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법의학 권위자 '김 훈 중위 타살' 주장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8.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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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법의학 권위자 노여수 박사, 타살 과학적 입증…한·미 군, 전면 재수사해야
“미국 정부 공인 법의학자의 명예를 걸고 과학적 소견을 종합할 때 김 훈 중위는 자살하지 않았다. 부검 내용, 사건 현장 사진 및 비디오 테이프, 사건 관련 서류 등 모든 자료 가운데 자살을 뒷받침하는 법의학적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최근 천주교 인권위원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미국 뉴욕 주 정부 소속 한인 법의학자 루이스 에스 노(한국명 노여수) 박사가 김 훈 중위 사망 사건에 대해 밝힌 법의학적 소견이다. 그는 자기의 이런 소견을 미국내 권총 자살·타살 사례와 함께 분석해 국방부와 천주교 인권위원회, <시사저널>, SBS <그것이 알고 싶다>(9월13일 방영 예정) 팀에 각각 전달하고 브리핑했다.

노여수 박사, 30년간 8천여 주검 부검

김 훈 중위 사망 사건은 지난 2월24일 그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한 벙커에서 총상 시신으로 발견된 이후 타살 여부를 놓고 군 당국과 유족 및 언론 사이에 공방이 벌어진 사건이다(<시사저널> 443·445·446호 참조). 사건 직후 서둘러 자살로 발표한 한·미 양측 군 당국은 이같은 의혹 제기에 떠밀리다시피 수사를 벌여 4월29일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살’이라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시사저널>은 독자적으로 추적한 타살 정황 증거들과 수사 내용의 허점들을 들어 이 사건을 철저히 재조사해야 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 후 유족과 언론, 국회 국방위원회 등이 사건 조작 의혹을 집요하게 제기하자 군 당국은 이 사건을 육군본부 검찰부로 넘겨 계속 수사하고 있다. 바로 이같은 시점에 권총 사망 시신을 부검한 경험이 많은 미국 정부 소속 법의학 권위자가 내한해 ‘김중위가 타살되었다’는 소견을 발표함으로써 이 사건은 적지 않은 파문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노여수 박사는 30년 동안 미국에서 8천여 사체를 부검했다고 한다. 특히 그동안 권총 자살 및 타살된 시신을 5백여 구 부검해 사인을 가리고 법정에 증거로 제출해 왔다. 미국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킨 권총 사망 사건들을 법의학적으로 해결한 경험도 많아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 유력 언론에도 그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다. 이번 사건 관련 증거 자료들을 종합 분석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그도 김 훈 중위가 자살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노박사는 모든 상황과 증거를 면밀히 파고든 결과 ‘김 훈 중위가 자살로 교묘히 위장한 권총 타살의 전형적인 특징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는 이런 결론에 대해 법의학자로서의 명예뿐만 아니라 미국 공인 법의학 면허까지 걸 수 있다고 단호히 말했다.

노박사에 따르면,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미국에서는 자살자의 절반 이상이 권총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 중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을 쏘는 경우가 75∼80%, 나머지 20∼25%는 목이나 입에 대고 쏜다고 한다. 관자놀이에 대고 발사한 자살 시신의 경우 권총 총상은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반드시 총구를 피부에 힘껏 밀착시키는 ‘밀착 사격’을 하고 △그 결과 화약 매연 등이 반드시 두개골 내부에 부착되는 ‘매연 부착’ 현상이 나타나며 △총알이 지나가는 탄도는 인체 조직 구조상 반드시 머리 뒤편 상부를 향한다. 미국 법정에서는 자살로 추정되는 의문의 총상 시체에 대해서는 이런 조건이 충족될 때만 법의학적으로 자살을 인정한다고 한다.

이에 반해 자살로 위장한 권총 타살은 시신에 중요한 단서가 남는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경찰·군인·마피아 등 총기 전문가가 권총 살인을 하는 경우가 흔한데, 이들은 대부분 교묘하게 자살로 위장하지만 과학적으로 규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살로 위장한 권총 타살의 특징은 △밀착 사격을 시도해도 피살자가 피하려 하기 때문에 대부분 ‘근접 사격’(보통 1∼5㎝)이 되고 △이로 인해 총구와 사입구 사이의 공간에서 화약 연기 불기둥이 비산해 피부는 다소 그을릴지라도 두개골 두개강 내부에는 매연 흔적을 남기지 못하며 △사입구와 사출구의 각도(탄도)가 반드시 수평 또는 앞쪽으로 기울어지게 나타난다는 점 등이다.

