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의 새 바람 ‘행정실명제’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5.10.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행정실명제’ 일단 환영… 세금·건설·주차단속까지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동에 사는 주부 이순자씨(38)는 행정 기관에 불쾌한 기억이 많은 사람이다. 세금 부과액에 의문이 있어 구청에 전화하면 담당자를 찾아내기까지 최소한 다섯 번쯤은 다른 과나 계로 ‘뺑뺑이’를 돌아야 했다. 그동안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중에 전화가 끊어지는 일도 많았다. 이씨는 매번 담당자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상대방은 전화를 돌리면서 거기서 물어보라고 말하기 일쑤였다. 어렵사리 담당자를 찾아내는 데 성공해도 ‘자리에 없으니 전화를 다시 하라’는 대답을 들으면 기운이 쑥 빠졌다.

이씨는 결혼 초기에는 전화통을 붙들고 시시비비를 따졌으나 이제는 웬만하면 참는다. 관청이라는 거대한 익명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은 유쾌한 일이 못될 뿐더러 자신에게 그리 이익될 것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10년을 살림하는 동안 터득한 그의 이런 생각은 피해 의식의 소산으로 보이지만 그 나름으로 주판알을 놓은 결과이기도 하다. 싸워서 얻는 이익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들여야 하는 돈과 시간 같은 비용이 훨씬 큰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명함·명찰·명패 분명히

지방자치 시대는 과거와 얼마만큼 달라졌을까. 행정실명제, 이동구청장실, 주민감독관제, 컴퓨터통신 민원 처리, 주·정차 단속 5분 예고제, 토요일 전일 근무제 등은 민선 시대의 새로운 풍속도다. 민선 단체장들이 출범한 지 4개월이 못되어 쏟아낸 주민을 위한 행정 아이디어들은, 관선 단체장이 몇년 해온 것보다 다양하며 실속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선 시대의 히트 상품으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행정실명제’이다. 행정실명제는 행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단계 별로 참여한 공무원의 이름을 명기하는 것이다. 이는 이씨 같은 민원인들이 가진 불만을 거의 완전히 해소할 수 있다. 담당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하면 쉽게 접촉할 수 있는지 알게 되므로 수고를 크게 덜 수 있다. ‘접근 비용’이 줄어드는 것이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사무소. 이 동사무소의 민원 처리 공무원들은 민원인들에게 명함을 건네준다. 대다수 공무원에게는 명함이 없다. 구 예산으로 명함을 만든다는 것은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명함도 보통 명함이 아니다. 앞면에 공무원 얼굴 사진이 박혀 있다. 또 이름과 전화·팩스 번호는 물론 담당 업무까지 자세히 소개돼 있다. 명함 뒷면에는 구청장실·민원실 등 실생활과 관련된 안내 전화번호가 실려 있다.

구청 민원봉사실도 부쩍 달라진 인상을 준다. 민원 공무원들은 어김없이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거나 명패를 앞에 놓아 민원인들이 담당자를 분명히 알아보게 한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구청’ 등 대민 위주 행정을 뜻하는 홍보전도 요란하다.
행정실명제를 처음 제안한 것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었다. ‘서울시정 백 가지 과제’의 하나로 경실련은 모든 공문서에 담당 공무원의 이름을 기재해, 민원 처리 과정에서 담당자가 누구인지 시민이 알도록 함으로써 업무 처리 책임을 명확히 하자고 주장했다. 이 아이디어를 행정에 반영한 선발 주자는 강동·노원·송파·강남·양천·중구청 등 서울의 일부 구청들이다. 실명제는 이들 구청장의 선거 공약이기도 했다. 이들은 저마다 자기가 가장 먼저 완벽한 실명제를 실시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흥미롭다.

