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영혼의 따뜻한 동반자 '호스피스'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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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 환자를 ‘편안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호스피스
과연 ‘행복한 죽음’은 있는 것일까? 부천 성가병원 호스피스 병동의 박선영 간호사(28)는 올해로 간호사 생활 5년째를 맞는다. 줄곧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다가 95년 이곳으로 옮겼다. 중환자실에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환자들을 돌보다가 죽음 쪽으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간 셈이다. 그러나 박간호사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중환자실의 ‘삶’보다 더 행복한 ‘죽음’을 자주 목격한다.

그는 지난해 7월 숨진 황 아무개씨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황씨가 이 병동에 입원한 20일 동안 그처럼 평화롭고 행복에 겨운 인간의 표정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술을 전공한 황씨는 예술적 감성만 충만한 것이 아니라 신체도 건강했다. 보디빌딩 대회에서 입상했을 정도면 자신의 몸을 얼마나 아끼며 가꾸어 왔는지 알 만하다. 어느 날 식사 도중에 급작스레 구토해 인근 개인 병원을 찾은 황씨는 그 자리에서 ‘위암인 것 같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귀를 의심했다. 왜 하필 내게? 가정도 꾸려 보지 못한 서른 나이는 죽음이라는 잿빛 단어를 떠올리기에는 너무나 푸른 빛이었다. 어머니에게는‘위염’이라고 둘러댔다.

호스피스 후원금 백만원 유언으로 남겨

황씨는 어머니 몰래 다른 사람을 앞세워 대학병원에 입원해 얼마 만에 수술을 결심했다. 그러나 의사는 고개를 가로젓고 메스를 놓아 버렸다. 열렸던 그의 몸은 그대로 다시 닫혔다. 활발하기만 하던 그의 성격도 함께 닫혀 버렸다.

그는 그 뒤로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했다. 바닷가에 방을 얻어 요양 생활을 하면서도 그의 자살 시도는 계속되었다. 번번이 자살에 실패한 그가 결국 가족의 권유로 호스피스 병동을 찾은 것은 지난 6월 말. 여기서 그는 비로소 호스피스들의 도움을 얻으면서 자살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났다.

그가 죽기 전까지 매일같이 써놓은 병상 일기는 이 병동에 근무하는 수녀와 간호사 등 모든 호스피스 봉사 요원들이 한 부씩 복사해 나누어 가졌다. 그의 병상 일기는 호스피스 봉사자나 말기 암 환자들에게, 호스피스 교재에 나오지 않는 산 교과서가 되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스무 날을 보내며 그렇게 즐거워하던 그가 눈을 감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가족이 찾아와 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황씨는 자신이 가입했던 암 보험금 중 백만원을 떼어 호스피스 후원금으로 내 달라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황씨처럼 나이가 젊을수록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폐쇄적일 수 밖에 없다. 결혼 반지의 반짝거리는 윤기가 아직 그대로 있는 결혼 2년째인 한상욱씨(29)와 원옥희씨(30) 부부도 처음에는 그랬다. 비록 원옥희씨가 시한부 삶을 살고 있지만 이들은 요즘 부천 성가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신혼 기분을 누리며 함께 산다. 남편 한씨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고, 원씨는 자신의 통증보다 혼자 남을 남편 생각 때문에 더 괴롭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

이들 부부가 호스피스 병동을 찾은 것은 부인 원씨의 간곡한 요청 때문이었다. 흔히 ‘사망 대기실’이라 불리는 호스피스 병동에 대한 거부감이 없지는 않았다. 2년 가까운 투병 기간 중 한씨 부부는 신(神)이 한 번도 자기들의 편이 아니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정작 부인 원씨는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 신의 선택에 자신을 맡겼다.

원씨는 요즈음 호스피스 봉사 요원들을 만날 때마다 ‘몸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이 자원 봉사’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갑자기 닥쳐 온 죽음 앞에서도 원씨는 죽음을 준비해온 사람들마저 생각하기 어려운 경건한 삶의 자세를 짧은 기간 동안 발견해낸 것이다.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에 정해진 수명이란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뒤주 속의 쌀알처럼 많은 날들이 자기 앞에 펼쳐져 있다고 느끼는‘건강파’들도 홀연히 찾아오는 죽음의 초청을 거부하지는 못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을 때 그동안 사랑을 나누며 서로를 부축해 주었던 가족과 동료, 자식과 배우자 들은 영원한 남이 된다. 그래서 죽어 가는 과정과 순간을 지켜보는 동반자야말로 한평생 함께했던 사람들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일 수 있다.

