 해임 당한 이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그는 “어쩌다 용돈 몇 번 주는 것보다는 ‘밥 한끼라도 같이 먹자’는 따뜻한 말이 아쉬웠다”라고 말한다.

김씨도 정착 초기에 담당 형사들에게 직업 알선 등 몇 가지를 요청했지만 그의 바람과 담당 형사들의 제안 사이에는 늘 큰 차이가 있었고 그런 문제들로 형사들과 다투는 일도 잦아졌다. 그런 다음 그는 ‘공연히 형사들과 다투면 인간 관계만 나빠질 것 같아’ 그때부터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혼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1월 말 관계 기관의 조사를 모두 마치고 이 사회에 첫발을 디딘 뒤 그가 처음 취업한 곳은 서울 화곡동의 한 철공소였다. 조사 과정에서부터 그를 담당했던 군 관계자가 알선해 준 곳이었다. 직원이 단 2명인 이곳에서 그는 쇳가루를 마시며 용접도 하고 심부름도 하면서 한 달을 지냈다. 아직 집을 구하기 전이니 당연히 철공소 한 귀퉁이가 그의 거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탈출 과정에서 체포와 도주를 거듭하며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한국에서의 행복한 삶만을 그려 왔던 그는 당시 심경을 “한마디로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때부터 김형덕씨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한 달 만에 다니던 철공소를 그만두고 부천에 전세방을 얻어 경찰서 보안지도위원회가 알선해준 조그마한 사출업체에 일자리를 얻었다. 이곳도 직원이 20명이 채 안되는 영세업체였다. 어느 정도 고생은 각오했지만 그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그래도 귀순 용사인데 보상금은 다 어떻게 하고 이렇게까지 됐느냐’ 하는 주변의 시선이었다.
새벽엔 신문 돌리고 오후엔 막노동자 생활

동유럽권 등에서 자랑스럽게 귀순해 온 사람들보다 열 배 이상 위험을 무릅썼다고 생각해온 그는 서서히 절망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직장을 포기하고 막노동을 시작했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렸고 오후에는 공사장에서 벽돌을 져 날랐다. 그러나 그는 이 ‘노가다판’에서도 별 다른 경험을 얻지 못한 채 ‘이 사회의 살벌한 경쟁에서 탈락한 무수한 사람들’을 목격했을 뿐이다.

부천의 막노동판에서 일하던 김씨는 자기보다 먼저 넘어온 다른 귀순자들의 권유로 서울 강서구 가양동 임대 아파트 단지에 입주했다. 서울로 올라온 뒤부터는 학력을 허위 기재해 몇 군데에 이력서를 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그는 다시 부천의 막노동판으로 돌아갔다. 가양동에서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오토바이를 타고 부천의 공사장으로 향하는 힘겨운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공사장 생활도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일자리 없이 놀고 지내던 김씨는 이북5도민회에서 만난 피난민 2세와 알게 되어 그가 운영하는 목동의 골프연습장에 취업했다. 하루에 서너 번씩 골프공을 주으러 다니고 손님들의 차를 몰면서 그는 탈출을 구체적으로 준비했다. 월급 없이 잠만 자는 조건으로 취직한 데다 난방도 안되는 방에서 쪼그리고 잠을 청해야 하는 고단한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김씨는 이 시기를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한다. “목적이 있으면 사람은 행복한 것 아닙니까. 다시 남한을 탈출해야겠다는 목표가 뚜렷하니까 추운 줄도 모르겠더군요.”

마지막으로 트럭 운전을 익히기 위해 주유소 운전기사로 취업한 그는 한 달 정도 그 곳에서 일하다가 그만둔 지난 1월20일 정착금 일부와 막노동 등으로 모은 돈을 모두 달러로 바꾼 뒤 인천항으로 내달렸다. 김씨는 지금도 2백만원만 주면 중국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돈을 아끼려 밀항선을 탄 것을 후회하고 있다.
한국에서 정 붙인 사람은 단 한명뿐

김씨는 밀항을 기도했던 시기에 대해서도 “형사들의 보호기간이 끝난 뒤인 3월쯤으로 계획했으나 담당 형사들로부터 보호 기간이 1년 더 연장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1년을 더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아득했었다”고 말했다(본래 귀순자들은 관계 기관의 조사를 받은 뒤 2년간 각 관할 경찰서 담당 형사들로부터 보호받도록 되어 있다).

김형덕씨의 ‘참지 못하는’ 성격도 그의 밀항을 부추긴 요인이 되었다. 이 점을 그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귀순자들이 지니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도 그는 인정하는 편이다. 또 돌격대 부소대장을 지내면서 가졌던 자신의 자부심이 한국 사회에서 밑바닥부터 출발하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뒤돌아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 북에서 천대받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서도 호강은 하지 못할 망정 하류 생활을 전전해야 하는 것만은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는 지금도 이북5도민회를 통해 알게 된, 부천에 사는 이 아무개 노인을 틈만 나면 찾아간다. 그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혼자 사는 이 노인을 찾아 주머니에 있는 돈 중에서 만원이나 2만원을 쥐어 주곤 하는 것이 요즈음 그의 유일한 낙이라면 낙이다. “내가 본래 노인네들 모시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김씨는 말하지만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라는 시선이 싫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다. 어쩌면 이 노인은 그가 한국에서 정을 붙이고 사는 유일한 사람이다.

김형덕씨는 밀항을 기도할 때 지니고 있던 전재산 1만4천7백달러를 외환관리법에 따라 모두 몰수 당했다. 이 돈은 그가 중국 밀항에 성공한 뒤 다시 북한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워졌을 때 선을 대서 아버지에게 보내려 했던 돈이다. 지금 그가 가진 것은 옷가방 하나가 전부이다. 부천에서 사귄 친구 집에 얹혀 사는 그는 이제는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사회가 요구하는 기초적 수준에라도 올라가야만 또다시 밀려나지 않으리라는 절박감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아직은 막막하다.

“자유보다는 부모가 중요하다”

“일단은 이 사회를 긍정적으로 보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생각이다. 가는 데까지는 가 보겠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자유보다는 부모가 중요하다”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가 ‘생각했던’ 자유와 실제로 ‘체험한’ 자유 사이에는 그만큼 큰 간극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광복 이후 현재까지 탈북 귀순자는 6백명이 넘는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귀순자들의 친목단체인 숭의동지회가 회원으로 등록한 귀순자 5백61명의 직업별 현황을 조사해 놓았을 뿐이다.

94년 이후 러시아 벌목장 출신 노동자 등의 탈북이 급증하면서 귀순자의 사회 적응 문제는 커다란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93년 제정된 ‘귀순북한동포보호법’에 따른 정착금 외에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전’은 없다. 더구나 취업을 위한 직업 훈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김포공항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사진 찍을 때만 반짝하다 관심 밖으로 사라지는 귀순자들. 그들의 사회 적응 문제는, 한국 사회가 통일 이후를 준비할 포용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우리도 아무런 대책이 없는데 일선 경찰서로 떠넘기기만 하면 뭐 하느냐.” 어느 형사의 푸념처럼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하루빨리 세워지지 않는 한 제2의 김형덕이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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