노교수는, 권총 총상이 관자놀이에 있고 시신 옆에 총이 있으면 흔히들 자살이라고 보지만, 미국 법의학계는 탄도, 밀착 사격과 근접 사격 여부, 두개골 내의 매연 부착 여부 등을 따져 자살과 타살을 구분한다고 설명한다.
두정부의 혈종은 둔기로 맞은 타박상

이런 기준과 부검 경험에 입각해 김 훈 중위의 총상 상태와 부검 내용, 부검 사진, 비디오, 서류 등을 종합 분석한 노박사는 김중위의 시신이 자살로 위장된 타살자 시신의 전형이라고 결론지었다. 우선 김중위가 총격 당한 상태는 밀착 사격이 아닌 근접 사격으로서, 이는 두개골·두개강 내부 등에 화약 및 매연 부착이 전혀 없는 깨끗한 상태라는 점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중위의 머리에 거의 수평 상태로 난 탄도는 미국에서의 자살 위장 타살 시신들과 공통된 모양을 띠고 있다. 김중위 사망에 사용된 M9베레타 권총은 무게가 약 1.2㎏이고, 총구부터 방아쇠까지가 12cm에 이른다는 점에서 이를 김중위 스스로 쥐고 오른쪽 관자놀이에 댔을 경우 인체 구조상 탄도는 반드시 반대쪽 머리 뒤편 상부로 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김중위의 두정부에는 가로 세로 4.8×6cm의 커다란 혈종이 나타나 있는데, 노교수는 이를 둔기로 맞은 타박상이라고 강조한다. 이 혈종 역시 타살의 중요한 증거로서, 권총 탄환과는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이같은 사체 부검 결과 및 현장 상황 분석을 토대로 노박사는 지난 4월29일 미군 CID측이 발표한 수사 내용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당시 미군측은 사입구가 성상형(별 모양)이라는 점은 자살 의지에 따른 밀착 사격이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노박사는 타인이 근접 사격할 때도 성상형 사입구는 흔히 나타난다며, 그런 사례를 담은 자살로 위장한 권총 타살 시신 부검 내용들을 필름으로 제시했다.

또 방사선 모양의 두개골 골절이 밀착 사격의 결과라는 미군측 발표 내용에 대해서도, 노박사는 ‘백m 거리에서 쏘아도 방사선형 두개골 골절이 나타난다’며 과학적으로 난센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어서 싸우거나 반항한 흔적이 김중위의 몸에 없다는 발표는 두정부에 난 커다란 혈종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라고 말했다. 이 혈종에 대해 부검을 담당했던 한국군측 군의관 이 아무개 대위는 ‘총격 당시 두개골 골절로 인한 출혈’이라고 보고서에 썼다. 이에 대해 노박사는 미국에서 권총 사망자 시신을 수백 건이나 부검했어도 그런 예는 본 적이 없다고 반박한다. 설령 두개골 골절 때문에 혈종이 생기더라도 사입구부터 난 골절선을 따라 길게 나타나야지 탄도와 가장 먼 두정부에만 유난히 커다란 출혈이 일어났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같은 분석을 토대로 노박사는 김 훈 중위가 ‘타살된 상황’을 재구성했다. 9월3일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마련한 ‘한·미 양국 법의학자 공개 토론회’ 자리에서였다. 이 자리는 노박사의 소견 발표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고려대 법의학 교실 황적준 교수는 이 자리에서 “한국 법의학계는 권총 사고 시신 부검 경험이 거의 없어서 노박사의 경험에 따른 보고가 큰 도움이 되었다”라고 전제한 뒤 의문 사항을 묻고, 타살 상황 재구성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노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군측의 사건 현장 보존용 비디오 테이프에 따르면 벙커 내부에 모래주머니로 쌓은 1m20cm 높이의 거치대가 있다. 그 위에 김중위가 쓰다 만 수색정찰서·장갑·무전기 등이 놓여 있으며 거치대에 피가 다량으로 쏟아져 있다. 김중위는 거치대로부터 약 80cm 뒤편 벽에 기대고 앉은 채 사망했다. 탄착점은 거치대와 수평 방향 왼쪽 상단 1m70cm 벽에 형성되어 있고, 탄피는 오른쪽 앞 통로에 떨어져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김중위가 수색정찰서를 쓰고 있던 중에 누군가 왼편에서 김중위의 머리를 가격하고, 거치대로 엎어지는 상태에서 오른쪽에 있던 사람이 권총을 빼 관자놀이에 들이대자 김중위가 왼손으로 순간 방어 자세를 취하자마자 발사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김중위는 그 상태에서 거치대 위로 피를 많이 쏟은 뒤 비틀거리다가 뒤편 벽에 몸을 기댄 채 주저앉아 버렸다. 김중위는 즉사하지 않아 한동안 동맥에서 분출되는 피를 사방에 뿌리게 되었다. 이는 김중위의 폐에 피가 많이 고여 있다는 부검 내용이 뒷받침한다.”

