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전투기 기종, 미 · 프 · 러 '3파전'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6.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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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5E·라팔·수호이 35 놓고 검토중…공군·합참·항공사 이견 못 좁혀
한국형 전투기 사업(KFP)에 이어 추진될 예정이던 공군의 차기 전투기(FX)사업이 공군과 합참·항공기 제조회사 간의 의견 차이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차기 전투기 사업이란 2000년대 주력 전투기의 기종과 대수를 결정하는 것으로, 통일 한국의 공군력을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한국형 전투기 사업(40억달러)보다 규모가 더 큰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공군을 비롯한 국방 관계자들은 한국형 전투기 사업 당시 F16과 FA18을 놓고 기종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바 있어 차기 전투기 사업이 언론에 드러나는 것을 삼가 왔었다.

차기 전투기 사업은 지난해 초 공군이 소요 제기를 함으로써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검토한 합참이 지난 3월 재검토 지시를 내림으로써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합참이 재검토하라고 지시한 이유는 ‘공군이 요구하는 성능을 갖춘 전투기로 거론되는 후보 기종 중 일부 기종은 원하는 시점에서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군이 요구하는 차기 전투기의 성능 조건(ROC)에 부합하는 후보기로는 미국 맥도널 더글러스사의 F15E, 프랑스 다소사가 개발하고 있는 라팔, 러시아의 수호이 35,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가 공동 개발하는 유러파이터가 꼽힌다. 이 중 합참이 문제 삼았던 것은 유러파이터기이다. 합참 조사 결과 유러파이터기는 제작이 늦어져, 공군이 획득을 원하는 시점에서 도입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때문에 재검토 지시를 받은 공군은 유러파이터를 제외한 세 기종을 중심으로 다시 소요 제기할 예정이라 머지 않아 기종 결정 작업이 재개될 전망이다.

성능 뛰어나고 값도 싼 프랑스 전투기 ‘라팔’

미국의 F15E기는 F15기 중 최신예기로 현재 미국·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 공군이 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보유한 F15E기는 미국이 몇 가지 핵심 전자장비를 빼고 수출한 F15E이다. 한국이 차기 전투기를 F15E로 결정할 경우 과연 미국 정부가 미국 공군 수준의 F15E기를 판매할 것인가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현재 미국은 F15E를 대체할 기종으로 F22기를 완성해 실전 배치할 예정이다. 때문에 협상 정도에 따라서는 현재 미국 공군이 보유한 것과 같은 F15E기를 획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당 가격이 F16보다 두 배 이상 비싼 8천만∼1억달러인 것이 큰 약점으로 거론된다.

F15E기와 경합할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는 프랑스 다소사의 ‘라팔’이 꼽힌다. 라팔은 독자적인 무기 체계 구축에 주력해온 프랑스가 만든 야심작으로 현재 시제기가 개발된 상태이다. 시험 평가가 끝나는 대로 프랑스 해·공군이 획득할 예정이기 때문에, 한국 공군이 획득을 원하는 시점에 도입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프랑스는 한국에 대해 프랑스군이 사용할 것과 똑같은 성능을 갖춘 라팔을 인도하겠다는 입장이고, 직접 시험평가단을 프랑스에 파견해 라팔에 대해 성능 평가를 해보라고 권하고 있다. 가격 면에서도 F15E보다 훨씬 싼 것으로 알려져 여러 관계자가 라팔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다.

‘수호이 35’도 시험 평가 중인 전투기로 가격이 매우 싼 것이 장점이다. 러시아 역시 ‘한국이 원한다면 직접 시험평가단을 파견해 성능 평가를 해보라’며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무기 체계는 한국군이 익숙한 미국의 무기 체계와 180도 달라서 이를 도입할 경우 조종은 물론 정비·관제 시스템까지 새로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미국 공군의 전술기 운용 원칙은 거의 모든 나라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 미국 공군이 채택한 원칙 중의 하나가 고급과 저급 전투기를 3.5 대 6.5 비율로 보유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배합 원칙은 걸프전을 비롯한 실전 경험을 통해 얻어낸 가장 경제적인 전술기 운영 방법이다. 미군은 현재 고급 전투기로는 F15를, 저급 전투기로는 F16을 운용하고 있다. 미국 공군은 F15기 소수가 적 전투기를 제압해 제공권을 확보하면, F16기 다수가 적 지상 목표물을 공격한다는 원칙으로 3.5 대 6.5의 고저 배합(high-low mix)원칙을 발전시켰다.

고·저급 전투기 배합, 선진국에 한참 못미쳐

현재 한국 공군이 택하고 있는 고저 배합은 한국형 전투기 사업과 과거 ‘평화의 가교’ 사업으로 도입한 F16 전투기를 고급으로 하고, F4와 F5를 저급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배합은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이 F15J(F15D를 일본에서 면허 생산한 것)를 고급으로 하고 F2(미국과 공동으로 F16을 개량 생산한 것)를 저급으로 하는 고저 배합에 비해 현저하게 수준이 떨어진다

한국 전투기의 고저 배합을 선진국 공군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F4와 F5를 F15급 전투기로 맞바꾸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우연의 일치로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 사이 백여 대가 넘는 F4와 F5기가 자연 수명 고갈로 집중 도태될 전망이다. 그때 가서 F15E급 전투기를 도입하면 자연스럽게 선진 공군형 고저 배합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차기 전투기 사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한정된 국방 예산을 육·해·공군에 균형 배분해야 한다는 당위론과, 차기 전투기 사업을 국내 항공산업 육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현실론에 걸려 삐꺽거리고 있다. 특히 육군 출신이 다수 포진한 합참과 국방부 쪽에서는 차기 전투기 사업 실시 시기를 연기하는 것이 육군 예산을 지키는 방안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재검토 지시를 내린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논리는 도태되는 F4와 F5의 공백을 메우지 못한다는 우려 때문에 설득력을 잃고 있다.

차기 전투기 사업에 대해서는 F16을 면허 생산하고 있는 삼성항공 역시 불안한 심정이다. 삼성은 ‘F4와 F5를 대체하는 전투기로 값비싼 F15를 도입하려 하면 육군 등 타군의 저항이 만만찮아 연기될 가능성이 높다. 연기되는 시기 동안 F16을 더 생산해 도태되는 F4와 F5를 대체하면 어떻겠느냐. 명분론을 주장하다 타군의 방해로 전력 증강 시기를 놓치면 F5 등의 자연 도태로 공군력에 허점이 생기니, 이미 국내에 생산 시설이 완비된 F16을 추가 생산해 이를 메우자’라는 현실론를 펼치고 있다. 그러나 공군 일각에서는 삼성의 현실론을 차기 전투기 사업을 늦추려는 육군쪽 의견과 같다고 해석한다.

전쟁을 억지하기 위해서는 우세한 공중 전력 확보가 필수이다. 그러나 각자가 생각하는 공중 전력 우세의 정도가 다르고 이를 풀어가는 해법이 다른 데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공군과 합참·삼성항공의 대립은 제공권 확보와 경제성 원칙, 후방 방산 능력 확보라는 세 가지 명분론과 현실론이 뒤엉킨 것으로, 앞으로 전력 증강 사업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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