7월 말께부터 시작된 행정실명제는 서울시가 9월1일부터 전격 시행함에 따라 서울의 모든 구청으로 확산되고 있다. 서울시가 행정실명제를 도입한 데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서울시청이 본관 외에 7개 별관으로 쪼개져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 교통국은 중구 무교동 체육회 별관에 있고, 가정복지국은 종로구청내 종로 별관, 종합건설본부는 서대문구 합동 서대문 별관에 있다. 이 때문에 별관에 볼 일이 있는 시민이 태평로 본청에 찾아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 외 다른 지역에서는 강원도 삼척시, 경남 창원시와 울산시, 전남도, 충남도 등이 행정실명제를 빨리 시행한 축에 든다. 부산시와 경기도도 일부 채택하고 있다.

자치단체마다 실명제를 시행하는 범위는 조금씩 다르다. 행정실명제가 내무부 같은 중앙 부처에서 일사불란하게 지시한 사항이 아니고 민선 단체장의 독자 작품이기 때문이다.
주차 위반 딱지에도 담당자 이름

민원인 처지에서 효용 가치가 가장 높은 것은 세금실명제이다. 등록세·취득세·재산세·자동차세 등 세금 고지서와 체납시세 납부안내, 압류예고서 같은 세금 관련 문서에 실명제가 도입되고 있다. 세금실명제는 대부분의 자치단체가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부천시 세금 비리 사건 이후 필요성이 부쩍 커져 지방자치 후 전격 시행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분쟁이 잦은 주차 위반 과태료 부과 고지서에도 단속 요원의 이름이 들어간다. 교통 부문은 워낙 거칠게 항의하는 사람이 많아 실명제를 도입하는 데 가장 저항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중구청 신현철 교통지도과장은 “실명제 실시 후 이의 제기 건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5분 예고제를 시행해 스티커 발부가 많이 준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속요원들이 그야말로 이름을 걸고 신중하게 일처리를 한 요인도 적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밖에 위생업소 허가, 체육시설업 신고, 이·미용 허가 같은 인·허가 공문서에도 담당자 이름을 기재하고 있다. 관내 공사와 시설물에 설계에서 완공까지 관련 공무원의 성명이 동판에 씌어져 영구 부착되는 건설실명제를 도입하는 자치단체도 늘고 있다.

서울시 강동구청과 강원도 삼척시 등 일부 자치단체는 행정 행위 전과정에 실명제를 도입했다. 강동구청 조공연 시민봉사실장은 “강동구청의 모든 문서는 실명화하지 않으면 강동구청을 나갈 수 없다”고 밝혔다. 삼척시는 김일동 시장의 공약 사업으로 행정실명제를 적극 시행하고 있는데 ‘밝고 맑은 행정’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밖에도 송파구청 등 꽤 많은 자치단체가 지방세와 공사 실명제를 도입하고 있다.

지방자치제가 출범하기 전 대부분의 공문서에는 시장·도지사·군수·구청장의 직인만 찍혀 있었다. 실제 이 일을 집행한 공무원의 이름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행정실명제는 고작해야 담당 공무원의 이름을 넣는 일이어서 어찌 보면 매우 사소한 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공무원 사회에서는 이것의 의미와 파급 효과를 일종의 개혁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김충환 강동구청장은 “공무원 조직의 특징은 익명성이다. 좋게 말해 조직의 이름으로 일한다. 행정실명제는 이런 익명성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행위다”라고 말했다. 이름이 드러난다면 책임 소재를 가리기도 쉬워진다. ‘얼굴 있는 행정’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주민들은 담당자 이름이 명기된 공문서를 이름이 빠진 공문서보다 더 신뢰하게 마련이다. 김구청장은 바로 이 두 가지 점을 고려해 실명제를 시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행정실명제가 민원인 처지에서는 아름다운 제도임에 틀림없지만 공무원들에게는 불편할 것이다. 서울 관악구청의 한 7급 공무원은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 공무원은 “실명제 전이나 후나 내가 집행한 일이 다른 사람이 한 것으로 둔갑되지는 않는다”며 실명제에 저항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서울시 이호조 내무국장은 실명제에 대해 껄끄러워하는 공무원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행정실명제는 ‘자치 시대에 맞는 옷’이라고 지적했다. 지방자치 시대를 사는 공무원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공무원 “행정실명제가 뭐냐”

