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 ‘사기업 해고자 복직’
  • 박성준,성기영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6.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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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총 “노사 교섭 대상 아니다” 이의 제기… 민주노총 자본가와의 싸움 선포
 
지하철 전동차는 멈추지 않았다. 통신 대란도 없었다. 병원 업무가 마비되어 위급한 환자들이 쓰러지는 불행한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울지하철공사·부산교통공단·한국통신·전국의료보험조합(전국의보) 등 국민 경제와 일상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대규모 공공 부문 사업장의 노사 분규가 총파업에 돌입하기 직전 잇달아 타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끝은 아니었다. 노·정간 갈등이 ‘한발짝씩 양보’로 매듭지어지자, 이번에는 경영자 쪽이 불만을 들고 나와 상황이 다시 복잡해지고 있다.

공공 부문 사업장에서 노·사가 화합의 악수를 나누기 직전까지 교섭장 안팎의 분위기는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듯한 살얼음판이었다. 공공부문 노동조합 대표자회의(공노대) 소속 5개 노조는 일찍부터 △해고자 원직 복직 △임금 가이드 라인 철폐 △노조 전임자 수 축소 방침 철회 등 6개 항을 공동 요구 조건으로 내걸고, 6월20일 0시를 기해 동시 파업에 돌입한다고 공언했던 터였다. 정부측은 이에 맞서 파업 시한이 임박했던 6월19일 문제의 사업장에 대해‘직권 중재’를 발동했다. 직권 중재가 발동된 사업장에서 노조가 파업하는 행위는 불법으로 규정되고, 정부는 당연히 공권력을 투입할 권리를 얻는다. 상황은 점점 노·정간 정면 대결 쪽으로 기울어갔다.

6월19일 밤, 대결 분위기는 곳곳에서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서울지하철공사 노조(위원장 석치순)는 이 날 저녁 7시30분부터 서울 용답동의 군자 차량기지에서 조합 산하 차량지부·기술지부·역무지부 조합원 4천여 명을 소집해‘투쟁 역량’을 총동원하기 위한 대규모 조합원 총회를 열었다. 이들이 모인 차량기지내 3·16 광장에서 약 2백m 떨어진 교육원 건물 3층에서는 노조측과 공사측 대표들이 밤 9시부터 교섭 타결을 위한 막바지 협상을 하고 있었다.

‘산업 평화 시대 개막’ 아직 일러

 
극적 타협 소식이 알려지기 전까지 총회 분위기는 ‘파업 결행’ 일변도였다. 누구도 협상의 진전 내용을 알지 못했으며, 교섭 도중 중간 보고를 위해 조합원 앞에 나선 위원장마저 “협상이 결렬되는 즉시 파업에 돌입한다. 모두 끝까지 투쟁해 최후 승리를 쟁취하자”라고만 외쳤다. 교섭이 난항을 겪고 있던 밤 12시40분께 광장 한켠을 메우고 있던 조합원 천여 명이 일제히 총회장을 빠져나가기도 했다. 파업을 결행할 경우, 예상되는 공권력 투입에 대비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투쟁력을 최대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한국통신공사 노조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6월19일 다시 열린 이 회사 단체 교섭은 11시 속개, 12시 정회, 오후 1시 속개, 40분 뒤 정회 등 30분~1시간 간격으로 정회와 속개를 되풀이했다. 협상이 일단 결렬되자 노조측은 파업을 위한 구체 작업에 들어갔다. 서울지부의 경우 노조측은 밤 10시께부터 서울대에 3천명, 조계사에 2천5백명, 명동성당에 천명 식으로 ‘병력’을 안전 지역에 분산 배치했다. 미리 명동성당에 들어가 있던 노조측 사령탑 유덕상 위원장은 핸드폰을 통해 실무교섭팀으로부터 수시로 상황 보고를 받으며 파업 준비를 진두 지휘했다.

긴장감이 안도감으로 바뀐 것은 6월20일 새벽부터이다. 먼저 △해고자 구제 범위 △임금 인상 수준 △사측이 노조측에 대해 단행했던 노조 재산 가압류 조처와 손해배상 청구 소송 취하 문제를 두고 밤새껏 진통을 거듭했던 서울지하철공사의 노·사간 교섭이 이 날 새벽 4시30분 타결되었다. 양측 합의의 주된 내용은 △복직 대상자 수 15명 △임금 인상률 8% △노조 재산 가압류 조처 사실상 철회 등이다.