노박사는 이와 같은 자기의 법의학적 분석 소견을 9월1일 국방부 수사관들에게 비공개로 증언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김중위의 사체 부검을 담당해 자살 발표를 뒷받침하는 보고서를 냈던 군의관 이 아무개 대위는 과학적으로 밀착 사격이 아니었다는 노박사의 주장을 사실상 수용했다.

현재 이 사건을 넘겨받아 수사하고 있는 육본 검찰부 수사팀은 “사건이 종결되어서 재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의혹에 대해 계속 수사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한·미 군, 서류 조작·진상 은폐

그러나 한국군 검찰의 이 사건 재수사는 미군측의 비협조와 한국군 내부의 사건 은폐 조작 움직임 때문에 난항을 겪고 있다. 1차 수사 결과 발표장에서 자살로 결론을 낸 미군 CID측은 당시 유족의 반발이 거세자 ‘과학적인 증거만 제시하면 얼마든지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고 서둘러 발표장을 떠났다. 그러나 미국내 권총 사망자 부검 전문가인 노여수 박사가 ‘타살’이라는 법의학적 소견을 내놓았음에도 미군측은 상부 지시라며 더 이상 외부인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 한국군 검찰이 총기 시험을 위해 미군측에 M9베레타 권총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결국 사건 진상 규명 작업을 미군측이 훼방하는 가운데 한국군 수사 당국은 수사 답보를 미군 핑계로 떠넘기고 있는 형국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조차 사건 관련 서류를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사저널>이 이 사건을 계속 추적하면서 입수한 군의 공식 자료를 통해 밝혀졌다(35쪽 문서 참조). 김중위가 사망한 직후인 2월 말 한미연합사는 ‘제목:JSA 경비소대장 사망 관련 상황 조치’라는 공식 보고 자료를 내놓았다. 여기에는 사건 당시 판문점에 있었던 카투사 상황병과 미군측 DDO, 미군 작전처 부처장 러니 중령 등 3명이 ‘총소리가 났다’ ‘총소리를 들었다’고 말한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러나 최근 군 당국이 국회 국방위원회에 제출한 사고 직후의 상황 보고 자료에서는 총소리와 관련한 대목을 모두 지운 채 원래의 자료인 것처럼 꾸며 보냈다.

이는 한·미 양국군이 4월29일 자살로 수사 발표를 하면서 그 증거로 아무도 총소리를 듣지 못했을 만큼 밀착 사격을 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 점과 연관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미군 수사 발표문에는 ‘김중위가 밀착 사격으로 자살했다. 밀착 사격 때문에 총소리가 소음되어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라고 적혀 있다. 바로 이런 결과를 끝까지 고수하기 위해 최초 총성 청취자들의 증언 기록을 이제 와서 고의로 지웠다고밖에 볼 수 없는 대목이다.

이런 증거 문서 조작은 총성이 들렸느냐 여부가 밀착 사격(자살)이냐 근접 사격(타살)이냐 여부를 가리는 과학적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아직도 군 일각에서 사건 진상을 은폐하려 하고 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군 검찰은 이같은 내부 문서 조작 의도와 경위를 철저히 조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 훈 중위 의문사 사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6개월째 동분 서주하는 아버지 김 척 예비역 육군 중장의 각오는 비장하다. 과학적 증거와 소견을 제시했는데도 군 검찰이 계속 자살로 꿰어맞추려는 식의 수사 태도를 보인다면, 지금까지 드러난 군 내부의 사건 조작 은폐자들을 모두 고소하고, 미군측의 반인권적 처사에 대해서도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소하겠다고 배수진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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