행정실명제가 공무원에게 유용한 제도라는 견해도 있다. 서울시청 김애량 시민과장은 “행정실명제는 시민의 편의를 높인다는 차원에서 고안되었지만 행정기관 간에도 업무 효율을 높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무원들조차 (공문 번호를 보고 담당 과 정도는 식별할 수 있지만) 담당자를 몰라 여러 번 전화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행정실명제를 시행하는 정도에는 지역적 편차가 상당히 큰 것으로 파악된다. 대체로 서울 지역 자치단체들이 실명제 실시에 적극적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남이 하니까 안할 수 없어 흉내를 내는 정도인 자치단체도 없지 않다. 심지어‘행정실명제가 뭐냐’고 되묻는 공무원도 적지 않았으며, 이미 실명제를 시행하고 있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었다. 대구시의 한 과장은 “모든 행정 행위에는 기관장의 이름이 들어가고 내부 의사 결정 과정에서 실명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실명제를 해야 할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했다.

행정실명제에 대한 공무원들의 몰이해도 문제지만 실효성이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사는 박정신씨(33)는 지난 8월 주민세 체납 고지서를 받았다. 박씨는 체납 여부가 미심쩍어 영수증철을 뒤진 결과 세금을 낸 사실을 발견했다. 박씨가 고지서에 찍힌 담당 공무원을 찾자 그의 대답은 ‘부과과에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박씨는 ‘그렇다면 고지서에 찍힌 이름은 뭐냐’고 따졌으나 세금 부과 잘잘못 여부는 자기 소관이 아니라는 대답을 할 뿐이었다. 서너 차례 전화를 거듭한 끝에 그는 겨우 영수증 사본을 ‘성산동 주민세 담당’에게 우편으로 부치라는 말을 들었다. 전화를 끊고 박씨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명백히 관청 잘못인데 자신이 편지를 부치는 수고를 해야 할 뿐더러, 행정실명제라는 것이 형식적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병준 교수(국민대·행정학)는 행정실명제 시행 자체가 과거보다 진일보한 것은 틀림없지만 소극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존 행정 관행을 크게 바꾸지 않은 채 실무 담당자의 이름만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소극적 의미의 실명제라고 주장했다. 김교수는 조직 자체를 책임이 명확한 체제로 만드는 행정 관행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주민들의 편의를 높이는 행정실명제 같은 정책에 적극적인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민선 단체장들은 과거 관선 단체장처럼 ‘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지시문이 권고문으로, 내무부 공문이 깍듯한 존대말과 부드러운 표현으로 변화한 작은 사례에서 시·도지사들을 호령하던 내무부의 ‘위력’이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을 엿볼 수 있다. 민선 단체장들이 눈치를 봐야 할 대상은 자신들을 뽑아줄 ‘표’일 수밖에 없다. 서울 노원구청 서종태 기획예산과장은 “이미 구민의 복리 증진과 관련되는 부문에 인력과 돈이 전진 배치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점점 강해질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이 지자제 실시 백일을 맞아 실시한 설문조사는 이처럼 달라진 풍속도를 엿보게 한다. 지방 공무원들은 자치 단체장 취임 이후 10명 가운데 8명 가까이가 적극적인 서비스 행정으로 변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아직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10명 중 7명이 공무원의 서비스 개선에 별 차이가 없다고 대답했고, 2명 정도만이 좋아졌다고 본다. 공무원들은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주민들의 기대치에는 못미치고 있는 것이다.

포스코경영연구소 홍욱헌 연구원은 “정부와 주민의 기본적 관계는 지배─피지배, 계몽─순응 관계에서 기업─고객 관계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했다. 행정실명제는 고객 위주의 행정 체계로 가는 데 한 걸음 내디뎠다는 의미를 갖지만 갈 길은 멀다. 행정 조직이 ‘고객 만족 경영’으로 가는 데는 공무원들의 의식 전환뿐 아니라 행정 체계 전반에 변화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행정실명제는 지자제 시대에 관청이 보이는 달라진 발상법을 웅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국의 관청과 주민의 관계는 팽팽히 맞서 있다. 영국의 시민헌장(위 상자 기사 참조)에서 보듯이 납세자가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날은 아직 가까워 보이지 않는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