날이 밝으면서 파업 철회 분위기는 한층 뚜렷해졌다. 해고자 복직 범위와 장기 근속자 자동 승급 문제에 걸려 막판까지 타협점을 찾지 못했던 한국통신 노·사가 이 날 11시30분께 마침내 쟁점을 타결하고 합의서를 작성해 발표했다. 한국통신 이 준 사장을 대신해 발표장에 나온 김노철 부사장은 △총액 대비 임금 인상률 8% △복직 대상 해고자 수 6명 △장기 근속자 자동 승급 등 주요 합의 내용을 전했다.
이보다 조금 앞선 오전 9시께, 또 다른 공노대 소속 사업장인 전국의보에서도 반가운 소식이 새어나왔다. 농어민 연금의 위탁수수료 문제와 시간외 수당을 포함한 임금 문제가 단 한 건도 해결되지 않아 쟁의 발생을 결의하고 파업까지 선언했던 이 사업장 노조가, 사측과 막판 타협을 이루어 파업을 철회한 것이다. 노·사 양측이 공동 서명한 협약서 내용은 간단했다. ‘89년 이래 노조 활동으로 인하여 발생한 해고자의 복직을 노·사는 화합 차원에서 합의하며, 추후 복직 협상을 (오는) 7월19일까지 실무위에서 협의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화를 통해 일단 파국을 모면한 결과에 대해서는 모두가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6월20일 노·사 합의 내용을 발표했던 한국통신 김노철 부사장은 “이제 남은 일은 노사 대화합을 이루는 것 뿐이다”라고 말했다. 공노대 투쟁을 연대파업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한 간부도 “협상 결과에 대해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으나, 과거와 달리 해고 노동자 문제를 본격 교섭 탁자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성과가 있었다”라고 긍정 평가했다.

그러나 본격적인‘산업 평화 시대 개막’을 선언하기에는 때가 이르다. 공노대가 제시한 요구 조건 6개 항 가운데 상당수가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공익 사업장의 노·사 교섭에 국가가 강제 중재할 수 있는 노동법상 관련 규정이 대표적이다.

이른바 ‘직권 중재’로 알려진 이 조항은 노동법 학계에서조차 ‘노조의 단체 교섭권을 결정적으로 제한한다’는 이유로 위헌성을 지적하는 등 문제를 제기해 왔지만, 이번 공노대 연대 파업 싸움에서도 여지없이 발동되었다. 정부가 특정 사업장에 대해 직권 중재를 발동할 경우, 노조측은 15일간 쟁의 행위를 할 수 없으며, 이 때부터 노조측 파업은 불법이 된다. 실제로 이 조항은 94년 철도·지하철 노조 연대 파업 때와, 지난해 한국통신 노사 분규 때에도 정부측이 노조측 쟁의 행위를 분쇄하는 데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정부측 임금 가이드 라인 등도 쟁점

공익 사업장에 대해 정부가 관철해온 임금 가이드 라인 항목과, 지난해부터 불거져 나온 노조 전임자 수 축소 항목도 여전히 뜨거운 쟁점으로 남아 있다. 이들 두 가지 항목이 공공 부문 사업장에서 ‘노·사 자율 협상’ 원칙이 실현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노조측은 특히 정부측 임금 가이드 라인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공노대 이경우 집행위원장은 “서울지하철·한국통신 등 출범 당시 공무원보다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사업장에서 역전 현상이 벌어진 주요 원인이 임금 가이드 라인에 있다. 이를 없애지 않는 한 공공 부문에서 임금을 비롯한 근로 조건을 개선하기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공공 부문 노·사 타협을 지켜본 민간 부문 사용자측에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공공 부문 주요 사업장에서 교섭이 타결된 직후인 6월21일 긴급 회장단 회의를 열어 공공 부문 사용자측이 해고 노동자를 복직시키기로 한 데 대해 ‘해고자 문제는 노·사 교섭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공공 부문의 협상 결과가 현재 진행 중인 민간 부문의 개별 사업장 노·사 협상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다. 실제로 93년 이후 민간 부문에서 발생한 해고 노동자 가운데 미복직된 노동자는 4백19명으로 공공 부문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경총이 입장 표명을 하자 공노대와 민주노총은 즉각 반박에 나섰다. ‘해고자 복직은 노동계의 새 출발을 위해서도 당연한 일이며, 법적으로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도 이 말에 동조한다. 국민대 이광택 교수는 “인사상의 문제라 하더라도 그것이 근로 조건과 관계되는 것이면 교섭 대상이 된다는 견해가 노동법 학계의 통설이다”라며 경총 논리를 공박하고 나섰다. 당사자인 공노대는 경총의 발표가 있은 직후 ‘하반기 투쟁은 개혁을 저지하려는 자본가 움직임에 쐐기를 박는 데 주력하겠다’며 ‘노·자 싸움’을 선포했다.

재계가 종래 입장을 고수하는 한 충돌은 피할 수 없다. ‘노·정 대립의 시대’가 가고 ‘노·자 대립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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