석 달 전 간암 판정을 받고 성바오로병원에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 김기환씨(41)가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죽음의 순간을 기다릴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반려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가 경찰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더 가망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성바오로병원 호스피스 병동을 찾았을 때 그를 맞이한 곳은 병실이 아니었다. 임종 환자를 위해 따로 만든 ‘임종실’이었다.

대부분의 호스피스 병동은 환자가 임종했을 때 가족이 통곡하면 다른 환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말기 환자 병실과는 별도로 임종실을 두고 있다.

이 병원으로 실려 왔을 때 김씨는 의식 불명 상태였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는 이 임종실에서 ‘죽음의 고통’을 극적으로 밀어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안정을 찾게 되자 허리가 끊어질 것 같던 통증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고 식사도 훨씬 더 잘할 수 있었다. 김씨의 부인은 “건강할 때에 비하면 몸무게가 15㎏이나 빠져 육체적으로는 쇠약하기 이를 데 없지만 심리적으로는 누구보다도 행복해 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김씨는 간호사와 자원 봉사자가 한 팀이 된 호스피스 간호를 받으면서 심리적·육체적 안정을 되찾았다.

살아 있을 때 필요한 ‘죽음 교육’

갑작스레 닥쳐온 죽음을 차분하게 맞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암 세포가 번질 대로 번져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처음에는 모두가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의도적 외면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사람들이 죽음과 맞부딪치면 대개 부정→분노→타협→우울 등의 반응을 단계적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이처럼 복잡하고 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죽음에 대한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한 한국인들은 특히 죽음을 끝까지 부정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95년부터 서강대에서 ‘죽음의 심리적 이해’라는 제목으로 ‘죽음학’을 강의하고 있는 김옥라씨는 강의 때마다 학생들에게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이나 자신의 죽음을 가정하고 유서를 쓰게 한다. 유서를 써본 학생들의 반응은 가지가지이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반응은 ‘사는 자세가 숙연해진다’는 것. 시험 답안을 제출할 때 답안지 귀퉁이에 ‘강의를 듣고 나서 생사관(生死觀)을 바꾸게 되었다’고 써넣은 학생도 적지 않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례라 할 만하다.

10년 동안 자원봉사자들을 상대로 호스피스 훈련을 병행해 온 김씨는 ‘주위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언젠가 닥쳐올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다 지난해 정년 퇴직하고 2년째 호스피스 봉사 활동에 나서고 있는 김춘일씨(60)는 요즈음 1주일에 두 번씩 성바오로병원 호스피스 병동을 찾는다. 그는 이 곳에서 하루 3시간씩 환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정작 호스피스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깨닫는 것이 더 많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 자체가 변하는 것 같아요. 조금 빨리 닥치느냐 늦게 닥치느냐 하는 차이일 뿐 누구나 죽음 앞에 불려가는 것은 똑같잖아요. 당연히 삶에 대한 태도가 훨씬 진지해집니다.”

성바오로병원에는 호스피스 자원봉사자가 약 20명 일하고 있다. 이들의 역할은 단순히 임종을 기다리는 말기 환자를 간호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임종하는 순간 옆에서 자리를 지켜 주는 것은 물론 그 후의 장례 의식에까지 참여한다. 임종 순간을 지키기 위해 병원의 호출을 받고 급히 달려오는 경우도 많다. 호스피스를‘영혼의 조산사’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태아를 가장 처음 맞이하는 조산사가 있듯이, 죽음 앞에 선 이들에게 새로운 영혼을 선물하는 조산사 역할을 이들이 떠맡는다는 것이다.

임종 앞둔 눈동자에서 ‘희망’ 발견

‘호스피스’라는 단어는 라틴어 호스페스(hospes:손님) 또는 호스피툼(hospitum:손님 접대 또는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이라는 단어에 뿌리를 둔다. 그만큼 죽음이라는 손님을 경건하게 맞을 준비는 이제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코앞에 닥친 대량 실업의 태풍 앞에서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이 있다면 호스피스 병동에 한번 들러 보라. 유서를 품안에 넣고 다닌다는 부도 기업 사장들도 한번 들러봄직하다. ‘호스피스 병동=사망 대기실’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거기서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져 가는 말기 환자들의 눈동자에서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찾아낸다면 아무리 고통스런 삶일지라도 그것이 새롭게 보일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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